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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클레: 컬러와 하모니, 유머와 판타지

Humor and Fantasy—The Berggruen Paul Klee Collection


SEP. 1, 2016–JAN. 2, 2017

@The Met Bre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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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뮤지엄 분관 메트 브로이어(The Met Breuer/구 휘트니뮤지엄)에서 미국 내 최대 폴 클레(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 컬렉션인 버그루엔 클레 컬렉션(Berggruen Klee Collection) 7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폴 클레: 유머와 판타지(Humor and Fantasy—The Berggruen Paul Klee Collection, 9월 1일-2017년 1월 2일)'를 주제로 한 이 전시는 1890년대 13세의 폴 클레의 학생시절부터 1940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전 생애를 망라하는 작품을 통해 보는 클레의 미니 회고전이다. 


하인즈 버그루엔(Heinz Berggruen)과 그의 가족은 1984년 메트뮤지엄에 회화 11점, 수채화 71점, 드로잉 8점 등 90여점을 기부했다. 메트 브로이어의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도 폴 클레와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가르쳤던 인연이 있다.


"미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폴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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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Birds Sweeping Dawn, 1915



메트 브로이어 전시 '유머와 판타지'는 주제와 시기별로 나뉘어 소개되고 있다.



도시풍경, 시골풍경

클레가 열세살 때 자신의 고향 거리를 연필로 그린 'Junkerngasse in Bern'을 비롯 뮌헨의 교외, 프랑스의 버려진 정원, 튀니지아 등 아랍의 풍경 등을 즉각적인 친밀함으로 포착했다. 


클레의 유머

클레의 삶과 작품에서 유머는 큰 역할을 했다. 남자, 여자, 동물까지 모두 그의 장난끼에서 벗어난 작품은 별로 없다. 클레는  성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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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Small Portrait of a Girl in Yellow, 1925, Gypsum and oil on canvas



추상으로 가는 길

1914년 클레는 튀니지아를 여행하던 중 그대로 묘사하는 컬러에서 점차 벗어나며, 풍경도 추상으로, 반투명한 컬러의 평면으로 감축하게 된다. 클레는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처럼 추상을 깊은 정신적 목표로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느정도 막바지에서 칙칙한 현실을 유지하기위해 사용했다. 클레는 끊임없이 창의적이였으며, 다양한 형체를 천재적으로 제작했다.


바우하우스의 클레, 1921-31

클레는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디자인건축학교와 데사우에서 가르치는 동안 전작의 절반에 가까운 작은 사이즈의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실험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스타일이 보인다. 환상적이며 변덕스러운 작품으로부터 색조와 구도에 집착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선은 점이 산책 나간 것이다." 

-폴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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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Comedians' Handbill, 1938, Gouache on newsprint mounted on cardboard


후기의 클레, 1931-40

클레가 뒤셀도르프에서 만족스럽게 살았다는 것은 점묘파의 모자이크 스타일에서 보여진다.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에서 해고당한 후 성공한 작가로서 1933년 베른으로 귀향하지만, 스위스에서는 추종세력이 약했다. 1936년 클레는 피부경화증 진단을 받는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게되자 클레는 더욱 작업에 정진했다. 그러면서 스타일도 바뀌었다. 선은 두꺼워졌고, 형태는 넓어졌고, 색채는 단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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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스튜디오에서 폴 클레.



폴 클레/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스위스 뮌헨부흐제에서 독일인 음악교사 아버지와 스위스 출신 성악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베른으로 이사해 성장했으며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11살 때 베를린음악협회의 단원으로 연주했다. 10대에는 부모의 기대대로 뮤지션을 꿈꾸었으나, 근대음악에 회의를 느낀 후 그림으로 관심을 돌렸다.


