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File
2013.09.22 16:50
미셸 김 뉴욕필 부악장과 한인 연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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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필의 코리안 파워: 미셸 김 부악장과 코리안 뮤즈들
뉴욕필의 한인 연주자들. 이현주(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미셸 김, 리사 김, 권수현, 함혜영, 김명희, 리사 지혜 김.
Photo: 양영웅
다음 인터뷰는 중앙일보 2010년 7월 17일자에 게재된 기사를 보완한 것입니다.
전설적인 작곡가 말러와 토스카니니, 그리고 번스타인이 지휘봉을 잡았던 오케스트라. 1842년 창단된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은 미국의 ‘빅 파이브(Big Five)’ 중에서도 최고의 역사를 보유한 미국의 간판 교향악단이다.
매년 아시아와 유럽 등 해외 투어를 하는 뉴욕 필은 문화와 이념의 장벽을 넘어 음악외교의 선봉에 서는 오케스트라로도 부상했다. 2008년 2월 평양에서 역사적인 콘서트를 열어 세계의 눈길을 끈 뉴욕 필은 내친김에 쿠바 공연까지 추진 중이다.
이 뉴욕 필 단원 106명 중 한인 연주자들은 소수민족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77년 최초의 아시안 연주자로 입단한 김명희씨를 비롯해 부악장 미셸 김, 제2 바이올린부의 부수석 리사 김, 함혜영, 권수현, 리사 지혜 김, 장민영, 이현주씨와 첼로부의 부수석 아일린 문씨까지 뉴욕 필엔 한인 뮤지션 9명이 최근까지 포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명희씨는 지난달 은퇴했고, 장민영씨는 지난해 LA 필하모닉으로 이적해 현재 7명이 활동 중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12일 오후 링컨센터에서 뉴욕 필의 한인 ‘음악대사’들을 만났다. 휴가 중인 첼리스트 아일린 문씨 대신 은퇴한 김명희씨가 후배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Update>
뉴욕필에는 부악장 미셸 김을 비롯해 바이올린부에 리사 김•함혜영•권수현•리사 지혜 김•이현주•오주영•한나 최•유진석씨 그리고 첼로부에 아일린 문, 패트릭 지씨, 플루트부에 손유빈씨가 활동 중이다.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document_srl=3254281&mid=TodaysPick
뉴욕 중앙일보=박숙희 기자
사진=양영웅 인턴기자
뉴욕필하모닉의 한인 뮤즈들
“지휘자 로린 마젤에게 한국어 가르쳤었죠, 살짝 구박도 하면서요”
미셸 김(37·한국 이름 김미경) 부악장
서울에서 태어나 11세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미셸 김은 고3 때 대통령 장학생으로 선발돼 케네디 센터와 백악관에서 연주했다. 콜번 공연예술학교와 USC 손톤 음대를 졸업한 뒤 2001년 뉴욕 필의 부악장으로 입단했다. 생일(10월 1일)이 같아 운명적으로 만난 사업가 최승혁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LA 밖에서 살 용기가 없어 LA에 뿌리 내리고 오래 잘 살기로 다짐했을 무렵이었지요. 다음해 1월 서울에서 결혼식도 예정됐고요. 그런데 두 통의 전화가 온 거예요.”
2000년 10월 미셸 김은 뉴욕 필의 수석 부악장 셰릴 스태플스와 로버트 립셋 콜번음대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이듬해 초 김씨는 한 남자의 아내와 뉴욕 필의 부악장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역할’을 맡으며 뉴욕에 왔다. 서울에서 LA를 거쳐 뉴욕에서 인생의 제3막을 시작한 셈이다.
● 바로 부악장으로 입단했는데.
“스태플스와 립셋 교수가 ‘뉴욕 필에 부악장 자리가 났으니 오디션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뉴욕에서 살 자신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둘이 ‘인연을 끊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오디션을 하게 됐다. 많은 기대는 안 하고 연습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닷새 동안 줄리어드 음대생의 기숙사 소파에서 자며 오디션을 했는데, 12월 마지막 주 뉴욕 필과의 3차 오디션까지 가서 합격했다.”
