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정향씨 인터뷰: 캔버스는 미지의 여행이자 교감의 공간
김정향 Jung Hyang Kim
"캔버스는 미지의 여행이자 교감의 공간"
Jung Hyang Kim, Ripple # 7, 40"x48", oil on canvas, 2016. 뱅크오브 호프 전시작(왼쪽). 달우 김정향 작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의 환희를 리드미컬한 패턴과 화사한 컬러로 섬세하고 시적으로 묘사해온 화가 달우(DARU) 김정향(Jung Hyang Kim)씨가 1월 18일부터 맨해튼 한인타운 뱅크 오브 호프(Bank of Hope, 16 West 32nd St.)에서 개인전 'Reflection'을 연다. 알재단(AHL Foundation)의 'Art in Workpla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7월 10일까지 계속된다.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정향씨는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1977년 뉴욕으로 이주,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윈도우스 온 화이트에서 첫 뉴욕 개인전을 연 후 뉴욕을 비롯 서울, 아틀랜타(GA), 프린스턴(NJ), 랭카스터(PA), 웨스트포트(CT), 그리고 파리 등지에서 20여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 브루클린의 크레센트 지하철역, 뉴욕대 랭고니 메디컬센터 로비, 그리고 LIG 화재보험(부산, 사천) 등지에 공공미술작품을 설치했다.
뉴욕타임스는 2009년 롱아일랜드 다우링대 안소니 지오르다노 갤러리에서 열린 김정향씨의 개인전 'Jung Hyang Kim: In Flux, in Bloom'에 대해 “명백한 산고(産苦)의 결과물이다. 그녀의 작품은 매력적이며 때로는 장식적인 이야기, 시(詩)와 아름다움을 혼합하는 훌륭한 창의성과 섬세함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풍요하게 시각적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김정향씨는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사진과 켄 셩(Ken Shung) 교수와 결혼, 업스테이트 저먼타운(German Town)에서 살고 있다.
'라보엠'의 주인공들처럼 시작한 뉴욕 생활
-뉴욕 이주 40년째, 감회가 어떠신지요?
김정향: 1977년 제가 대학교 졸업하자 마자 뉴욕에 와서 벌써 40년이 되는 것이 작년부터 은근히 기대되고 기다려졌어요. 마치 먼곳에 원정갔다가 우여곡절 후에 정착했는데, 이만하면 꽤나 잘했다 저의 어깨라도 토닥거려주고 싶은 심정이예요. 뉴욕이 워낙 경쟁이 심한 곳이다 보니까요. 지난 40년동안 가족, 친지의 도움과 격려가 없었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1977년 미대 유학생에게 뉴욕, 프랫인스티튜트가 있던 브루클린은 어떤 풍경이었나요?
김정향: 뉴욕에 1977년 7월 말 도착해서 개학하기 전 프랫 인스티튜트에 처음 방문했을때는 정말 쇼크였어요. 아담한 캠퍼스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검정 쓰레기들이 곳곳에 산같이 쌓여있고 캠퍼스 밖은 흑인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어서 아니 이 쓰레기는 뭐고, 왜 사람들은 바깥에 나와서 있나 정말 이해할수 없는 풍경이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은 그때 뉴욕 전체가 쓰레기 청소부 파업중이었고 뉴욕 아파트들은 좁고 더워서 사람들은 주로 바깥에서 논다는 거였죠. 그래도 그당시 뉴욕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면서도, 저력이 있고, 창조적 힘이 있었어요. 월세가 싸서 가난한 작가들이 자신의 꿈을 펼쳐볼 수 있는 환경이었죠. 왠지 불타버리고 버려진 빌딩들을 지나가며 '라보엠'의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며 비극적인 기운을 느끼며 창작의욕이 강렬하게 나온 것 같아요.
-당시 미국 미술계는 어떤 이즘이 강세였는지요? 앤디 워홀과 팝 아트 등 미술계 분위기를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김정향: 당시 뉴욕은 소호에서 주로 작품을 하던 도날드 져드, 칼 앙드레, 솔 르위트, 온 카와라 등 미니멀리즘들이 대세였죠. 오히려 한국에선 앤디 워홀과 팝아트를 더 쉽게 이해하고 왔는데, 막상 뉴욕에 오니 뉴욕의 암울하고, 위험한듯한 분위기에서 미니멀이 더와 닿았어요.
