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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스테파니 S. 리: 이중섭, 그의 정직한 그림
흔들리며 피는 꽃 (19) 인간성과 예술성
이중섭, 그의 정직한 그림
"그는 기본적으로 듣는 사람의 존재 기반을 뿌리째 뒤흔드는 '치명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중략)
캐논볼이란 사람은 마지막 까지 광기어린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는 자연인으로 이땅에 태어나, 그리고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느긋하게 사라져갔다. 반성이나 성찰, 배신과 해채와 자기 은폐와 잠 못 이루는 밤은, 이 사람의 음악이 내세우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필경 그 때문에, 그 아폴론적으로 광대한 슬픔이 때로, 다른 어떤 누구도 할 수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린다. 부드럽게 용서하고, 그리고 소리없이 감동시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중-
두 아이, 이중섭, 1950년대, 은지에 새겨서 유채
위대한 작품들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한가지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열정과 정신을 존경한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거침없이 붓질을하는 작가들의 천부적인 재능 역시 동경한다. 그러나 내겐 천재적 재능도, 세속의 것들을 포기하고 세상에 정면 도전할 용기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은, 예술이라는 바다를 표류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며 파도를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내공있는 예술가들의 태도를 선망한다.
날 선 감성, 날카롭고, 뾰족하고 극단에 가 있는 것들이 주는 아슬아슬하지만 완벽한, 누구나 감탄하고 동의할 수 밖에없는 매력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나 역시 감탄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위대함이 왠지 위태롭다. 그래서 비록 치명적 매력이나 세련된 감각은 덜 할 지언정, 모서리 없이 둥글둥글한, 성실함이 느껴지는 작품이 좋다. 천재적이지 못할바에야 정직하고 성실하기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겠는가.
작가의 삶과 작품은 별개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유명한 작가가 되려면 삶이 드라마틱 하고 어느정도 고통스러워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해야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글쎄... 나는 한사람의 삶 속에는 그가 하는 일도 포함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라 작가와 작업이 분리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사회와 담쌓은 생을 살았거나, 부인이나 애인을 바꿔가며 상대방의 희생을 통해 성장한, 혹은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인색했던 예술인의 삶과 그것을 통해 나온 작업은 싫다.
물고기와 동자, 이중섭, 1952, 종이에 콘테
물론 심각하고 진지한, 삶에 대한 처절한 고뇌와 성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두운 작품들을 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생의 저 밑바닥, 심연의 어둠조차 일상의 삶 속에서 경쾌하고 명랑하게 끌어안아 산뜻하게 단순화시킨 그림들에 조금 더 높은 가치를 두고싶다. 날것으로 내 놓지 않고 주어진 재료를 최선을 다해 먹을만한 것으로 요리하려하는 정성을 응원해 주고싶다.
한국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찮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의 전시 '백년의 신화'를 관람하면서 그러한 내공을 통해 나오는 감동을 받았다. 그가 그린 단순 명료한, 자그마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애잔했다. 한국처럼 짠했다.개인적으로, 유명하다는 황소 그림보다는 간결한 선의 은지화에서 더 깊은 감동과 단단한 힘을 느꼈다.
Photo: Stephanie S. Lee
이중섭은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같이 말한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요즘같은 결과 중심의 사회 속에 살며 ‘정직’이라는 케케묵은 단어에 다시금 집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만,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인성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편중된, 특별한 순간에 집중된 삶이 아닌, 일상속 어느 순간에서나 올바르고 당당하게. 남의 것 배끼지 않고, 질투와 욕망에 눈멀어 비루하게 여기저기 아첨하지 말고 그림으로 정정당당하게. 어떠한 처지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보려 노력하는 삶. 가족과 주변인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천재가 아닌 우리 모두가 더 가치를 두어야 할 삶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삶 속에서 나온 작업이어야 감동을 정직하게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