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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03.14 23:43
(85) 한혜진: 봄비는 첫사랑, 그리움, 그리고...
조회 수 2610 댓글 1
에피소드 & 오브제 (14) 봄비에 대한 명상
봄비는 첫사랑, 그리움, 그리고...
봄은 사랑을 안하면 더 몸살이 나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면, 흠뻑 봄비를 맞고 앓아 눕듯이, 사랑의 열병에 빠져 한 번 아파보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에야, 저 예쁜 꽃들에게, 저 푸르른 나무들에게 내 어찌 눈 흘길 수 있으리오.
봄비가 좋다. 사랑의 예감처럼 촉촉해서 좋다.
그것은 봄비였다.
맨하탄에 나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차를 달리는 내내 하늘은 청청하였다. 그런데, 한 순간, 마른 하늘에 날벼락친다더니, 색깔이 변한 구름 사이로 물방울들이 급하게 쏟아져 내리며 앞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경쾌한 디스코 음악에 몸을 맡긴 젊은이들 같았던 차량 행렬은 무디 블루스 음악으로 바뀌어 버린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데, 머리 속에 떠오른 상상은 이랬다.
봄은 사람을 불러내는 계절 아닌가. 싱숭생숭해진 처녀의 마음은 사랑을 따라 보따리를 싸게 했고, 그 내색을 눈치 챈 아버지의 불호령에,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 처녀가 만들어내는 광경. 갑자기 내린 빗줄기는 바로 그 처녀의 눈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봄비는 울면서 오는 것 같다. 울면서 길을 떠나고, 서러워하면서 손을 흔드는 그 때, 흐를 수 밖에 없는 눈물처럼 봄비는 온다.
크로스 아일랜드 파크웨이 왼쪽으로 펼쳐지는 정경은 바다와 비가 맺어질 때,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헐벗은 온 몸을 비에 적시는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봄비를 흠뻑 맞고 젖어볼 수 있다면, 그 날 이후, 감기몸살깨나 앓을지언정 내 삶 어느 부분에 영양분이 될 비타민을 섭취해 두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느끼다가 울음이 잦아들듯이, 빗줄기는 앏아지다가 물기를 거두었지만, 퀭한 눈으로 변해버린 흐린 날씨는 아련한 생각을 일으키키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봄비는 첫사랑과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에 맞장구가 금새 쳐졌다. 그 섬세한 빗줄기에 뼛속까지 젖어버리는 현상은, 첫사랑의 감흥와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는데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단 하나의 생각에 모든걸 맡기던 때, 그 때 찾아왔던 사랑을 이름하여 첫사랑이라 부르는 건 아닐런지. 거기에다가 우리는 맹목적이라는 수식어를 갖다붙이며, 사랑을 할 때 보편적으로 갈구하는 순수의 즙을 얻으려고 기울였던 욕망의 발자취를, 오늘 같은 날,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하는 것이리라.
봄비 속에는 그리움도 들어 있고, 또한 기다림이 묻어나서 좋다. 봄비는 봄을 재촉한다. 봄이란 계절은 메마르고, 얼어붙은 땅을 재촉하는 어떤 작용, 즉 봄비처럼 흥건히 적셔주고, 안아주는 힘이 발화하는 현상일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봄비가 사랑과 닮아있는 순간이 된다. 봄은 사랑의 실마리를 찾아나서는 계절이다. 그리하여 만물의 소생이 이루어지는 봄은 사랑이 발화하여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봄에는 마냥 기쁘다가도 한없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마치 사랑의 양면성을 보는 것처럼… 그러나, 어쩌랴, 봄은 사랑의 계절인걸. 그리고, 봄비는 사랑을 살며시 부추기기 시작하는 걸. 사랑은 어쩌면 몸살과 같다. 그리고, 봄은 사랑을 안하면 더 몸살이 나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면, 흠뻑 봄비를 맞고 앓아 눕듯이, 사랑의 열병에 빠져 한 번 아파보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에야, 저 예쁜 꽃들에게, 저 푸르른 나무들에게 내 어찌 눈 흘길 수 있으리오. 봄비가 좋다. 사랑의 예감처럼 촉촉해서 좋다.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