-가부장적인 미술계에서 한국인 여성, 이민작가로서 차별을 느끼셨는지요?
김정향: 특별히 한국 여성작가로서 차별을 받았다기보단 연고자가 없는 솔로 아티스트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첫 10년이 간거 같아요. 첫 10년 동안, 10번 이사 다니며 뉴욕에서의 작가로 버티는 게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어요. 그때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죠.
김정향씨와 켄 셩 부부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김정향: 1987년 뉴욕온 지 10년 되면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브루클린의 전시 오프닝에서 만났으니 올해 30주년이네요.
-예술가 부부의 장점은 무엇인지요?
김정향: 장점은 서로의 작가적 삶을 존중하며 빈 공간들을 많이 남겨 둔다는 것 같아요. 서로를 꽉 채우지 않은 채로… 이 사람이 나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없이 사는거죠.
-생활을 위해 직업을 가지셨는지요?
김정향: 프랫대학원 졸업하자 마자 한국 문화원에서 6개월 일하고, 뉴욕한국일보에서 기자로 3년 근무한 후, 영주권을 받았어요. 이후 미국 잡지사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1990년까지 일했고, 1998년까지는 Studio in a School에서 파트타임으로 국민학교 미술교사를 했어요.
-언제부터 전업작가가 되셨나요?
김정향: 1998년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기가 됐던 것 같아요. 뭔가 "What's wrong with this picture?" 왜 전업작가로 살지 못하는거지? 그때부터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김정향씨의 프랫대학원 시절(1978), 뉴욕한국일보 기자 시절(1982), 이스트빌리지 로프트에서(1984), 'Spiritoso' 앞에서(2011).
-그러면, 뉴욕 화단에서 어떻게 달려오셨나요?
김정향: 1996-7년 소호에서 첫 개인전을 하며 뉴욕타임즈, 아트 인 아메리카 등 많은 신문, 잡지에서 호응을 받으며 작가로서 20년만에 인정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다음 20년은 전시회도 1년에 8-9번씩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지낸거 같아요.
-지하철 공공미술에서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비결이라면?
김정향: 지하철 공공미술을 하게 된건 우연이었어요. 저는 제 작품과 공공미술과는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런걸 할 수 있지도 않다고 생각해왔었지요. 어느날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School of Visual Arts)에서 가르치는 남편이 MTA(Metropolitan Transportation Authority) L 트레인 스테이션 작가를 모집한다는 종이를 슬쩍 제 책상 위에 놓고간 걸 읽다보니 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어요. 이때 제 작품 전체를 수십번 정리해서 다시 보면서 지하철 프로젝트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 20점을 선정해서 보냈더니 파이널 리스트가 된거예요. 저도 놀랐어요. 프로포절을 냈는데 선정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J 트레인 정거장을 또 신청해서 결국 프로젝트를 따게 된거죠.
-고군분투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은?
김정향: 신념을 갖고 자기 작품을 연구하고, 돌아보고, 꾸준히 전시 기회를 만들고, 아직 전업작가가 아니라도 항상 전업작가같은 프로의식을 잃지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작업실에 일주일 20시간 이상 투자하라고 조언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작가가 되려면, 뉴욕에 꼭 있어야 된다는 편견을 없애야 하는 것 같아요. 본인의 작품을 못하면서 뉴욕에 사는 것은 의미가 없죠.
Jung Hyang Kim, Reflections #2, 30"x48", oil on canvas, 2016. 뱅크오브 호프 전시작
나의 작품이 테라피가 되고파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오는지요?
김정향: 작품의 영감은 간단히 말하면 자연, 그리고 회화의 조형성의 문제들, 순간적으로 체험하는 서정성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또 보이지않는 자연의 신비를 색채의 변주, 기하학적 형상, 상징적 시각언어를 통해 폭넓고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 내는거죠. 캔버스는 미지의 여행이 되기도 하고 자연과 명상의 세계가 복합적 혼합체로 펼쳐지는 공간의 역할을 하면서 관조, 응시, 그리고 촉발되는 교감의 공간을 창조하려는 것입니다. 평소에 시집, 소설을 즐겨 읽고, 작품 제목들은 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요.
