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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김희자: 붉은 책과 더불어 지낸 불타던 여름
바람의 메시지 (12)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
붉은 책과 더불어 지낸 불타던 여름
Wheiza Kim, 불타던 여름날/Flaming summer, 28"x28" x1.5", 1997, Acrylic on wood panel with mirror
지난 7월 중순부터 유난스런 더위로 무었에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전시와 여행으로 지쳤으니, 여름 작업을 쉬고 방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좋아하는 책읽기로 지글대는 여름 날을 피해볼까 생각하며, 서재에 책들을 둘러 보다가 구석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책에 눈이 멈췄다. 먼지가 쌓였음에도 비닐 코팅이 마치 립글로스를 덧칠한 여자의 앵두색 루즈처럼 빨간 겉표지에 금색 큰글자로 ‘RED BOOK’이라고 씌여진 책. 그 어마하게 크고 무거운 책을 볼 때마다 묘한 위압감을 느껴 왔다. 여전히 읽기엔 역부족일 C. G. JUNG (칼 구스타프 융)의 책을 노려보다가 아마도 이번에 ‘마지막이다’하고 도전을 하지 못하면 아마 평생 못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의 자존감에 앵커를 걸었다.
십여년전 심리학에 대한 흥미로 친구를 따라 다니며 맨해튼의 융겐스 인스티튜우드에서 청강한 적이 있었다. 거기 교수들과 내 작품을 놓고 테라피도 받으며 매우 자존심이 고양됐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지금은 박사를 끝내고서 정식으로 싸이코 테라피스트가된 러시안 친구를 만나러 그곳엘 갔을때 그녀가 그해 나왔다는 융의 새 책을 열어보이며, 칼 융의 사후 48년이 지나서 세상에 발표된 그의 영혼의 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책 속에는 화가일리도 없는 심리학자가 그렸다는 꿈에 대한 기록화라는 그림들이 매우 특별하고 강한 신화적인 상징과 만다라의 도식들과 이상스러운 샤마니즘에나 나오는 도형들이 나를 사로 잡았었다. 책 한권에 거금 2백여불임인데도 망설임 없이 끌어 않았을 만큼 마력적이였다.
‘그리기’라는 행위는 무의식이라는 심연에서 퍼올려지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표현하고 싶어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성정의 화가도 더러 있다. 가끔 ‘화가가 되지 못했다면, 무당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웃지못할 고백을 하는 작가들의 얘길 들어보면, 무당의 혼에 귀신이 강림하듯이, 절로 솟아나는 어떤 영감이 떠오르며 그림을 굿을 하듯 그리며 엑스타시에 빠져서 신들리게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망상의 접신이 없어 멀쩡한 정신이 되면, 억지 가짜행위를 자신에게 유도하며 자기 합리화로 자신을 위장하고 괴로워하는걸 더러 보았다. 나는 융의 꿈이라고 하는 비현실, 즉 잠재의식으로부터 건져지는 그의 난해한 이미지들도 동일한 맥락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생각으로 들여다 보았었다.
그러나, 융은 너무나 명확하고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통찰하고 실험같은 통찰의 기록을 그려낸 것이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는 가장 참다운 존재적 세계이며, 의식의 세계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가상적 현실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다.” 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나비의 꿈을 다시 기억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허상의 세계라는 맥락에서는 동일하지만, 장자의 도교정신 세계와 동일하지는 않다.
Wheiza Kim, 도학자의 하루/A Taoist, 12"x22"x 1.5", 2002, Acrylic on wood panel with mirror
융은 흰두교의 오직 정신만이 영원하고, 물질 세계는 환영에 불과한 착각의 세계라고 하는 마야를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죽기 4년전 이책에 대해 “모든 것을 담은 신령스러운 시작”이라는 언급을 미루어보면, 어쩌면 그는 사후에 몸은 버리고, 새로운 영혼을 찾아 여행을 떠났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40대에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탐구하느라 열심히 읽던 철학, 심리학자 중 매우 흠모하던 한 사람인 그가 살아서는 남에게 말할수 없었던, 비밀을 그림으로 그려보인 책을 안고 묘한 행복감에 젖어서 두꺼운 책장을 열고 찬찬히 살펴 보았을 때의 첫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대체 그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글들이 영어는 분명 아닌, 라틴어인지 독일어 인지도, 마치 한문의 전서체가 주는 느낌처럼 알 수 없는 신비와 화려함으로 황홀했었고, 단아한 글과 함께 초월적이고 상징적인 그림들이 형용할 수 없는 비밀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그 신비와 상징의 의미들을 읽으려 해보았지만, 내 실력으로는 역부족이라 수년을 방치한 채, 가끔 심심풀이로 매우 흥미를 끄는 그림들의 제목과 해설들만 더듬으며 읽어보았을 뿐인,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의미의 책이다.
나는 자칫하면 냉방 감기가 걸리는 체질이라 선풍기로 여름을 버티는데, 이 참혹한 더위에 그 책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저 붉은 책의 불꽃같은 열정이 있지 아니하고서야 이 더운날 어찌 엄두를 내려하는거냐고,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을 중얼거리며, 중도에 하차하게 될지라도 각오해보자 하고, 습하긴 해도 서늘한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지하가 깊은 무의식을 탐구하긴 어둡고 좋은 곳이야”라고 내게 농을 걸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전없기는 옛날보다 더했다. 오래 되어 다 잊은 그의 이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인터넷 써치를 하다가 바로 그 책이 한글로 번역이 되어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나 기가 막히게 편리하고, 좋은 세상인가. 감사함이 저절로 솟지 않을수 없엇다.
