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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이영주: 세비야(Seville)로의 여정
뉴욕 촌뜨기의 일기 (33) 스페인 세비아 여행기-1
글: 이영주/사진: 이명선
골목길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Photo: Melissa Lee
스페인 세비야에 왔습니다. 작년에 딸과 함께 이곳을 다녀온 멜리사가 그 옆 동네가 좋더라며 언제고 우리끼리 가자고 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웬만큼 세계여행을 했던 제겐 여행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유럽 어느 도시에 가서 집을 얻어 놓고, 맘에 맞는 친구 몇이서 거기 머물면서 여유롭게 인근 지방들을 다니는 낭만 여행말입니다. 그 꿈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 몰랐습니다.
뉴욕에선 멜리사와 에밀리, 저 세 사람인데, L.A.에서 순화씨가 뉴욕으로 날아와서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J.F.K. 공항 마드리드 행 비행기 게이트에서 만나면 됩니다. 서울서부터 오는 종옥씬 세비야로 직접 온다고 합니다. 새벽에 집에서 떠나 일찌감치 J.F.K. 공항에 도착한 순화씨는 우리가 공항에 없으니 수없이 카톡으로 언제 오냐며 불안해 했고, 종옥씬 비행기 바꿔 탈 때마다 시시각각 상황을 알려 왔습니다.
몸매가 날렵하고, 운동선수처럼 걸음걸이가 경쾌한 순화씨는 제겐 초면입니다. 멜리사 딸 하이디의 절친의 엄마라는데, 인연이 겹칩니다. 에밀리 사촌언니인 종옥씨와 절친이란 겁니다. 그래서 호리카 클럽의 우리 세 사람과 끈이 다은 다른 두 명의 여성, 총 다섯 명의 여인들이 여행하게 된 것입니다.
저녁 7시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처음엔 공항이 복잡해서 늦어진다고 하더니 한 시간쯤 지나자 물탱크에 문제가 생겨서 교체해야 한다고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새로 물탱크를 준비할 수 없어서 다른 비행기의 물탱크와 바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 물탱크를 비워서 청소하고 우리 비행기 물탱크와 교체한 후 다시 물을 채워야 하니 그게 시간이 하염없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10시쯤 되자 게이트 라운지에 샌드위치와 간단 스낵과 음료수를 준비했으니 먹으라는 방송을 했습니다.
3일전에 직접 차를 운전하고 후로리다에서 뉴저지로 올라온 멜리사는 올라오자마자 밀린 사무실 일을 보느라고 정신없이 뛰어 다니느라고 비행기 타기 전부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감기 몸살 약을 먹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습니다. 에밀리가 잠자는 멜리사 저녁과 물을 챙겼습니다. 셋이서 비행기 좌석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마침 제가 구워간 군고구마가 제법 기운을 돋궈 주었습니다. 깎아서 가져온 사과 두 쪽과 배 두 쪽도 여간 상큼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떠나기 전날 흥분해서 그런지 잠을 못 자서 피곤해 식사를 마친 후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컴퓨터 도사인 에밀리가 비행기 뒷자석이 빈 사실을 알아내곤 우리 좌석을 한 사람에 한 줄씩 해준 덕분에 모두들 좌석 3개짜리 의자에 혼자 길게 누울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일반석 좌석에 혼자 큰 대자로 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비행기의 연발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Photo: Melissa Lee
문제는 비행기 연발로 인해 오후 2시 세비야 가는 기차를 놓친 일입니다. 원래는 두 시간 반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넉넉하다 싶었는데, 비행기가 3시간 이상을 지체하는 바람에 오후 1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것입니다. 택시로 기차역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기차 시간표를 바꿔달라고 하니 비행기 연착은 자기네 문제가 아니므로 교체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기차가 2시 인데, 그 기차는 이미 매진됐고, 그나마 탈 수 있는 기차는 4시인데, 새로 표를 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가격이 더 비쌌지만, 그렇다고 세비야에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4시 것으로 비싸게 표를 구입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그나마 시간 있으니 점심이나 먹자며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우린 이미 점심을 다 먹었는데도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며 멜리사는 와이파이 가능한데 가서 연락하느라고 점심도 못 먹고 한참을 자리를 옮겨가며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멜리사는 비행기에서 약 먹고 혼미한 중에도 10시 넘어서야 비로소 비행기가 뜬다는 방송을 듣자 연락두절 될까봐 놀라서 딸에게 비행기가 연발했다고 간신히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뉴욕의 이 지혜로운 하이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미 우리 기차표를 4시로 바꿔 놓았지만,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되니 비행장에서 확인을 못해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기차역에서 점심도 못먹고 여기저기 다니며 연락이 닿은 끝에 우리 표가 4시 기차로 바뀐 것을 확인했고, 새로 산 티켓은 다행히 환불 받았습니다. 떠날 때부터 얼굴이 피곤해 있던 점백씨는 몇 시간의 또다른 긴급상황으로 인해 식은 땀을 흘리며 만사를 해결했습니다. 반짝이는 순발력과 컴퓨터 도사라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Photo: Melissa Lee
5인방은 세비야 행 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초원과 올리브 밭을 지나며 무사히 세비야에 안착했습니다. 모두 피곤해서 햇반이나 먹자며 짐을 풀었습니다. 형평상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밝힐 수 없어 다섯 여인들의 짐에서 나온 일용할 양식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간장, 참기름, 피쉬 소스, 깨소금, 설탕, 소금, 고춧가루, 식용유, 후추 등의 양념은 10센티 높이의 예쁜 병에 담아 왔습니다. 그리고 미역과 김, 커피, 커피포트, 우엉차, 북어, 부침가루, 카레, 오트밀, 아몬드 파우더, 국물 낼 멸치 두 봉지(멸치+다시마+표고버섯+마른 새우+말린 홍합), 맛짬뽕, 볶을 중간 멸치, 비후 절키, 핫쵸코 믹스, 깻잎장아찌, 큰 용기에 꾹꾹 눌러 담아온 멸치볶음, 오징어볶음, 마른새우 볶음, 볶음 고추장. 그리고 햇반과 누릉지, 모밀국수, 된장과 고추장, 낙지젓, 김치, 진짬뽕, 거기에 일회용 장갑과 고무장갑, 행주로 쓸 스폰지까지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비얀지 어느 집 부엌인지 헷갈립니다. 서로 짐을 꺼내면서 우하핫!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탄치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을 경험 많고, 동작 빠르고, 배려심 깊은 멜리사 덕에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속해 있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라 좋습니다. 세상을 다니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근시안적이었는지 깨닫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가치관과 철학이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고나 할까. 사유의 세계가 신천지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고 할까. 책의 다음 페이지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가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만병통치 약으로 치료받은 것처럼 새로운 자기로 충전돼 오는 게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여행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곳 세비야에서 많은 날들을 머물면서 서로 다른 다섯 여인이 변주해낼 새로운 변주곡이 기대됩니다.
* 여정에서는 찍은 사진이 없어서 우선 세비야의 골목길들을 소개합니다. 골목길 문화라고 할만큼 세비야는 좁고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엉켜 있습니다. 그 골목길의 정다운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이명선 Melissa Lee/freelancer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대학원 미술교육학 전공, 사진 부전공. 항상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과 사진을 찍으면서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