그는 11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립셋 교수를 사사한 이후 스태플스와 중·고등학교, 대학을 함께 다녔다. 립셋 교수는 시카고심포니 악장, 보스턴심포니 수석 등을 키운 명교수였다.
● 부악장의 역할은.
“악장을 도와주고 악장이 전해주는 지휘자의 음악적인 해석을 단원 모두에게 전달하는 책임이 있다. 악장이 없을 때는 악장을 대신하기도 한다. 2001년 3월 오자마자 악장 역할부터 했다. 당시 악장(글렌 딕테로)은 휴가 중이었고, 수석 부악장(셰릴 스태플스)은 출산으로 자리를 비웠었다.”
● 무엇이 뉴욕필을 위대하게 만드나.
“세계 문화의 심장 같은 곳에서 뉴욕 필의 자존심을 연습과 연주로 보상받으려는 것같이 연주마다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특히 화려한 음색과 잘 짜인 앙상블은 언제 들어도 황홀하게 표현된다. 금관악기들의 고급스럽지만 힘있는 소리, 목관악기들의 화려한 테크닉과 조화, 현악기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가 돼 마치 신들린 듯 흔들림 없는 연주를 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콘서트는.
“평양과 서울 공연이다. 마치 흑백과 컬러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북한 콘서트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한국에서의 연주는 회한과 만감이 교차했다. 한국인으로, 뉴욕 필의 단원으로, 또 음악을 통해 국제교류를 돕는 음악대사의 입장에서 큰 일을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08년 2월 로젠 마젤이 이끄는 뉴욕필하모닉은 평양에서 역사적인 콘서트를 열었다. Photo: AP
● 평양 공연을 앞두고 지휘자 로린 마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던데.
“지휘자님이 공연을 앞두고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해 오선지에 말과 악보로 다음 날까지 그려 달라고 하셨다. 5장의 악보를 갖고 나흘 동안 한국어 과외를 하며 내가 감히 짜증도 내고 살짝 구박도 했다. ‘를, 러, ㄴ, 의’를 제일 어려워하셨다. 공연 때 한국어를 하실 때는 내 눈치도 살짝 보시는 게 참 귀엽게 느껴졌다.”
(*지휘자 마젤은 평양 공연 당시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기 전 한국어로 “좋은 시간 되세요”라고, ‘파리의 미국인’을 소개하면서는 “즐겁게 감상하세요”라고 말했다.)
● 좋아하는 지휘자는.
“쿠르트 마주어와 리카르도 무티다. 마주어는 나에게 뉴욕 필의 첫 지휘자이기도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치 신들린 사람같이 지휘를 하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리더십에 항상 감동을 받는다. 무티 또한 재치 있고,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음악만을 위하는 지휘자다. 연주 때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는 무한한 ‘음악의 원천’ 같은 지휘자라고나 할까.”
(*쿠르트 마주어(83), 로린 마젤(80) 등 노장에서 지난해 젊은 지휘자 앨런 길버트(43)가 음악감독으로 영입됐다(길버트는 은퇴한 뉴욕 필의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길버트와 아직도 뉴욕 필 현역인 일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다케베 요코의 아들이다).
● 앨런 길버트는 어떤 지휘자인가.
“길버트는 젊지만 열정이 많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겸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다.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신선한 해석으로 음악을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풍부한 감정으로 많은 청중에게 쉽게 음악을 이해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다.”
● 음악적인 가족인가.
“서울대 작곡과를 나온 아버지(김정길 뉴저지 나눔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성악도 잘한다. KBS TV와 라디오 오락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기독교 방송국 합창단도 지휘했다. 목사의 딸인 어머니(김경자)는 완벽주의자인데, 10여 년 전부터 첼로를 배워서 아버지가 이끄는 나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2000년 서울에서 큰 아버지 70세 생신 때 선물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서 대신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재능으로 음악회를 열어 드렸다.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들과 사촌을 모으니 테너, 바리톤, 피아노, 오르간,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메조소프라노까지 구성됐다. ‘그리운 마음’과 ‘고향’ 등 한국 가곡에서 베토벤, 리스트, 찬송가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연주회를 열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아들(윤제·6)은 피아노를 배우고, 딸(다연·4)은 바이올린에서 피아노로 바꾸었다.”
