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롤(Carol)' 2015 최고의 영화? 빈티지 뉴욕, 레즈비언 로맨스
캐롤(Carol) 빈티지 뉴욕, 금지된 러브 스토리
토드 헤인즈 감독의 레즈비언 시네포엠 ★★★☆
뉴욕비평가협회 2015 최우수 영화, 골든글로브 작품/감독/주연여우(2)/작곡상 후보
오! '캐롤(Carol)'.
연기파 케이트 블랜쳇(Cate Blanchett)이 출연한 레즈비언 영화라서가 아니라,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루니 마라, Rooney Mara) 수상작이라서도 아니었다. 토드 헤인즈(Todd Haynes) 감독과 뉴욕비평가협회의 최우수 작품으로 꼽힌 것에 끌렸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배우 줄리안 무어와 함께 만든 영화 '천국으로부터 멀리(Far from Heaven, 2002)'의 50년대 빈티지풍 로맨스가 오래 여운이 남았다. 또한, 골든글로브상이나 아카데미상보다 더 신뢰를 하는 것이 뉴욕비평가협회상이기 때문이다.
뉴욕 비평가들이 대거 참가하는 링컨센터의 영화 전문지 '필름 코멘트(Film Comment)'는 최근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Right Now, Wrong Then)'를 2015 미국 내 개봉되지 않은 걸작 1위에 선정했다. 이 작품까지 뉴욕영화제에 무려 9번째 초대됐지만, 흥행이 어려워서 배급을 주저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홍상수는 홍상수. 뉴욕 영화 비평가들 홍상수를 참말로 사랑한다. 시카고, 보스턴, LA 비평가들도 취향이 다르다. 뉴욕 비평가들의 눈썰미와 가슴이 더 신뢰를 준다.
차가운 유리 럭셔리 콘도가 곳곳에 치솟고 있는 이 차가운 도시에서 1950년대 빈티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를 보러가기로 했다. '캐롤'은 뉴욕 세곳 극장에서 상영 중이었다.
플라자 호텔 앞,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옆의 파리 시어터(Paris Theater), 전에 '아티스트(Artist)'를 보고 있을 때 뒷 자리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그의 언니(쌍둥이?)와 큰 소리로 수다 떠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영화 끝난 후 째려보려고 뒤를 돌아보니, 이사벨라 로셀리니여서 경악을 했다.) '캐롤'은 주인공 두 여인이 백화점에서 만나는 이야기니까 안성맞춤 극장이었다. 스크린도 크고, 오벌 형의 극장도 분위기 있다. 그러나, 상영 시간이 맞지 않았다.
브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AM)의 로즈 시네마. 집에서 가깝고, BAM 회원이라 50% 할인($7)된다. 역시 '캐롤'을 보고 싶었던 날 나는 맨해튼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호 하우스턴 스트릿의 안젤리카 필름 센터(Angelika Film Center). 주로 인디,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아트하우스 복합상영관. 세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지라 시간 맞추기가 용이했다. 문제는 우리 집의 새 TV보다 4배 사이즈인듯한 작은 스크린과 지하철 소음이다. N,R,Q 라인 인근이라 종종 지하철이 덜커덕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관에 앉자마자 '파리 시어터로 갈 것'하고 후회를 했다. 작은 스크린과 지하철 소음이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캐롤은 '인형의 집'의 노라?
When a Woman Loves a Woman...
뉴저지에 사는 상류층 유부녀 캐롤(케이트 블랜쳇 분)은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다. 딸 린디의 양육권이 걸린 소송에서 캐롤의 약점은 옛날 친구와 잠시 동성애를 한 것. 남편은 이를 빌미로 린디의 양육권을 독점하려고 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캐롤은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임시 판매원 테레즈(루니 마라 분)를 만난다. (로버트 드 니로와 메릴 스트립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뉴욕의 리쫄리 서점에서 만나는 유부남녀의 금지된 사랑과는 다른 로맨스!)
인형을 파는 테레즈
어려서도 인형을 좋아한 적이 없다는 테레즈는 캐롤이 딸에게 줄 선물로 기차를 추천한다. 여기서 관객은 테레즈가 스테레오타입이 아님을 눈치 챈다. 게다가 그녀는 사진작가 지망생이었고, 캐롤을 뮤즈로 사진을 찍어 후에 뉴욕타임스에 취직한다. 캐롤은 일부러(?) 장갑을 두고 떠나고, 이를 계기로 엄마와 딸같은 나이 차를 둔 두 여자의 우정은 시작된다.
밀폐된 곳을 떠나서 델마와 루이스처럼...캐롤과 테레즈의 머나 먼 여행길. 토드 헤인즈의 갑갑한 프레임...No Way Out!
얼마 후 이혼 소송에 지친 캐롤은 테레즈와 멀리 여행을 떠난다. 링컨터널을 지나며 나누는 대화 "여기서 터널이 무너져 우리가 시신으로 발견되면 좋겠다"는 말... 어떤 액션보다 '금지된' 사랑이 절실하게 표현된다. 캐롤과 테레즈는 델마와 루이스처럼 길을 떠났다.
향수와 유혹
어느 모텔 방에서 향수를 바르다가 두 여인의 육체적인 욕망이 타오르며 우정을 넘어선 애정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날 밤 두 여인의 열정은 고스란히 녹음됐고(여기서 히치콕 스타일의 드라마가 끼어든다!), 캐롤은 딸을 찾기 위해 테레즈를 떠나는데...
