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9)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2)
- 홍영혜/빨간 등대(70)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134) 이영주: 옥토버페스트, 황홀한 단풍
뉴욕 촌뜨기의 일기 (28)
Oktoberfest, 황홀한 단풍
사진: 이영주 Young-Joo Rhee
올 단풍은 유난히 고왔습니다. 거의 10 여 년 만에 그렇게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엘니뇨 후유증인지 단풍들이 늘 뭔가 부족한 색깔들이어서 옛날의 찬란했던 뉴욕 단풍이 그리웠댔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찬란한 단풍을 보게 되니 가슴이 다 뛰었습니다.
저의 대학동문회 산악회에서는 매주 토요일, 산에 갑니다. 10월 16일, 단풍이 예쁘게 물든 것을 보고 23일엔 웨스트마운틴, 30일엔 미네와스카 호수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웨스트마운틴은 전망대가 많은 만큼 경관이 빼어난 산이고, 미네와스카 호수의 단풍은 워낙 유명한 까닭입니다. 이왕이면 멋진 단풍을 즐기고자 하는 유쾌한 야망이 그렇게 속삭였다고나 할까요.
10월 23일, 웨스트마운틴을 안고 있는 ‘앤소니 웨인 공원’에선 독일인들의 ‘Oktoberfest’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의 ‘10월 맥주 축제’는 아주 유명하지 않습니까? 역사가 벌써 37년이나 됐다는데, 뉴욕에서도 열리는 걸 처음 봐서 흥미로웠습니다. 나중에 하산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웨스트 마운틴은 뉴욕의 해리만 파크 트레일 중에서 조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남성적인 산입니다. 가까이 베어 마운틴이 있고, 허드슨 강 서쪽으로 'C'자 형태로 산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작을 공원의 북쪽 끝자락 흰색의 앤소니 웨인 트레일에서 했습니다. 이 길은 매우 평탄합니다. 그러다가 Fawn 트레일(흰 바탕에 빨간색 F)로 진로를 바꾸면 비로소 산이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험한 산은 아니고 업 앤 다운의 굴곡이 조금 있다는 얘깁니다. 계속 가다가 보면 블루색의 팀프토르네(Timp-Torne) 트레일과 T자로 만납니다. 오른쪽의 블루색 팀프 토르네 트레일이 이 코스의 최대 난코스이자 백미이기도 합니다. 험준한 바위산이라서 처음 산을 타는 사람들이 무척 어려워합니다. 몇 년 전에 등산을 처음 했던 동문들이 첫 산행을 이 산으로 왔다가 혼비백산한 기억이 납니다. 한 동문은 무릎이 아파서 한동안 침을 맞으며 치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사진 바위 위를 천천히 정복해가면 그래도 오를만 합니다. 굽이굽이마다 서서 내려다보는 해리만 파크의 정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우니 말입니다. 예견했던 대로 단풍은 완전히 잔치였습니다. 빨갛기만 한 게 아니고 초록과 연두, 빨강, 주황, 노랑색이 추상화보다 더 멋지게 하모니를 이룬 풍경은 가슴이 턱-턱 막히도록 신선한 희열을 듬뿍 안겨주었습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시선이 가는 곳마다 총천연색 단풍은 우리를 매료시켰습니다. 동문들은 예쁜 단풍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바빴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금년 단풍이 제대로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십 여 년간 티미한 색깔만 보다가 이렇게 선명한 색깔의 단풍을 보니 절로 젊음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기막힌 절정은 우리들의 점심시간입니다. 날씨가 워낙 좋으므로 쉘터 근처 아늑한 풀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쉘터에서는 멀리 맨하튼의 마천루가 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문의 아내가 도시락 보따리를 풀더니 데쳐 온 물오징어를 무치기 시작했습니다. 달고 새콤한 고추장 양념에 양배추, 피만, 양파, 오이, 워터크레스 등을 채 썰어 넣고 즉석에서 무친 오징어는 별미 중의 별미였습니다. 몸집은 작아도 손이 큰 그녀는 은행 지점장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오징어가 많은지 커다란 접시 세 개가 넘칠 지경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김치, 가지볶음과 두부 부침 그리고 포도, 감, 자두 등, 과일까지 커다란 용기에 꾹꾹 눌러 가져왔습니다. 막내 동문은 김밥과 꿀떡, 술떡(제가 좋아하는 떡입니다, 하하)을 가져왔고, 산악회 총무인 동문은 LA 생갈비를 가져왔습니다. (고백하자면, 제가 제 대학산악회 회장입니다.)
그래도 오늘의 주 메뉴는 제가 준비한 옛날 불고기입니다. 불고기에 여러 종류의 버섯과 양파를 썰어 넣고 당면도 넣어 국물이 자작하게 만드니 산에서 먹는 별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큼한 오징어무침과 옛날 불고기로 모두가 “배 터지겠다!”며 포만감을 드러냈습니다. 제가 와인도 준비했고, 다른 동문이 큰 소주를 두 병이나 가져왔습니다. 우리를 황홀하게 해준 단풍 만큼이나 어느 때보다 유난히 풍족한 점심이었습니다.
에고. 먹는 얘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던 길을 다시 0.5마일쯤 돌아옵니다. 서쪽인 이 길의 전망도 뛰어납니다. 그렇게 돌아오면 왼쪽으로 아팔래치안 트레일이 나오는데, 그 길로 내려옵니다. 아팔래치안 트레일이 처음엔 계속 내리막이라 힘듭니다. 그러나 단풍의 하이라이트는 이곳이라 해도 될 만큼 기막힌 단풍 숲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길게 쭉쭉 뻗은 삼림이 단풍으로 물들어 햇빛이 그 사이로 애무하듯 머무른 풍경은 더할 수 없이 섹시하고 고혹적이기 때문입니다. 내려가는 길목 굽이굽이마다 길게 뻗은 나무가 빼곡한 단풍이 물든 숲의 풍경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닙니다. 그 경치가 너무 황홀해서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독일인들의 10월 축제에서 맛본 맥주 역시 입맛까지 현혹시켜주었습니다. 독일인의 10월 축제라 그런지 유난히 독일 맥주가 입 안을 싱그럽게 해주었습니다. 정말로 멋진 10월의 하루였습니다.
다음 주인 30일에 갔던 미네와스카 호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주중에 비가 내려 미네와스카 호수의 단풍이 모두 떨어져버렸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산길을 걷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습니다. 그래도 늦기 전에 웨스트 마운틴에 간 것만도 크나큰 행운이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비록 단풍은 오래 전에 떨어졌으나 그 찬란하던 단풍의 축제가 너무 아쉬워서 뒤늦게 라도 이렇게 단풍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