16살 때엔 풍경화로 재능을 보였다. 음악과 미술뿐 아니라 방대한 독서로 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18살 때 뮌헨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색채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방황의 시절을 보낸다. 이즈음 술집 여자들, 화가의 모델들과 연애를 하며 소일했다. 1900년 미대생 시절 아들을 얻었지만, 몇주 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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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Temple Gardens, 1920, Gouache and traces of ink on three sheets of paper mounted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1901년 미술아카데미 졸업 후 클레는 친구 허만 할러와 로마, 피렌체, 나폴리 등지를 여행하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했다. 이듬해 베른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다가 바늘로 그리는 테크닉을 개발해 57점의 '아버지의 초상' 시리즈를 그리며 에칭 작업을 했다. 이즈음 클레는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콘서트와 연극 리뷰를 쓰며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1906년 피아니스트 릴리 스텀프와 결혼, 아들 펠릭스를 낳고 뮌헨 교외에서 살았다. 1910년 마침내 베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스위스의 3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를 했다. 1911년 뮌헨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창설한 청기사파(Der Blaue Reiter/The Blue Rider)에 합류해 활동했다. 청기사파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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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May Picture, 1925, Oil on cardboard



"색채가 나를 소유한다. 내가 색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색채는 나를 항상 점유할 것이다. 

이것이 색채와 내가 합일하는 해피 아워다. 

나는 화가다." 

-폴 클레-


1914년 튀니지아 여행에서 클레가 발견한 것은 컬러였다. 이후 추상의 생채 낭만주의에 골몰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한 추상화로서 컬러 사각형과 몇개의 원을 사용한 작품으로 음악을 작곡하듯이 색채의 조화를 구사하게 된다. 


제 1차세계대전 발발 후 징집되어 복무했으며, 친구들이 전사한다. 전쟁 중에도 클레는 그림을 그렸고, 전시회를 열었다. 1917년경 작품도 잘 팔혔고, 비평가들은 독일 신세대 작가 중 최고로 평가했다. 


전후 클레는 스튜트가르트미술아카데미 강사로 지원했다가 떨어지자 아트딜러 한스 골츠와 3년 계약으로 전화위복된다. 이듬해 클레는 300여점을 소개하는 회고전을 열었다. 1924년 칸딘스키, 파이닝거, 졸웬스키 등과 청색 4인방 Die Blaue Vier/The Blue Four)을 결성해 강의하며, 전시를 했다. 1931년 뒤셀도르프아카데미에서 강의하며 안정된 생활을 했으나, 나치 게슈타포가 가택 수색을 당하고, 직장도 잃었다. 이즈음 피카소를 만나 그를 찬미하게 되었다. 1933년 스위스로 완전히 이민한 후 피부경화증을 앓기 시작한다. 1937년 독일로 돌아갔다가 17점이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고, 102점은 나치에 의해 강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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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The Man Under the Pear Tree, 1921, Watercolor and transferred printing ink on paper, bordered with metallic foil, mounted on cardboard



"한눈으로는 보고, 다른 눈으로는 느낀다." 

-폴 클레-


1940년 클레는 끝내 자신이 태어난 스위스의 시민이 되지 못한채 베른에 묻혔다. 클레는 어느 한 유파에 머무르지 않고 표현주의,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추상주의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작업했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클레의 작품은 도루 다케미츠, 탄둔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곡들이 발표된다. 클레는 생애 9천여점을 남겼으며,  2005년 스위스 베른에 렌조 피아노(퐁퓌두센터, 뉴 휘트니뮤지엄)가 설계한 폴클레센터(Zentrum Paul Klee)가 오픈했다. 파울클레센터는 총 4천여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6개월마다 150여점씩 소개하고 있다. http://www.zpk.org


폴 클레와 외동 아들 펠릭스(Felix Klee, 1907-1990)의 관계도 흥미롭다. 클레의 아내 릴리는 피아노 교습과 연주활동으로 돈을 버는 대신 폴 클레가 집안 살림을 맡아하면서 아들 펠릭스를 키웠다. '미스터 맘마'로  육아 일기(Felix-calendar)를 썼으며, 약과 병력, 식욕, 체온, 말하는 상태와 놀이 등을 기록했다. 아버지는  인형극을 좋아하는 아들의 9살 생일 때 인형 8개를 만들어 주었으며, 1925년까지는 50개의 손잡이 인형을 제작했다. 그중 30점이 폴클레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1921년 바이마르로 이사 후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칠 때 펠릭스는 14살에 입학, 바우하우스의 최연소 학생이 되었다. 펠릭스는 미술사가와 오페라 연출자로 활동하며 1957년 아버지의 일기(The Diaries of Paul Klee, 1898-1918)를 출간했으며, 1963년 폴 클레 재단의 대표를 맡다가 83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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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t Breuer 945 Madison Ave,@75th St. 

▶개방시간: 일-목 오전 10시-오후 5시30분, 금-토 오전 10시-오후 9시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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