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보첼리 12월 15일 뉴욕 콘서트
Andrea Bocelli@Madison Square Garden in New York, NY
Wednesday, December 15, 2016, 7:30 PM
안드레아 보첼리가 12월 15일 매디슨스퀘어 가든, 17일 보스턴 TD가든, 18일 뉴왁 프루덴셜센터에서 콘서트를 연다.
http://www.andreabocelli.com <2016. 12. 3 Update>
http://www.andreabocelli.com
“신에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안드레아 보첼리처럼 들릴 것이다.”
-셀린 디온-
“안드레아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오프라 윈프리-
안드레아 보첼리와의 대화
A Conversation with Andrea Bocelli
"인생은 이상한 모험의 연속이며,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
*이 인터뷰는 한국 중앙일보 2011년 9월 24일 자에 실린 것을 보완한 글입니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스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1958~)가 9월 15일(*2011년) 밤 센트럴파크에서 역사적인 콘서트를 열었다.
센트럴파크 그레이트 론은 1981년 9월 사이먼&가펑컬이 해체 11년만에 재결합 콘서트를 열었고, 1993년 6월 절정기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공연했던 그 공원이다.
거센 비바람에 가랑비가 내리는 센트럴파크의 그레이트론은 그야말로 ‘폭풍의 공원’이었다.
보첼리의 열혈 팬들은 우산과 두꺼운 코트로 무장하고 줄을 섰다. 주최측은 몇 주전 뉴욕시 각 공원에서 무료 티켓 6만장을 미리 배포했다. 플로리다에서도, 워싱턴 DC, 펜실베이니아주에서도 팬들이 몰려왔다.
VIP 텐트 속에선 보첼리의 가족, 가수 스팅, 배우 알렉 볼드윈 등의 모습이 보였고, TV 앵커 케이티 쿠릭과 18세 연하의 남자친구 브룩스 펄린,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수퍼모델 출신 부인 멜라니, 그리고 전 부인 이바나 트럼프도 이 특별한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매년 여름 그레이트론에선 뉴욕필하모닉 무료 콘서트가 열려왔다. 올해는 뉴욕필 콘서트는 취소됐고, 앨런 길버트가 지휘하는 뉴욕필이 대신 보첼리와 만난 것이다.
AP
보첼리는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 리골레토)’ ‘가라, 토스카!(Va, Tosca!, 토스카)” ‘오 아름다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 라보엠)’ 등 오페라 아리아에서 ‘볼라레’‘푸니쿨라’ 등 이탈리아 노래, 그리고 팝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레퍼토리를 선사했다. 깜짝 게스트 셀린 디온과는 히트곡 ‘기도’를, 베테랑 가수 토니 베넷과는 ‘뉴욕, 뉴욕’을 노래해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떠나야할 시간의 피날레곡은 사라 브라이트만과 불렀던 메가 히트곡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과 '공주는 잠 못이루고(Nessun dorma, 투란도트)'로 장식했다.
보첼리는 센트럴파크 콘서트를 앞둔 13일 링컨센터 내 월터리드시어터에서 뉴욕타임스의 로빈 포그레빈 기자와 공개 인터뷰를 열었다. 이 자리엔 임신한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 둘째 아들 마테오, 어머니 에디 보첼리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콘서트 위해 30파운드 감량
-아버지의 꿈이 당신이 미국에서, 특히 뉴욕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실현하게 된 소감은.
“센트럴파크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하게될 줄은 몰랐다. 특히 셀린 디온, 토니 버넷, 브린 터플, 데이빗 포스터 등 재능있는 아티스트들과 공연하게 되어 기쁘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 콘서트를 보신다면 정말 좋아하실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나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뉴욕필과 에버리피셔홀에서 세시간 리허설을 했다. 야외 무대의 리허설은 다를텐데, 어떻게 준비하나.
“준비는 어디서도 항상 같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미국인, 뉴요커들은 내게 항상 존중해줘서 무척 특별하다. 이번 콘서트를 CD와 DVD 덕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콘서트에서 신곡 5곡을 부를 것이다.
콘서트 준비하면서 사실 희생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8월은 바캉스가 아닌가. 그런데, 콘서트를 앞두고 한달간 파스타도 와인도 포기해야했다(하하!) 난 이탈리안인데(하하!) LA에 와있던 아들이 날 보더니 ‘아빠, 날씬해 보이는 걸!’하더라. 그래서 ‘OK! 좋아1’라고 했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와이너리 Bocelli Family Wine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http://www.bocellifamilywines.com
-파스타가 목소리에 나쁜가.
“파스타가 문제가 아니라, 지방(Fat)이 해로운 것이다.”
(보첼리는 이 다이어트로 30파운드를 뺐다.)
-오페라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오페라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학교, 교회, 가정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종종 시켰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 후 피곤한데도 노래를 하라고 했다. 오페라의 큰 볼륨, 아름다운 억양, 깊은 표현력을 좋아한다.”
-젊어서 비틀즈와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즐겼다던데.
“난 20대에 늦게 팝송을 발견했다. 대학시절 피아노바에서 노래하면서는 오페라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팝을 듣게 됐고, 재미있었다. 팝을 알게된 것은 새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오페라를 노래하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소리를 마구 지르냐? 그만해!’라 놀리곤 했다.”
-미 TV 미니시리즈 ‘소프라노’에, 파스타 광고 ‘바릴라’에도 노래가 쓰였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은.
“내 레코드와 목소리가 너무 여러 곳에서 나오니까 나부터 점점 지겨워졌다. 사람들이 ‘이젠 그만해, 그만해!’하는 것 같다!”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
-어려서 울다가도 클래식음악만 들으면 그쳤다던데.
“6개월 때였을 것이다. 운명이었나 보다.”
