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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in New York)
망명화가의 악몽과 고통이 사무친 캔버스

October 19, 2016–February 20, 2017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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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Self-Portrait in Blue Jacket,1950  베크만은 1950년 12월 이 작품이 걸린 메트뮤지엄 전시를 보러가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66세의 베크만 최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1950년 크리스마스 즈음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은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아파트를 나섰다. 센트럴파크를 횡단해서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걸린 자신의 청색 재킷을 입은 자화상(Self-Portrait in Blue Jacket ,1950)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의 미국 회화(American Painting Today)'를 타이틀로 열린 그룹전에 이 자화상이 전시 중이었다. 그런데, 베크만은 자신의 집 인근 69스트릿 센트럴파크웨스트 코너에서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베크만은 66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청색 재킷 그림은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었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은 10월 19일부터 내년 2월 20일까지 막스 베크만의 뉴욕 시기를 조망하는 특별전 'Max Beckmann in New York'을 연다. 이번 전시에는 베크만의 뉴욕 거주 16개월간(1949-50) 제작한 회화 14편을 비롯, 뉴욕에 소장된 1920-48년 사이 자화상, 인물화, 풍경화, 세폭짜리 회화 등 25점 등 총 39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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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Departure, 1932-1933  나치 치하 독일에서 자유의 땅 미국까지 베크만이 여정이 담긴 3부작.


1884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베커만은 22세에 베를린과 바이마르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빌라 로마나상을 받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거주 작가로 살았다. 이후 비평가들은 베크만을 루벤스, 렘브란트, 들라크로아에 비견할 정도로 명성이 높아졌다. 

1914년 제 1차세계대전을 터졌을 때 베크만은 이미 서른살이었지만, 위생병으로 자원한다. 최전선으로 파병된 그는 직접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참화 속에서 수많은 시체들과 부상병들을 보면서 '영혼의 부상'을 입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전후 베크만은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공인되며 프랑크푸르트의 스타델아트스쿨 교수를 지냈지만, 1933년 히틀러 치하 나치정권에 의해 '퇴폐미술(degenerate art)'로 낙인되며 작품이 압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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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Family Picture, 1920

히틀러가 1937년 '퇴폐미술전'으로 능멸하자 베크만은 아내 콰피(Mathilde “Quappi” Beckmann)와 네덜란드로 망명, 10년간 살았다. 1947년 여러번의 거부 끝에 마침내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베크만은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에 화가 필립 거스톤이 가르치던 빈 자리에 임시 교수직으로 채용됐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백화점 재벌 모튼 D. 메이(Morton D. May)은 베크만의 작품에 홀딱 반해 대거 구입했고, 후에 세인트루이스뮤지엄(St. Louis Art Museum)에 기부했다. 이로써 세인트루이스뮤지엄은 미국 내 막스 베크만 최대 컬렉션을 자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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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Falling Man, 1950  마치 9/11을 예견한듯한 회화.


베크만은 1949년 뉴욕에 정착, 브루클린뮤지엄아트스쿨 교수로 에서 가르치면서 작업했다. 뉴욕에 추상표현주의가 풍미하던 시절, 막스 베크만은 어느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자유인으로서 작업했다. 

그는 뉴욕을 사랑했다. 당시 뉴욕은 베를린보다 10배나 활기찬 도시라고 말했다. 베크만은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안경집을 미완성으로 남긴채 눈을 감았다. 그는 후대 신표현주의에 영향을 주었으며 안셀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에릭 피슬, 말콤 몰리, 줄리안 슈나벨 등이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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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The Town(City Night), 1950 뉴욕시절 매춘과 범죄, 탐욕, 예술, 다인종 등을 묘사한 도시의 밤 풍경.


만일, 히틀러가 화가로서 성공하고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세계사, 특히 서양 미술사는 어떻게 변모해 있을까?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미술계에 대한 욕구불만에 차있었고, 자신의 미학을 거슬리는 모더니즘, 즉 미술, 문학, 음악, 철학 등을 탄압했다. 미술사에서 커다란 획이 될 표현주의, 다다, 큐비즘, 추상화를 발본색원하며, 독일을 문화적인 공황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막스 베크만의 캔버스는 마치 스테인드글래스 창이나 목판화처럼 굵은 테두리의 선이 강조된다. 그의 알레고리적인 회화 속에서 인물들은 고통스럽고,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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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Optician's Window, 1950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안경가게는 미완성 유작이다. 


베크만은 또한 렘브란트, 반 고흐, 피카소처럼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유화, 드로잉, 판화 등 자화상만 85점에 달한다. 캔버스 속에서 베크만은 늘 담배를 피우며 냉소적으로 관람객을 본다. '에고'가 강했던 베크만은 담배를 태우다 말고, 관람객에게 냉소적으로 묻고 있는듯 하다. 당신이 살고 있는 현실은 내가 살았던 나치 치하보다 행복한까요?

1964-65년 MoMA,  보스턴뮤지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막스 베크만 회고 순회전을 열었다. 1984년엔 세인트루이스뮤지엄에서 베크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회고전을 열었고, LA카운티뮤지엄(LACMA)으로 순회 전시됐다. 

2001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베크만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Horn,1938)이 2250만 달러에 팔렸다. 구입자는 독일, 오스트리아 전문 뮤지엄 노이에 갈러리의 창립자인 로날드 로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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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Self-Portrait with White Hat, 1926(left)/ Self Portrait in Front of Red Curtain,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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