2013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
*레즈비언 영화라고 피하지 마세요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
토드 헤인즈 감독의 레즈비언 로맨스 '캐롤'은 사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마도 2년 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압델라티프 케쉬셰 감독의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Blue Is the Warmest Color)'과 비교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랑은...'의 아델(아델 엑사초풀로스)과 엠마(레아 세이두)의 격정적인 사랑에 비하면, '캐롤' 케이트 블랜쳇과 테레즈(루나 마라)는 빈약하게 느껴졌다. 러닝타임이3시간에 육박한 '파랑...'이 대하소설이라면, 1시간 48분짜리 '캐롤'은 생략과 압축미의 시네포엠이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캐롤'에서 침묵과 클로즈업, 유리창과 빗물에 가려진 밀폐된 세계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전후의 사회 분위기, 금지된 사랑의 초조함을 의도했을 것이다. '캐롤'의 의상, 촬영, 음악의 빈티지 연출 스타일에 캐릭터들의 열정이 과감하게 생략 압축된듯 하다.
모성애와 이성애 사이에서... 브란쿠시 얼굴의 캐롤?
'캐롤'이 실망스러운 것은 캐롤과 테레즈의 캐릭터에 깊이가 없다는 점이다. 두 여인의 자석처럼 끌리는 열망과 욕정이나 당시 '금지된' 동성애에 대한 갈등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1차원적인 인물 해석이라고나 할까. 케이트 블랜쳇은 우디 알렌의 '블루 재스민'에서 보여준 활화산같은 연기 대신 빙산같은 얼굴 표정 속에 숨은 활화산의 용암같은 열정을 표현하는데 소화불량에 걸린듯하다. 빨간 립스틱이 아니었더라면.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의 캐롤?
'캐롤'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마치 성형수술을 잘못한 것 같은 케이트 블랜쳇의 굳은 얼굴 표정이다.(SK II 화장품으로 피부관리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지만...) 뉴욕타임스의 A.O. 스캇이 "(조각가) 브란쿠시같은 윤곽(Brancusi contours)"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내겐 케이트 블랜쳇이 에드워드 호퍼 회화에서 튀어나온 소외된 여인처럼 보인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클로즈업은 브란쿠시, 롱숏은 호퍼 오마쥬?
호퍼!
브란쿠시!
캐롤의 빙산같은 표정은 어쩌면, 전후 1950년대 초 관습적인 결혼생활의 무료함과 타성에 눌려 굳어진 표정, 미국판 '인형의 집' 노라일 수도 있겠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1950년대 뉴욕 거리와 뉴저지 저택, 두 여인의 로드트립을 재현하기 위해 신시내티, 와이오밍, 켄터키주로 갔다. 뉴욕이 아닌 곳에서 뉴욕의 50년대를 촬영하기 위해 현대물이 들지 않은 오래된 건물과 빈티지 자동차를 등장시켜야 했으니, 거리 장면에서 (저예산 인디영화이므로) 카메라는 패닝을 길게 하지 못하고, 닫혀있어서 갑갑하다. 그러나, 그 밀폐와 구속 때문에 금지된 사랑에 빠진 두 여인이 뉴욕을 탈출했을 것이다.
테레즈의 다른 눈
오드리 헵번과 오드리 타투의 청순함이 엿보이는 테레즈 역 루니 마라도 상류층 여인 캐롤에 대한 열정이 다소 미약하게 느껴진다.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의 두 배우(아델 엑사초풀로스와 레아 세이두)가 발산한 고열의 로맨스에 비한다면.
패트리야 하이스미스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의 원작은 프랑스 만화 '아델의 삶'이었고, '캐롤'의 원작은 미국의 스릴러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소설 '소금의 댓가(The Price of Salt)'. 알프레드 히치콕이 좋아했던 하이스미스는 '열차 위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과 알랭 들롱 주연 '태양은 외로워', 맷 데이먼 주연 '미스터 리플리'의 원작 소설인 '톰 리플리(Tom Ripley)'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1952년 가명(Claire Morgan)으로 출간했으나,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동성애 소설의 클래식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토리는 뉴욕에 살았던 하이스미스의 반 자전적인 이야기다.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태어난 하이스미스는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가 이혼했다. 엄마 따라 뉴욕으로 이주해 계부와 살았지만, 12살 때 엄마가 그녀를 텍사스 친가로 보내 할머니와 1년간 살게 해서 버림받았다는 피해의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동성애에도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A Stranger in a Motel
오 캐롤!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올겨울의 날씨 만큼이나 온화하다. 그러나,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알래스카같은 짜릿한 추위나 사하라 사막같은 뜨거운 로맨스가 아닐까? 아니면, 원작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의도했던 소금의 짠맛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벼랑에서 추락하는 엔딩이 아니라, 캐롤과 테레즈가 재회하면서 새로운 챕터로 도약하는 해피 엔딩이 훈훈하다. 스타일에 묻힌 레즈비언 로맨스, 아쉽지만, 사랑의 설레이는 감정과 빈티지 뉴욕(가짜일지라도)을 보는 즐거움은 있다. '캐롤'을 만나시려면, 꼭 파리 시어터로 가시라!
Carol@The Paris Theater(4 West 58th 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