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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키신, 클라이브 질린슨 카네기홀 관장과의 대화
An Interview with Evgeny Kissin
 
"야망은 없다,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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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천재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 2018년까지 미국과 아시아 콘서트를 중단한다.
 
키신은 지난해 10월 7일 뉴욕필하모닉과 카네기홀 2015-16 시즌 오프닝 콘서트를 장식하고, 11월 3일과 6일 솔로 리사이틀을 열었다. 한 솔로이스트가 1주에 2회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갖는 것은 1979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이후 키신이 처음이다.
 
키신의 매니저 린다 페트리코바는 최근 키신이 2018년까지 미국과 아시아 콘서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유럽 연주만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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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카네기홀에서 메트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예브게니 키신이 휠체어에 의지한 제임스 리바인에게 박수를 치고 있다.
Photo: Sukie Park
 
이는 매년 카네기홀 연주회를 가졌던 키신을 2018년까지 볼 수 없게 된다는 의미. 
 
키신은 5월 19일 카네기홀에서 제임스 리바인이 이끄는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게 뉴욕팬들과 잠정적인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 제임스 리바인은 5월 초 끝난 메트오페라 2015-16 시즌이 '예술감독'으로서 마지막 지휘가 되었다. 키신과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 리바인은 같은 유대인으로 종종 협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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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6일 카네기홀 리사이틀 커튼콜에서 키신. 2018년까지 미국과 아시아에서 키신의 콘서트를 볼 수 없다.
 
 
예브게니 키신은 1990년 카네기홀 설립 100주년이 되던 해에 카네기홀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25년 후 키신은 카네기홀의 125주년을 맞아 'Perspectives artist' 시리즈로 돌아왔다. 이를 앞두고 클라이브 질린슨(Clive Gillinson) 카네기홀 관장 및 예술감독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카네기홀 웹사이트의 블로그에 올랐으며, 이들은 지난해 12월 16일 잰켈홀에서 카네기홀 멤버를 대상으로 다시 공개 대담을 했다.
 
 
An Interview with Evgeny Kissin
 
Translated by Sukie Park/ NYCultureB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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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잰켈홀에서 클라이브 질린슨 카네기홀 관장과 대담 중인 키신. Photo: Sukie Park
 
 
클라이브 질린슨: 당신이 센터가 되는 올 시즌은 우리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정말 놀랍고도 특별한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카네기홀의 100주년 시즌, 여기 리사이틀 데뷔를 했지요. 그 데뷔 콘서트에 대해 말해주세요.
 
예브게니 키신: 제가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무척 초조했지요. 그래서 1부에서는 여러번 실수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미션 후 2부에선 우리가 러시아어로 말하듯이 '피아노를 제 자신의 손으로 가져갈 수 있었지요. 운이 좋게도 청중이 잘 받아들여주었어요. 리뷰 중 하나에서 비평가가 몇개의 실수는 키신이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했는데, 무척 친절한 비평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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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에버리피셔홀에서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한 키신. Photo: Sukie Park
 
 
클라이브 질린슨: 호로비츠 이후 처음으로 카네기홀에서 1주에 2차례 리사이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헌사인데요. 당신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이전의 리사이틀에서도 무대에서 당신 옆에 앉았습니다.
 
예브게니 키신 제가 처음 솔로 리사이틀을 한 것은 고작 11살 때였어요. 제 고향 모스크바의 600석 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곳에서 열렸습니다. 티켓은 무료여서 무대에 많은 의자를 올렸지요. 사실 무대는 의자로 꽉 찼습니다. 콘서트가 끝난 후 제 선생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있는 것이 방해되지 않느냐고 물으셨어요. 전 바로 제 느낌을 말씀 드렸지요. "아니요! 그들은 저를 도와주는 걸요" 전 시작부터 무대에 청중이 있는 걸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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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은 무대 위 청중이 연주를 도와준다고 말했다. 11월 6일 카네기홀에서.  Photo: Sukie Park
 
 
클라이브 질린슨: 또한, 시리즈의 하나로 유대어 시와 유대인 작곡가들의 프로그램(Jewish Music & Poetry)이 마련됐습니다. 당신은 유대어를 쓰며 자랐나요? 아니면, 최근에 배우게 되었나요?
 
예브게니 키신 전 유대어를 배우면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많이 들었지요. 제는 종종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시골집에서 여름철을 보냈고, 그때 외조부모님들이 유대어를 많이 쓰셨지요. 그후 제가 나이들면서 유대어를 진짜 배우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클라이브 질린슨: 덜 알려진 유대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서는요?
 