● 미국 생활엔 잘 적응했나.
“캘리포니아로 처음 왔을 때 비교적 어린 나이라서 쉽게 미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민생활은 부모님들에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가득했다. 특히 음악을 하신 아버지는 직업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 어려움을 보고 듣고 자라다 보니 내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또 참으면서 연습을 했다. 성공만이 부모님께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연주와 가사를 어떻게 조율하나.
“2003년 첫 아이를 낳자 LA에 살던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도 뉴저지로 이사 왔다. 친정 부모님이 식구들을 돌봐 주어 해외 연주도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애들과 놀아주면서 무엇을 해먹을까가 제일 큰 고민이다. 연습은 밤에 해야 하나 새벽에 해야 하나가 매일 같은 숙제다. 무뚝뚝한 진주 출신 신랑과는 함께 와인 한잔에 쇼 프로그램을 보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김명희(2010년 6월 은퇴)
서양음악에 흥미가 많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열 살 때 이민을 와 줄리아드 음대와 대학원에서 이반 갈라미안 교수를 사사했다. 워싱턴 DC의 내셔널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3년간 연주생활을 한 후 1977년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에 입단한 첫 번째 아시안이자 8번째 여성 단원이었다. 올 6월 단원 생활 32년 만에 은퇴했다. 의사 히람 S 코디 3세 박사와 사이에 3녀.
● 입단했던 1977년과 지금 뉴욕 필을 비교하면.
“내가 입단했을 때 단원의 구성원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아시안은 한 명도 없었고, 여성 연주자도 8명에 불과했다. 이젠 과반수가 여성이며 아시안도 상당수다.”
● 가족 중에 음악 하는 사람이 또 있나.
“형제가 위로 여섯인데, 몇 명은 피아노를 배웠다. 교사였던 엄마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치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했다. 프린스턴대 신입생인 막내딸 빅토리아는 하피스트다. 둘째 엘리자베스는 의대생이고, 첫째 마거릿은 광고회사에서 일한다.”
● 연주자가 안 되었다면.
“유전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과학을 좋아한다.”
●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755년 제작 니콜로 가글리아노다. 뉴욕 필 입단 직후 구입했는데, 감미롭고 소리도 강력하다.”
● 가장 그리운 것은.
“세계의 청중에게 최정상의 음악을 헌사하는 훌륭한 앙상블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 기억에 남는 콘서트는.
"1983년 주빈 메타가 비발디의 4대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를 연주하라고 했다. 그때 에버리피셔홀과 할리우드 볼을 포함한 미 순회연주에서 솔로로 8차례 연주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눈을 뜨는 것 같았다.”
● 은퇴 했는데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여행과 등산이다. 미국 내 모든 국립공원에서 등산하고 싶다. 딸 마거릿은 벌써 마운트 에트나와 몽블랑을 정복했다.”
리사 김(39·한국이름 김은수)
노스캐롤라이나 랄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한국에서 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1994년 뉴욕 필에 입단해 2003년 제2바이올린부 부수석으로 임명됐다. 줄리아드 음대 석사학위를 받고, 브라이언 영 아티스츠 현악 콩쿠르, 윈스턴세일럼 영 탤런트 서치 등에서 우승했다.
● 뉴욕 필을 뉴욕 필답게 만드는 것은.
“세계 정상급 음악인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신비로운 음색과 깊이 있는 뉘앙스로 그 어느 명품 와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긴 역사만이 나타내주는 마력이다.”
● 뉴욕 필의 드레스 코드는.
“입단하자 어머니가 한국에서 검은 옷을 많이 사서 보내주셨다. 요즘은 쇼핑하면서 검정 옷이 눈에 띄면 무조건 둘러본다. 뉴욕 필은 아침이나 낮의 콘서트엔 검은색 긴팔 블라우스에 검정 바지가 허용되지만, 저녁 연주엔 반드시 긴 검은색 치마를 입어야 한다. 단, 뉴이어스이브 콘서트와 실내악 연주 때는 화려한 의상을 입어도 된다. 화려한 옷들은 단원들끼리 무엇을 입을 것인지 의논해서 함께 쇼핑하러 가기도 한다.”
