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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3세기 후 재평가 귀도 카냐치(Guido Cagnacci)

미국에 4점뿐...프릭컬렉션 '막달레나'와 메트뮤지엄 '클레오파트라'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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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릭컬렉션의 자비에 F. 살로몬(Xavier F. Salomon) 큐레이터가 '막달레나의 회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모딜리아니, 바스키아... 생전에는 작품을 팔지 못했다가 사망한 후 인정받으며, 그림 값이 솟은 화가들이다.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은 40여년이 지나서 재평가됐다. 이탈리아 화가 귀도 카냐치(Guido Cagnacci, 1601–1663)는 사후 3세기가 지나서인 1950년대서야 비로소 재발견된 화가다. 


카냐치의 작품은 미국에 딱 4점이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뮤지엄(Columbia Museum of Art)에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David Holding Goliath's Head, 1650)', LA의 게티뮤지엄(J. Paul Getty Museum)에서도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1645-50)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2점을 지금 뉴욕에서 볼 수 있다. 프릭컬렉션이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노튼사이먼뮤지엄(Norton Simon Museum)에서 대여해온 '막달레나의 회개(The Repentant Magdalene, ca. 1660−63)'를 대여 전시하고 있으며,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은 올 6월 구입한 '클레오파트라'를 전시 중이다. 



귀도 카냐치: 악명 높았던 바로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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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냐치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 왼쪽이 컬럼비아 뮤지엄, 오른쪽이 게티뮤지엄 소장품이다.  



카라바지오는 바로크 미술에 영향을 주었고, 카냐치는 카라치(Ludovico Carracci,1555–1619), 레니(Guido Reni,1575–1642), 구에르치노(Il Guercino, 1591–1666) 등 당대 볼로뉴 학파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다. 


귀도 카냐치의 사생활은 드라마틱했다. 전대의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가 동성연애자였으며 폭력적이었던 반면, 카냐치는 여자와 범죄가 뒤따라 다녔다. 귀족 과부와 불법적으로 도피행각을 벌였다가 체포될까봐 차버렸는가 하면, 남장여인 견습생과 사귀었다. 부유한 여인을 감언이설로 꼬득여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이름을 바꾸어가면서 살았다. 그의 별종, 괴짜같은 삶이 작품을 평가절하시켰을까?

 

1601년 로마냐에서 부유한 모피상의 아들로 태어난 귀도 카냐치는 10대에 볼로냐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로마에서 살았다. 당시 볼로뉴 학파 카라치와 구에르치노를 사사했으며, 베니스로 이주해 10여년간 활동했다 당시 카냐치는 귀족들의 위임을 받아 노골적이며 관능적인 반 누드 묘사와 농담법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그렸으나, 베니스의 화단에선 카냐치를 혹평했다. 이유는 카냐치가 전신 인물화 대신 상반신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발을 못 그리는 화가'로 낙인 찍힌 것이다. 



Cagnacci’s “Repentant Magdalene”: 

An Italian Baroque Masterpiece from the Norton Simon Museum


Oct. 25-Jan. 22, 2017@Frick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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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o Cagnacci, The Repentant Magdalene, ca. 1660−63.



귀도 카냐치는 1958년 비엔나에 정착했다. 이때 황제 레오풀드 1세의 위임을 받아 그린 작품이 '회개하는 막달레나(The Repentant Magdalene)'다. 1960년부터 63년까지 무려 4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준부로 쾌락에 탐닉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인물. 죄많은 여인 막달레나는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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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o Cagnacci, The Repentant Magdalene, ca. 1660−63.(detail)



카냐치의 회화 '막달레나의 회개'에서 막달레나는 화려한 의상과 보석이 흩어진 채 흰 천으로 엉덩이만 가리고 엎드려 있다. 막달레나의 허영심을 호통치는 인물은 언니인 마르타로 왼쪽의 천사와 악마를 가리키고 있다. 오른편 열린 문 밖 발코니로 청명한 날의 햇빛이 들어오며, 두 하녀들이 이 상황에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다. 카냐치는 막달레나의 과거를 상징하는 화려한 보석과 신발은 물론 막달레나의 발가락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각 인물들이 프리즈프레임된 연극적인 구도가 카냐치의 회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막달레나의 회개'는 카냐치가 자신이 다리와 발도 잘 그릴 수 있다고 입증한 전신 인물화였다. 얼마나 만족했던지 이름 옆에 '발명자'라고 서명까지 했다. 카냐치는 '회개하는 막달레나'를 완성한 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릭컬렉션

▶개관시간: 화-토 오전 10시-오후 6시, 일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입장료: $20(성인), $15(62세 이상), $10(학생), 10세 미만 입장 불가. *일요일 오전 11시∼오후 1시, 첫째주 금요일 오후 6-9시 무료. 1 East 70th St.@5th Ave. 212-288-0700. www.frick.org.



Cagnacci: The Death of Cleopatra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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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뮤지엄(#601)에 나란히 걸려있는 스승과 제자. 오른쪽이 귀도 레니의 '무원죄 잉태설', 왼쪽이 귀도 카냐치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한편,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이 소장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The Death of Cleopatra, 1646-55)'은 베니스 거주 시절 그린 작품이다. 유러피언 갤러리 #601에 귀도 레니의 '무원죄 잉태설(The Immaculate Conception,1627)에 걸리며 스승과 재회했다.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17세기 유럽에서 인기 소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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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o  Cagnacci,The Death of Cleopatra, 1646-55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의 선전포고로 악티움 해전에 사랑하는 안토니우스를 보냈지만, 패배한 후 자살한다. 카냐치는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물려 자살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모델은 카냐치의 애인으로 추정된다. 카냐치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여러 버전(Brera Gallery, Milan/ Kunsthistoriches Museum, Vienna)으로 그렸으며, 모두 상반신이 누드이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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