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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스테파니 S. 리: 새해, 모든 이에게 평강을...
흔들리며 피는 꽃 (4) 모래 알갱이의 지혜
새해, 모든
이에게 평강을...
Stephanie S. Lee, Tribute to Sand I, 2013, Color & gold pigments,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3 ¼˝(H) x 20 ¼˝(W) x 2 ¾˝ (D) each 다시 새로운 한해, 올해도 어김없이 새 날은 왔다. 한때는 카운트다운 후 낯선 이와 뽀뽀하는 기분은 어떨까하는, 한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허황된 기대와 더불어 연말이면 어떻게 먹고 마시며 흥겹게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들썩들썩했었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신날 것도 딱히 없는, 해볼 것 다 해보고 구경할 것 다 해보되니 평강이라는 말, 그 이해할 수 없던 단어가 와닿는다. 올 한해의 마지막은 카운트다운도, 사람들속에 떠밀려 트리를 보는것도, 불필요한 장식과 의미없는 인사들도 다 생략하고 식구들과 동네에서 칼국수를 사먹고 들어와 일찍 잤다. 지난 몇년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 수발 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매년 ‘그래도 한해의 마지막 날인데’, ‘그래도 새 날 인데’, 하는 미련 속에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형식적인 일들을 해치우느라 늘 분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새해의 첫 날은 대게 쌓인 피로를 푸느라 산뜻하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맞이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지구는 내가 아니어도 착실히 잘도 돌아가고 있었는데 부여잡지 않아도 되는것들을 굳이 스스로 떠안고 너무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위해 그리 아둥바둥 힘들다며 징징거리고 살았는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앉아 두 손으로 백사장의 모래를 전부다 잡아보리라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용을 써본들 한사람의 인간이 경험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작은 것을... 어떤 이는 꽤나 큰 모래성을 짓기도 하지만 그 또한 파도와 시간에 쓸려 결국엔 넓은 해안가의 평화로운 풍경 속으로 동화되고 마는 것을... 시끌벅적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도, 겉도는 인간관계도, 이쁨받자 인정받자 하던 욕심들도... 많은 것들을 정리한 한해다. 법석 떨지않고, 소란스럽지도 않게 내가 붙잡았으나 결국 내 발목을 잡았던 모든 것들을 많이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가라앉은 수면이 더 맑고 새롭다. 새해, 여느 날과 다름없이 걷다가 보는 모든 것들이 평온함 속에 빛난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보낼 것은 보내고 수선스러움도 조바심도 없이 균형과 리듬을 유지하는 마음의 평정상태. 이 평온함 속, 새로운 재미를 느낀다. '모든 이에게 평강을…' 이제는 이 말에 진심을 담아 기도해 줄 수 있을것만 같다.
Stephanie S. Lee, Tribute to Sand II, 2013, Color & gold pigments,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3 ¼˝ (H) x 20 ¼˝ (W) x 2 ¾˝ (D) each 모래예찬 한때 나도 저 높은 곳 위풍당당히 선 바위가 되고자 했다. 내 발을 감싸는 부드러운 모래따위 하찮게 밟고 서서 해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실눈으로 위만, 위로만 쳐다보았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모두가 올려다보는 그런 바위여야 하는줄만 알았다. 그땐 그랬다. 허나 꼬박꼬박 지독스레 밀려오는 일상이란 파도에 나라는 돌멩이는 부서지고 부서져 흔적없이 흘러내렸다. 세찬 바람과 거대한 파도를 견디고 높은 곳으로 우뚝 솟아오르기는 커녕 떨어지는 물보라조차 견디지 못한채 바스라져 가루가 되었다. 산산히 부서져 바닥에 가라앉고 나니 모래가 보인다. 파도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잔잔한 물결이 실어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햇살이 비춰주는 어느 날엔 행복으로 반짝이기도, 때로는 밀려오는 바닷물에 흠뻑 젖기도 하며 이 작은 모래 알갱이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안다. 고집부리지 않고 쪼개고 나누어져 존재할 줄 아는 지혜가 사랑스럽다. 이제 나는 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발을 담궈 모래 알갱이처럼 작은 일상들을, 그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만히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