-전형적인 작업 과정은.
김정향: 아침에 커피 세잔 마신 후 식사는 제가 만들어 먹고, 주말엔 남편이 맛있는 요리 담당이예요. 작품할 땐 조용한 것을 선호해요. 음악도 안듣죠. 쉬는 시간에 나무 가지도 치고, 잡초도 뽑고, 쑥, 도라지, 냉이, 민들레등 자주 잡초 요리하는 방법들을 찾아서 해봐요. 올해는 혼자 자라는 뽕나무를 찿아서 내년 봄에 오디(*뽕나무 열매)를 따먹을걸 기대하고 있어요.
-밝고, 화사하며, 리드미컬한 작품처럼 성격도 그러하신지요? 아니면, 그런 정신세계를 추구하시는지요?
김정향: 제 성격이 뉴욕에 살면서 더 밝고 화사하게 변한거 같아요. 이왕 힘든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밝고 따뜻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살려고 하는 거죠.
2013년 11월 NYU 랑고니 메디컬센터에 설치된 김정향씨의 '태양의 축제/Sun Feast' 오프닝.
-영구 설치작품, 공공설치작품의 장소에 따라 작가로서 어떤 소통을 원하시는지요?
김정향: 영구 설치작품일 경우 지하철, 병원 회사에 따라 제 작품의 분위기와 시각적 요소들에서 너무 동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장소의 특색을 살리면서 디자인을 해요. 제 회화에선 추상성이 돋보이지만 공공작품에서는 장식적 요소를 더 강조하죠. 지하철인 경우 동네 분위기, 그 동네사는 주민들, 혹시 동네에 소중한 스토리가 있나등을 조사하고 디자인에 들어가고, 병원일 경우는 환자들의 심경에 누를 끼치지 않는 색채들을 연구해서 디자인을 하죠. 회사일 경우는 장소의 분위기도 중요하고, 회사 로고라든지 로고 색상을 염두에 두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회화 작업의 조형적 기조를 유지하면서 장소의 특정성, 공간의 속성, 공공작품이 노출되는 커뮤니티와의 소통과 공감을 디자인, 장식성을 강조해서 보여주려하죠.
-뱅크 오브 호프 전시에서는 어떤 기대를 하시나요?
김정향: 이번 뱅크 오브 호프쇼는 알재단이 지난 2년 넘게 쭉 해온 "Art in Workplace" 프로그램인 만큼 직장인들과 은행 손님들에게 현대미술을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미술이 직장 환경에 주는 positive한 힘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읍니다. 더 나아가서는 현대 미술은 꼭 화랑이나 뮤지엄에서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함께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으면 해요.
-미술이 테라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정향: 미술은 다양한 것을 줄 수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작품세계에 따라 테라피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킬 수도 있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써서 각자 자기가 얘기하고자하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거죠. 미술의 방향이 다양하지만 제 작품은 테라피가 될 수 있으면 해요. 작품을 봤을 때 편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으면 해요. 뉴욕대학병원 작품 설치 후 환자들이 와서 작품이 자신을 cheer up하게 해준다고 고마워했을 때 공공미술은 이런 힘과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이유
김정향: 좋아하는 작가는 나이가 바뀌면서 달라져요. 중,고등학교 땐 세잔느를, 대학교 땐 칸딘스키, 대학원땐 도날드 져드와 솔 르위트. 그 이후론 지오토, 모네, 쇠라, 피카비아. 요즘 MoMA에서 하는 피카비아전을 보며 종행무진 새로운 것을 탐구했던 작품들을 보며 완성도보단 도전을 최고로 했던 피카비아의 세계가 그리 쉽지않은 길이란걸 느꼈어요. 어느 작가든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일생 작품에 몰두한 작가들은 모두 존경하고 그의 작품의 진가를 이해하려하죠.