그러나, 아뿔사, 컴퓨터가 있는 2층은 선풍기를 돌려도 사우나 속에 앉은듯 했다. 한국의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책을 정리하고 연구한 글들이 꽤나 많이 있어서, 내가 알지못하는 심리학 용어와 개념들, 역사적 배경모든 문제가 용이하게 풀리고, 융의 프로이드와 함께하던 시절 얘기인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A Dangerous Method, 2011)’도 즐기며, 배운다는 지적 허영심을 만끽하느라 거의 두달을 지하와 이층을 오르내리며, 환희심에 빠져 그만 더위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프로이드(비고 모르텐센 분)와 융(마이클 파스벤더 분)의 관계를 그린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데인저러스 메소드(A Dangerous Method, 2011)'.
나는 프로이드의 억제된 성이론을 매우 혐오했다. 모든 정신적 문제를 억압된 성에서 비롯된다는 일반론으로 만들어 어떠한 심리적 이상치료 에도 섹스와 연관지어 어거지로 적용하는데 비해, 융은 개인 마다의 삶의 역사가 다르기에, 반드시 성적 억압의 문제만도 아니며, 잠재의식에서 만드는 꿈의 상징성조차도 개인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였다. 이번에 책을 읽고나니, 결국은 그 다른 견해가 두학자가 완전히 갈라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리고 융은 불가해한 인간의 마음이 지어내는 온갓 망상과 환상들에 대해 마치 샤만으로라도 취급받게 될까 두려워하며, 꿈 속을 헤매며 본것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쓰며, 홀로 비밀스러운 제의처럼 기록해간 대학자의 고민을 나는 너무나 생생하게 상상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꿈과 신령스런 직관 속을 탐험하며, 세상의 모든 종교적인 리츄얼이나 신비주의적인 면을 써치하며 인간들이 꿈으로, 무의식으로, 행동하는 개인적 집단적 욕망의 행위가 자기자신의 잠재의식에도 숨어있는 동일한 원형임을 색출해 내었다. 아키타입(archetype)이라는 용어가 시작 되게 된 거라 생각된다. 그 기록은 종교, 문화, 무의식, 전통과 역사를 통해 성장되어지는 모든 인간 본질적 원형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냄으로 해서 우리들을 얽매고 있는 생각 감정의 감옥으로부터 인간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융은 제1 인격의 40살경까지의 외적이고 페르소나적인 삶으로, 어떠한 목적을 위한 분석과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살다가 그 후로는 제 2인격으로의 직관에 의지하여 내면의 영적 삶을 산다고 말한다. 그가 명성과 현실성을 부정할 수 없어 프로이드와 동행했던 삶에 대한 후회와 성찰, 그와 결별 후의 자유로운 영적인 내면의 삶에 대해서 마음에 숨겼던 이야기들을 그렇게 정리하고 있다.
Wheiza Kim, 자기성찰/self-examination, 12"x23"x 1.5", 1997, Acrylic on wood panel with mirror
융은 자신의 직관에 의지한 삶의 신비로움과 불가사의함에 침묵할수 밖에 없더라는 고백하고 있다. 그의 심리학의 기원이된 원초적인 에너지로 넘쳐서, 마치 미궁을 여행하는 것같은 과정을 숨김없이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융은 84세까지 너무도 맑은 정신으로 직관적 마음의 발현에 대해 인간이 신에게 의존하고 있을뿐 아니라, 신도 인간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성인이 되어감을 느끼고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온전하고 완성되어 진다는 것은 자아 안에 ‘진정한 인간성’과 ‘부분적 신성’이 있는 자신을 ‘낳기’, 혹은 ‘자각하기’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는 많은 신화적인 원형을 깊이 이해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흰두교적 윤회사상과 불교의 심리학 격인, 인식철학에서의 아뢰야식을 그의 사유의 근원지로 삼아 발아 시키고 있음을 알수있다. 그가 말하는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 되기위해 ‘자각하기, 낳기’의 개념은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라고 표현할때의 각성 상태와 동일하다. 즉 명상중 머리 속에 직감으로 와닿는 ‘자기자신이 바로,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아는 것, 그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나는 배웠다.
동양 심층 심리학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불리우는 인간의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불가해한 무의식 탐험을 하며, 시각화의 어려움 속에서 만난 무의식인 꿈에 대한 그의 탐험 기록은 더욱 나를 고무시켜 주었다. 그림이란 것이 보는 것뿐이 아니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한 면을 더욱 확신시켜주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마치 한그루 나무처럼, 땅 속으로 뻣은 보이지않는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채며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으리란 진리를 재확인 했다. 아직도 해설부의 반을 넘기지 못한 버겨운 책을 일단은 중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니, 미루어 놓은 많은 일들이 나를 노려본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 그의 무의식의 색과 형태에대해서 내나름의 견해를 세워서 정리할 시간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불같이 뜨거운 한여름 속 푸르디 푸른 무의식의 심해를 탐험하며 건져낸 대학자의 비밀스런 붉은 보석상자를 닫으며,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이 오랜만에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소중하게 접어 넣는다. 벌써 9월로 접어든지 몇날이 지났구나 생각하며 새벽 창을 여니, 이제 막 도착한듯한 가을 바람결이 맨살 어깨 위로 싸늘하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