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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스테파니 S. 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거운 나라
흔들리며 피는 꽃 (18) '빨리빨리' 한국 리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거운 나라
Affluence I II, 2016, Stephanie S. Lee, Color & gold pigment, ink on Hanji
다시 일상에 놓인다.
산책을 하고, 장을 보고, 아이 도시락을 싸고, 말라버린 화분에 미안해하며 물을 준다. 밀려있던 이런저런 잡다한 집안일들을 하느라 시차적응도 뒤로한채 몸을 바삐 움직이지만 익숙한 환경이 주는 편안함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이 이제는 이역만리 미국이 되어버린 것 같아 묘한 기분이지만 어디가 되었든 되돌아 올 곳이 있다는건 좋은 일이다. 여행이란 결국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아닐까.
5년 사이 다시 본 한국은 여전한 것 같기도,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여름 날씨가 예전과 달리 훨씬 후덥지근 해져서 견디기 힘들었고 도시와 건물들이 많이 변해 낯설었지만, 다행히 정겨운 골목길들이 아직 남아있었고 가족들과 친구들은 고맙게도 여전했다.
안되는게 없고 못하는게 없는 ‘빨리 빨리’의 나라 한국. 그곳에선 모두가 바빴다. 모두가 열심인 것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고, 그 기운에 나 역시 덩달아 뛰어다니느라 짦은 시간동안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편리하고 빠른 한국의 인력 시스템 덕분에 누린 엄청난 혜택이 나에겐 어쩐지 좀 짠 했다.
이곳 사람들은 비록 흉내뿐인 여유일지언정 적어도 겉으로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내가 본 한국사람들은 그런 척 할 틈도 없이 늘 분주해보였다. 아마도 그것이 한국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편치는 않았다.
“이만하면 됐어요. 쉬엄쉬엄 하세요. 몸상해요” 를 하루에도 몇번씩 말해야 했다.
아, 그리고 한국의 여름이 이렇게 더운줄 미처 몰랐다. 잔디깔린 바닥이나 나무 그늘 찾기 힘든 거리에서 햇볕을 그대로 받고 걷자니 사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산세가 참으로 아름다운 금수강산인데 도시에는 인공물이 자연물에 비해 지나치게 많았다. 새로 만들어놓은 그 모든 삐까번쩍한 것들이 열을 고스란히 반사해 토해내는 것 만 같았다.
이 뜨거운 곳에서 극단의 것들이 복작대며 살아가고 있는 풍경. 번듯한 백화점과 후즐근한 맛집, 비데와 구변기… 적응하기 힘들정도의 양극단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버무려진 곳에서 사람들은 더위도 잊은듯 각자의 동선대로 바삐 살아가고 있었다.
Affluence III IV, 2016, Stephanie S. Lee, Color & gold pigment, ink on Hanji
그래도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도시 안에는 아름다운 고궁이 자리하고 있었고, 정겨운 골목길들이 남아있었다. 쉴틈없이 돌아가는 이 모든 것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진심을 찾아내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 샘물같은 사람들의 정에, 배려에, 사랑에 과분했던 시간들이었다.
새로운 좋은 인연들에 고마웠고, 한결같은 오랜 인연들에 감동했던 고국에서의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 이곳의 일상속에 녹아 앞으로의 날들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 잘 살았구나’, ‘여전히 그대로구나’ 하며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나도 어색함 없이 반가워할 수 있기를… 십년 후에도, 이십년 후에도 서로의 삶을 함께 봐 주는 든든한 증인으로 건강하게 남아있어 주기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거운 나라 한국. 그러나 휘영청 뜬 보름달을 쳐다보면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김없이 차오른다. 멀리서 바라보는 한국은 나에게 언제나 달처럼 푸근하고, 애잔하고, 짠하다. 이렇게 멀리서 아련하게 쳐다보며 반쯤은 향수로, 반쯤은 추억으로 채워 놓고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돌아올 곳이,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데 참 든든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