● 아버지가 평양 콘서트를 반대 했다는데.
“아버지(김종희씨)가 한국전쟁 때 훈련 중 부상을 당했는데 ‘아직도 한국전쟁이 생생하게 눈앞을 스쳐간다’고 하면서 오케스트라가 평양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스트로 모시고 간다고 했을 때 정색을 했다. 많이 힘드셨다. 평양 콘서트로 한국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 사람의 무서운 사상이 조국에 반세기 이상 아픔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단된 아픔을 서로 안고 북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같은 민족 사이의 훈훈한 정도 느꼈다.”
● 한국에서 마스터클래스도 열고 있는데.
“뉴욕 필이 2년마다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갈 때마다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좋았다. 한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고기이므로 무조건 한우집을 찾아간다.”
● 싱글로 뉴욕에서 사는 즐거움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와인,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대화가 활력소다.”
● 특별히 아끼는 와인은.
“조셉 펠프스 인시그니야(Joseph Phelps Insignia)를 특별한 날에 마시려고 보관한 상태다.”
함혜영(48)
서울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이민해 줄리아드 음대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중 뉴욕 필의 영아티스트 컴피티션에서 우승하면서 1986년 아시아 연주자론 세 번째로 입단했다. 지휘자 출신 의사 새뮤얼 왕과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 바이올린보다 합창을 먼저 시작했는데.
“네 살 때 KBS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시작해 몇 년 후엔 MBC-TV의 어린이합창단에서 활동했다. 그 시절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앞에서 노래했다. 공연 후 대통령과 영부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무척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때 영부인이 얼마나 우아했는지 기억난다. 노래를 계속했더라면, 혹시나 가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일엔 이유가 있는 법. 난 이승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생애는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 24년 전 입단 당시와 지금의 뉴욕 필을 비교하면.
“들어왔을 때 아시안 연주자라고는 김명희씨와 앨런 길버트의 어머니인 다케베 요코 단 둘이었다. 재능이 많고 예쁜 한인 연주자가 많아져 정말 멋지다. 매년 한인 연주자들이 증가해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한인 단원들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
● 지휘자 출신 의사 남편 어떻게 만났나.
“1990년 주빈 메타가 새뮤얼을 부지휘자로 고용했을 때 만났다. 새뮤얼은 당시 맨해튼 이비인후과의 레지던트이자 뉴욕 유스심포니의 음악감독이었다. 뉴욕필에 들어온 후 의대를 포기하고 지휘봉을 잡았다. 결혼 후 아이가 둘 생겼는데 남편은 홍콩 필하모닉과 호놀룰루심포니에서 음악감독을 맡으며 집에 올 줄 몰랐다. 이상적인 가정을 위해 남편이 다시 의대로 돌아갔고, 현재 의사로 일하며 가끔씩 지휘봉을 잡는다.”
● 현 지휘자인 길버트는 어머니가 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언젠가 앨런이 오케스트라 곡을 지휘하던 중이었다. 6대의 솔로 바이올린이 몇 소절을 연주하고 있었다. 안쪽 세 번째 스탠드에서 여섯 번째 솔로 파트를 맡았던 어머니의 연주가 끝난 후 앨런이 ‘어, 엄마는 조금 뒤늦었네요’라고 말해 단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권수현(34)
서울대에서 김남윤·김민 교수를 사사했다. 재학 중 줄리아드로 옮겨 뉴욕 필의 악장인 글렌 딕테로 교수 지도하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빈심포니체임버, 프라하심포니체임버, 빈모차르트,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에서 솔로이스트로 연주했고, 2001년 9월 뉴욕 필에 입단했다.
● 뉴욕 필 입단 계기는.
