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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스테파니 S. 리: 해피 발렌타인
흔들리며 피는 꽃 (23) 나에게 주는 선물
해피 발렌타인
Cabinet of Desire II, 2016, Stephanie S. Lee, Natural mineral pigment &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48˝ (H) x 25˝ (W) x 2˝ (D) each
딸아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무려 31명분의 발렌타인 선물을 만들었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인데 왜들 이리 법석을 떠나… 한때는 나에게도 들뜨는 날이었을텐데, 아이 엄마에게 발렌타인이란 이렇게 오기도 전에 피곤한 날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만사 제쳐두고 저녁 늦게까지 딸아이와 앉아 만든 31개의 초코과자를 혹 빠뜨릴새라 아이 책가방 안에 꼭꼭 싸서 등교시켜 놓고나니 큰 숙제를 한것 마냥 속이 다 후련하다.
그래도 왠지 그냥 넘어가긴 아쉬운가 싶어 아침을 먹으며 '남의 편'에게 ‘오늘 저녁은 집 앞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서 먹을까?’ 물어보니 두말도 않고 ‘싫어!’ 한다. 그럼 그렇지… 남은 토스트와 계란을 꾸역꾸역 챙겨먹고 맨하탄으로 수업을 들으러 간다. 점심도 거르고 알아먹지 못하는 컴퓨터 용어들을 잔뜩 듣고 나니 허기가 져 어질어질한데 운전하고 들어오는 길은 언제나 처럼 꽉 막힌다. 발렌타인은 무슨 발렌타인. 어서 가서 애나 픽업해야 겠다. 오늘 저녁은 또 어떻게 때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침에 계란이 다 떨어진게 생각나 장이나 먼저 봐야겠다 생각하고 마켓으로 차를 돌린다.
장보러 들어가는 길에 화장품 가게가 있기에 그래도 허전해 뭐라도 사주자 싶어 남의 편이 쓸 코팩과 딸아이의 휴대용 손소독제를 몇개 샀다. '혹시 포장가능할까요'하고 미안스레 물어봤는데, 작은 걸 샀는데도 포장을 그럴싸하게 해주셔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왕 선물까지 산거 케잌도 하나 사서 기분내자 싶어 빵가게에 들어가니 빵집옆 코너에 붙어있는 서점에 놓인 신간들이 몹시 유혹적이다.
일상에 쫓겨 마지막으로 느긋하게 앉아 책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인데다, 집에도 사다 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잔뜩있건만 여전히 새 책만보면 욕심이 난다. 신간 코너에서 한참을 이책 저책 훔쳐보다 에라 모르겠다 케잌 대신 나도 스스로에게 발렌타인 선물을 주자, 핑계를 대며 표지마저 이쁜 새 책 두권을 샀다.
잠시나마 일상을 초월해 어쩐지 문화인이 된 것 같았는데 책방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금방 ‘계란, 깨소금, 당근…’ 을 읊조리며 일상으로 점프해 내려온다. 예전에는 이런 극과 극의 상황이 못견디게 싫었는데 이제는 이런 간극에 꽤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금새 아줌마 모드로 돌아온다. 그림을 그리다가 아이가 부르면 뛰어가고, 숙제를 하다가 가스불 끄러 내려가고… 피할 수 없다면 엄마로, 화가로, 아내로, 예술가로… 스위치를 최대한 빨리 바꾸는게 살길이다.
몇시나 되었나, 책방에서 시간을 너무 보내 아이 픽업시간에 늦는건 아닌가 싶어 전화기를 꺼내보니 남의편에게서 아침에 말했던 식당에 예약을 해 놨다고 문자가 와 있다. 아마 아침엔 몰랐는데 뒤늦게 아차 했나보다. 시장은 간단히 보고 얼른 들어가야지 겠다. 그래 , ‘해피 발렌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