업스테이트 뉴욕 컬럼버스카운티 저먼타운, 김정향씨 스튜디오의 미완성 작품들.
화가로서 천국같은 저먼타운
-'달우(達優, Daru) '라는 호는 어떻게 짓게 되셨나요?
김정향: 뉴욕에 온지 34년이 되고, 작가로서 활동을 해오면서 이제 어려운 이름이 아닌 많은 분들이 기억하기 쉽고 발음하기 쉬운 호를 갖고 싶어서 아는 분이 지어주셨어요.
-불교신자이신지요?
김정향: 자랄 때 집안은 불교였지만 저는 무교에요.
-어떻게 저먼타운으로 이주하게 되셨는지요?
김정향: 저먼타운은 딸을 낳기 전에 전원생활을 하면서 작품도 하고, 애기도 기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간 거였는데 사실 전원생활도 애 기르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지금은 화가로서는 천국같은 곳이예요.
-화가로서 저먼타운의 전원적 삶을 예찬해주신다면.
김정향: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을 보면, 교향곡이 들리고 땅의 숨소리, 바람의 살랑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죠. 작가로 이렇게 산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행운으로 느끼게 만들어 주는 곳이기도 해요. 매일매일 새로운 기운을 받는 것 같아요. 순간에 몰두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기도 해요.
-이제까지 삶에서 고비가 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김정향: 삶의 고비는 많았죠. 작가로서의 회의, 애 키우며 나의 쪼개지는 시간과 공간들에 안절부절 못했어요. 작가로서의 회의는 회의가 될수록 작업실에 돌아가서 옛날 작품도 보고, 책도 읽고 그리고 정리하면서 무조건 작업을 하다 보면 뭔가 보이기 시작해요. 제가 읽은 책중에 "The Artist's Way: A Spiritual Path to Higher Creativity"에서 하루에 무조건 3 페이지의 일기를 쓰라는 게 있어요. 제일 힘들 때 아침에 일어나서 3 페이지 꼬박 매일매일 2년동안 썼다가 나중에 다 태워버렸어요. 일종의 "exorcism"이라 해야겠죠. 그안에 실망, 분노, 의지, 희망 그리고 새로운 힘이 다 들어 있는거죠.
-후회가 있으시다면?
김정향: 후회는 안하려해요. 이미 과거이기때문에… 이런 마음가짐은 자연에서 배우는 거 같아요. 똑같은 순간은 없기 때문에 후회하는 순간, 현재에 최선을 다 할 수 없게 되는 거죠.
Jung Hyang Kim, 꽃수레/Wheel of Bloom, One panel of series of 7 panels, 38" x 76", faceted glass, 2007, Crescent Station, Brooklyn (Subway J&Z)
-뉴욕 정착 40주년을 맞은 계획은?
김정향: 40주년을 맞아 앞으론 더 제 작품세계로 빠져들면서 더 밝은 에너지를 추구하고 싶어요. 제가 만들어낸 2차원의 평면 작업들이 사유의 공간에서 관객에게 시적 공간으로 체험되기를 바라며, 저의 작품을 감상하시면서 밝고, 화사하며 리드미컬한 세계로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뉴욕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레스토랑, 카페, 뮤지엄, 공원은?
김정향: 뮤지엄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뉴 뮤지엄, 최근엔 휘트니, 공원은 브루클린 워터 프론트와 영화 'The Way We Were(*추억: 로버트 레드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을 생각하게 되는 플라자 호텔 앞입니다. 식당은 Blue River Grill, Jean Georges, Little Owl, Gotham Grill, 초당골 등. 뉴욕의 음식문화는 정말 다양해서 좋아요. http://www.daru-junghyangkim.com
김정향씨의 작품은 프랑스 세기의 빈티지로 불리우는 2010년산 보르도 2종(샤토 레이데 발랭탕 생떼밀리옹 그랑 크뤼 & 샤토 드 발로아 뽀메롤)의 레이블에 사용됐다.
- 김정향,
- 달우,
- JungHyangKim,
Best wishes, always! So proud of you as one of our Ewha Highschool Alumnae. Cheers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