“줄리아드에서 딕테로 선생님을 사사했고, 리사 김 언니에게 레슨을 받았기 때문에 뉴욕 필의 콘서트를 자주 접했다. 뉴욕에 오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마다 찾아다니며, 언젠가는 그런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었는데 7년 만에 바이올린 섹션에 사람이 비어 오디션을 봤다.”
● 뉴욕 필의 특별한 점은.
“16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오케스트라다. 말러, 토스카니니, 미트로폴로스, 번스타인 등 최고의 지휘자들이 음악감독을 거쳐 갔다. 세계 문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세계 정상의 음악가들과 그 전통을 이어가는 보람이 크다.”
● 평양 콘서트의 체험은.
“솔직히 어렸을 때 받았던 반공교육이 기억에 남아 있어 유일한 한국 국적 단원으로 북한에 가게 되니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내가 자란 한국이 아닌 곳에서 같은 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공연이 무르익어 가면서 청중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는 걸 느낄 수 있어 무척 감동적이었다.
‘반세기 넘는 역사 동안 갈 수 없었던 영토에 언제 또 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앙코르로 ‘아리랑’을 연주할 때는 울음을 참느라 애썼다. 그 후에도 아리랑만 들으면 너무나 슬퍼진다.”
뉴욕필은 2011년 링컨센터 플라자에서 9/11 10주년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 9·11테러 사건 때 입단했는데.
“정식 단원으로서의 첫 연주가 2001년 9·11 추모 음악회였다. 음악감독이었던 마주어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연주했는데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연주하며 느낄 수 있었다.”
● 음악 외에 즐기는 것은.
"세기말 비엔나의 음악·미술·건축에 관심이 많다. 특히 에곤 쉴레의 그림을 좋아한다. 현대 사진작가 캔디다 호퍼 작품의 고요함도 좋아한다.”
리사 지혜 김(36)
시카고에서 의사인 김석우씨와 간호사인 노경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후디 메누힌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어빙 M. 클라인 국제현악콩쿠르, 킹스빌 국제 영퍼포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오벌린 음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후 클리블랜드 음대 석사 학위와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받았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케빈 푸츠 피바디 음대 교수와 결혼, 4개월 된 아들 벤저민을 두었다.
● 최근 엄마가 된 느낌은.
“음악적 재능을 아들과 나눌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벌써 뉴욕 필의 팬이다. 임신했을 때 갑자기 발로 배를 열정적으로 차곤 했다.”
●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이었나.
“어려서 바이올린을 했고 여섯 살 때부터 콩쿠르에 나갔다.(피아노와 간호학을 공부한 그의 어머니는 그를 소아과 의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숙명여대에서 피아노도 공부한 어머니는 ‘음악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 성공의 보장이 없다’며 의대 진학을 권했다.) 하지만 바이올린과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 깨닫게 됐다.”
● 한국인으로서 평양에서 연주한 소감은.
“음악적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감동적이었던 평양 콘서트다. 엄마의 고향이 평양이라서 엄마가 게스트로 함께 북한에 갔다.(그의 어머니는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 지휘자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도 하고, 평양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것에 감격스러워했다.)”
● 뉴욕 필에서 평양 공연을 앞두고 논란이 많았다던데.
“단원들 간에도 찬반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잘 몰랐기에 엄마에게 여쭤 보았다. 엄마는 ‘할머니·할아버지가 살던 고향이니 가봐야지’ 라며 평양 행을 찬성했다.”
● 뉴욕 필의 단원으로 느끼는 자부심은.
"뉴욕 필은 가장 재능있고, 성취도가 높으며, 희생정신이 강한 연주자들로 구성된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다.”
● 평소에 즐겨듣는 음악은.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를 주로 듣지만, 1980년대 자라면서 춤추던 팝 음악도 즐겨 듣는다.”
● 20년 후의 자신을 그려본다면.
“잠이나 좀 실컷 자고 싶다!”
이현주(30)
서울에서 태어나 12세 때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데뷔했다. 서울예고 2학년 때 미국으로 이주해 클리블랜드 음대 졸업 후 줄리아드에서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필라델피아·보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대리 연주자를 지내다 지난해 6월 뉴욕 필의 아홉 번째 한국인으로 입단했다.
