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9)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2)
- 홍영혜/빨간 등대(70)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108) 이수임: 그날 이후 난 전업주부가 됐다
창가의 선인장 (20) 우리 남편 철든 사연
그날 이후 난 전업주부가 됐다
쇼크요법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남편을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놀랄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드는 것 같다.
Soo Im Lee, A masked man, 2008, sumi ink on paper, 12 x 9 inches
오래전 브루클린의 한 옷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였다. 밖을 내다보니 가게 문 옆에 웬 남자가 여자들이 신는 살색 스타킹을 머리 위에 돌돌 말아 얹어 놓고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서 ‘별 미친 녀석이 다 있네!’ 하며 속으로 웃었다.
“돈 내놔!”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던 그 남자가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누런 봉투에 감아진 총을 나에게 들이댔다. 영화에서만 봤던 스타킹을 쓴 일그러진 얼굴을 실제로 보게 되니 너무 이상하고 우스웠다. 어떻게 일그러졌나! 자세히 들여다보려는데 봉투를 내 얼굴 가까이 대며 돈을 안 주면 “죽일 거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과연 봉투 안에 총이 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야 웃기지 마, 놀고 있네.” 하며 내가 봉투를 확 낚아채려 하자 강도가 오히려 놀라 나를 밀치고 금전등록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돈을 집히는 만큼 갖고 달아났다.
달아난 도둑을 쫓아서 가게 밖으로 뛰어 나가려는데 점원들과 쇼핑하던 손님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의 한 점원은 벌벌 떨며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내 다리가 비로소 떨리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왜 그랬냐, 미쳤느냐.”며 사람들이 난리였다. 과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고, 처음 있는 일이라 얼마나 위험했는지 감지도 못했다. 한 마디로 무지가 사람 잡을 법한 경우였다.
옷 가게 주인이 놀라 달려와서 “돈을 달래면 무조건 주지 왜 그랬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핀잔을 했다. 일주일 전에도 옆집 피자 가게에 강도가 들어와 돈을 안 주다 총에 맞아 죽었단다.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 떨리기 시작하며 기운이 빠졌다. 그제야 무서운 사건이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배는 점점 심하게 아팠고 하혈을 했다. 임신 3개월 된 아이가 떨어진 것이다. 아픈 배를 쥐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엔 병원에 실려갔다.
다음 날 남편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벌어 먹여살릴 테니 집에 있으라”며 스튜디오 문밖의 자물통을 채우고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가게 키를 갖고 왔는데 출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인 아저씨가 와서 창밖으로 열쇠를 던져 주는 것으로 나의 직장 생활은 끝났다.
결혼 초 그 사건 이후, 나는 전업주부가 됐다. 남편이 그때 꽤 놀랐나 보다. 화가 남편이 그림 그린다고 아내 돈 벌러 내보냈다가 송장 치울 뻔했다. 그림 그리는 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는 일이고, 입에 풀칠은 하고 나서 하는 일이다. 뭐 그리 대단한 그림이라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하겠는가.
그 후로도 생활이 어려워 직장을 잡아 보려고 신문을 뒤적거릴 때마다 남편은 “집에서 아이들이나 잘 키우라는데.” 며 화를 내곤 했다. 화가를 남편으로 둔 여자가 집에서 푹 쉬고 있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