예브게니 키신 오래 전 훌륭한 블로크 소나타(Bloch Sonata) 음반을 들었습니다. 지난해엔 워싱턴 DC에서 찰스 크라우태머와 부인 로빈이 기획한 'Pro Musica Hebraica' 시리즈에 참가한 후 이 부부가 유대인 음악 악보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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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뉴욕필과의 협연에서 청중의 환호 후 앙코르 연주를 시작하려는 키신. Photo: Sukie Park 
 
클라이브 질린슨: 전에 당신이 그랬지요. 그날 저녁 자신의 생애 최고의 리뷰를 받았을 것이라구요. 유대어로는 당신이 유대어를 부활시키는 것이 유대인 유산과 연관되어 있기데 중요한가요?
 
예브게니 키신 물론입니다. 모든 언어는 보물이지요. 모든 국가의 유산은 보물이구요. 유대어는 무척 풍부하며, 표현적인 언어입니다. 훌륭한 문학이 있고, 여전히 창작되고 있지요. 그래서 맞습니다. 저는 유대어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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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의 키신(1984)
 
 
클라이브 질린슨: 당신이 아주 어렸을 때 존경했던 , 아마도 당신이 닮고 싶어했던 피아니스트가 있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음악에 더 집중했나요?
 
예브게니 키신 전 그다지 야망이 없었기 때문에,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무척 게을러져서 제 피아노 선생님이 말씀하셨지요. "만일 네가 연습을 그렇게 못한다면, 그들은 너에게 피아노 연주를 절대 허락하지 않을꺼야. 그리고, 드럼을 치게 할꺼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전 대답했어요. "제가 드럼을 못친다면,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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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의 키신(1986)
 
클라이브 질린슨: 당신에게 야망이 없었다는 말이 놀랍네요. 그럼 무엇이 당신을 이끌었나요?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왔나요? 어떻게 당신이 피아노를 치길 원한다는 걸 진짜 알게 됐나요?
 
예브게니 키신 제 삶에서 그렇게 의식적으로 결정한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를 위해 결정된 것이지요. 하지만, 누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면, 음악을 사랑하지 않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클라이브 질린슨: 만일 야망이 없었다면, 음악에 대한 사랑이 당신을 이끌었나요?
 
예브게니 키신 맞습니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였습니다. 저는 피아노 레슨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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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의 키신(1987)
 
 
클라이브 질린슨: 그리고, 누가 당신을 떠미는 사람이 있었나요? 아니면, 모두 당신 내부에서 왔나요?
 
예브게니 키신 연습하라고 떠민다구요? 맞습니다. 비록 음악공부를 하던 초기 시절 저에겐 무척 쉬운일이라 다그침 없이 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저를 다그쳐야 했습니다. 제가 나이 들면서, 물론 바뀌었지만요. 그리곤 제가 연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연습을 무척 많이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제가 연주를 잘하기 원하는 것은 제가 야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입니다.
 
클라이브 질린슨: 음악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당신은 다른 열망이 있나요? 당신 삶에서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나요?
 
예브게니 키신 매우 종종 인생은 자체의 놀라움을 가져오지요. 예슬 들어, 단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유대어로 산문을 쓰고, 출간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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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이 질린슨 관장과 인터뷰 후 객석에서 질문을 받고 있다. Photo: Sukie Park 
 
클라이브 질린슨: 카네기홀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일이 있나요?
 
예브게니 키신 제 데뷔 연주회가 가장 기억할만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여기서 거의 매 시즌 연주해왔지요. 그래서 수많은 콘서트 중 하나를 집어내긴 어렵습니다. 내일,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매 콘서트에서 연주 중엔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클라이브 질린슨: 네, 그 콘서트들이 우리 모두의 평생에서 굉장히 위대한 음악적 체험입니다.
 
 
예브게니 키신(Evgeny Ki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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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10일 모스크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음악교사. 두 살 때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해 여섯살 때 영재학교인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안나 파블로나 칸토를 만나 평생 사사하게 된다. 

 

10살 때 율리아노프스크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 K477으로 데뷔한 후 이듬해 첫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84년 3월, 모스크바콘서바토리의 그레이트홀에서 모스크바스테이트필하모닉과 쇼팽의 피아노 콘체르토 1&2를 연주하면서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에 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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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필하모닉과 쇼팽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협연하면서 미국 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일주일 후 카네기홀의 100주년 시즌에 초대되어 데뷔 리사이틀을 열었다. 1997년엔 아티스트로서는 러시아 정부 최고의 명예인 ‘트라이엄프상’ 받은 최연소자가 됐다.

 

2001년 맨해튼음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엔 러시아 최고의 음악상인 ‘쇼스타코비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5년 허버트폰카라얀 음악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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