-음악적인 가족이었나.
“우리 아버지는 음치이셨다. 내게 화가 나셨을 땐 목소리가 무척 크셨지만! 음치셨다. 어머니 쪽은 프로는 아니지만 뮤지션들이 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여덟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난 게을렀고 그리 잘 하지는 못했다. 스무살 땐 제법 모든 곡을 칠 수 있었다.
노래는 늦게 시작하게 됐다. 난 노래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음악 코치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 첫 선생님이 ‘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정 반대 기법으로 노래를 한다’고 말했다.”
-피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년간 변호사로도 일했다. 어떻게 가수가 됐나.
“노래가 아니고선 아무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이상한 모험의 연속이며,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노래하겠다는 것에 찬성하던가.
“부모님은 ‘너는 자유니깐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하셨다. 하지만, 공부부터 해라. 노래는 어려운 도전이니깐. 그리고 지금 당장은 우리를 위해서나 노래하라고 하셨다.”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렐리의 문하생이었다.
“우리 집 가정부가 ‘프랑코 코렐리, 라 스칼라, 모든 이를 놀라게하다’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무척 미남이니 만나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는데, 보자 마자 반했다. 그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면서 그를 모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루 종일 배우고, 저녁식사에도 초대해 한밤중까지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참 슬픈 일은 내가 유명해지면서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마에스트로’라 부르며 사인을 요청했다. 나의 마에스트로는 사실 프랑코인데, 나는 정말 당황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후로 그에게 더 이상 배울 수가 없었다.”
AP
-당신은 ‘크로스 오버 가수’라는 호칭을 싫어한다는데, 이유라면.
“난 크로스오버 콘서트를 좋아하지않는다. 모든 언어는 고유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팝송과 오페라의 언어는 다르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함께 쓰면, 모두 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셈이 된다. 각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크로스오버를 존중하지만, 나는 아니다.”
-콘서트보다 레코딩을 더 좋아하고, 청중 앞에 서는 것에 공포증이 있다는 데 사실인가.
“난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콘서트 후 들어보면 100%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듣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레코딩은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녹음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한다.”
-오페라가 쇠퇴하는 예술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극장은 항상 청중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에선 정기 티켓을 구하려면, 누군가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오페라 극장의 좌석은 스포츠경기나 록콘서트가 열리는 스타디움보다 적은 2000여명 내외다. 그리고, 오페라는 TV에 잘 맞지 않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은 오페라를 좋아하고 있다. 왜냐면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오는 22일이면 보첼리는 53세가 된다.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와 사이에 아기도 곧 태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에게 바쳤던 자서전 ‘침묵의 음악(The Music of Silence)’ 개정판이 이달 말에 출간된다.
-회고록 ‘침묵의 음악’이 11년만에 개정판으로 나온다. 무엇이 추가됐나.
“당시 책을 급하게 써서 낸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읽으실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였다. 훗날 수정할 부분도 있었고, 주인공 아모스의 지난 10년간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전적인 이야기지만, 허구다.”
-왜 안드레아가 아니고 아모스를 주인공으로 했나.
“우선 이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아모스는 오랫동안 나와 아주 가까웠던, 내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헌사다.”(*아모스는 안드레아의 큰 아들(16) 이름이기도 하다.)
-플룻과 색소폰도 연주한다. 베로니카 말에 의하면 아들을 위해 작곡도 했다던데, 앞으로 갈 길인가.
“작곡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좋아한다. 여러 곡을 작곡해서 녹음도 했지만, 작곡은 내 강점이 아니다. 내겐 작곡가로 성공하는 것은 머나먼 길이다.”
파바로티와 보첼리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록스타 주커로와 공연하면서 유명해졌다. 교황 앞에서, 빌 클린턴 앞에서도 노래했다. 명성이란 무엇일까.(보첼리는 파바로티의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노래했다.)
“명성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우연하게 시작된다. 처음에 명성이 오면, 호기심도 생기고 흥미있다. 이후엔 습관이 되며 무언가를 주지만, 한편으론 사생활을 빼앗아 간다. 한 무명의 시골 청년이 ‘안드레아’가 되어 곳곳에서 사인과 악수를 요청받게 됐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일관되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7천만장 앨범 판매, 빌보드 톱 10에 앨범 5개 랭크, 그래미상과 골든글로브상 수상…등 많은 것을 성취했다. 무엇이 남았나.
“내가 꿈꾼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또, 더 이상 이기고 싶은 것이없어서 좋기는 하다. 가수라는 행운의 직업인으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 애들에게도 말한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 말로만 해서는 안되므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사진·정리=박숙희 문화전문기자/뉴욕중앙일보
sukie@koreadaily.com
☞안드레아 보첼리 Adrea Bocelli
1958년 토스카니 라 스테르짜의 농가에서 태어남. 녹내장이 있었으나 열두살 때 축구하다 다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여섯살 때 피아노를 시작, 플룻,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하프, 기타에서 드럼까지 두루 악기를 배웠다. 피사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피아노 바에서 노래했다.
유럽의 주목을 끈 것은 94년 산레모가요제의 신인상을 수상한 후다. 이어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가 1200만장이 팔리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998년 셀린 디온과 듀엣으로 부른 만화영화 ‘카멜롯을 찾아서’의 주제가 ‘기도(The Prayer)’로 골든글로브 최우수 오리지널송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50인’에 선정됐으며, 이듬해엔 1961년 이후 클래식 연주자 최초로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클래식 앨범 ‘Sacred Arias’는 500만장 이상이 팔리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다 판매 클래식 앨범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4월 30일 부친이 사망한 해 7월 5일 보첼리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유의 여신상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서 보첼리는 앙코르곡 ‘꿈(Sogno)’을 아버지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