● 첫 음악적 체험은.
“엄마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시작해 일곱 살 때쯤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데,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청중을 못 보고 움츠렸다. 곡이 끝날 즈음엔 청중이 내 얼굴이 아닌 엉덩이를 봤다고들 한다. 내 몸이 한 바퀴를 돈 셈이다.”
● 뉴욕 필에 어떻게 입단했나.
“정말 치열했다. 거의 30여 곡 가까이 준비해야 했다. ‘도대체 이걸 누가 할까’ 하면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쟁쟁한 연주자가 많이 왔다고 들었다. 테이프 오디션에서 시작해 1차, 2차, 그리고 3차까지 하는데 마지막엔 너무 지쳐서 결과고 뭐고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 가족 중 음악인은.
“엄마(최현숙씨)가 첼로를 전공했는데, 지금까지 나의 가장 가까운 스승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엄마는 가족 트리오를 만들어 가끔 집에서 취미로 연주하고 싶어 했지만 오빠가 피아노를 너무 싫어하고 거부해 물거품이 됐다.
남편 마빈 문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비올리스트다. 한국인 부부가 두 개의 메이저 오케스트라에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남편과는 연주를 해봤지만, 사실 엄마와 연주한 적은 없다. 언젠가 가족 음악회를 꼭 하고 싶다. ”
●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부부는 어떻게 생활하나.
“남편이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거의 매일 출퇴근한다. 기차로는 1시간30분 걸린다. 아침 리허설과 저녁 연주로 서로 스케줄이 비슷하니까 주중에는 거의 볼 시간이 없다. 남편은 연주 끝나고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온다. 그래도 집에 오면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대화를 꼭 한다. 주말이 돼야 서로 여유가 생기는데, 그땐 항상 옆에서 안 떨어진다. 뉴욕엔 좋은 레스토랑, 박물관이 많아서 함께 찾아가 하나하나 즐기는 편이다. ”
Photo: Chris Lee
j 칵테일 피 말리는 오케스트라 관문
유명 오케스트라 입단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같다. 오디션은 보통 3~4차에 걸쳐 열린다. 오케스트라 작품 중 한 부분은 물론 독주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지휘자와 각 악기 수석 단원 등 ‘오케스트라 베테랑’들이 까다로운 주문도 던진다. 몇 주 동안 이어지는 혹독한 시험에 수백 명이 몰린다.
2006년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에 들어간 최나경(플루트)씨는 “168명에서 시작해 한 명으로 끝나는, 피 말리는 관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유학생들은 졸업 전 열 군데 이상의 미국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타국 생활에 ‘공포’가 별로 없는 한국 젊은 연주자가 늘어나며 외국 오케스트라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대부분은 지방의 소도시 교향악단에서 시작한다. 유럽 문턱은 더 높다.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은 자체 아카데미를 두고 단원을 차근차근 훈련시킨다. 아카데미 오디션의 경쟁을 뚫은 이들은 베를린 필에 결원이 생길 때 자리를 채우는 기회를 종종 잡는다. 이때 받은 평가와 공식 오디션 성적이 좋아야 정식 단원이 될 수 있다. 이 아카데미에 소속됐던 한국인조차 1972년 창설 이후 두 명뿐일 정도다.
콘서트 인더 파크
뉴욕 필 얼마나 버나 2009-2010시즌 최저 연봉 13만 달러
솔로이스트들처럼 무대에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아도, 미국의 굵직한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면 초봉이 10만 달러를 넘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다음 시즌 미국 내 톱10 오케스트라 단원의 초봉은 10만1600달러(미네소타 오케스트라)에서 13만6500달러(LA필하모닉) 선이다. 수석 연주자들은 이보다 2∼3배 더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필하모닉 홍보실에 따르면, 2009~2010시즌(52주)에 근거한 최저 연봉은 12만9740달러다. 뉴욕필은 다음 시즌에 대비해 연주자 12명을 공모하고 있다. 바이올린 부문 2명을 비롯해 첼로(2), 더블베이스(3), 클라리넷(2), 호른(2), 플루트(1) 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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