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박물관(MOFAD) 중국인 이민사에서 찹 수이, 포춘 쿠키, 테이크아웃 박스까지
차이니즈 아메리칸 잔혹 이민사와...미국 중화요리의 모든 것
CHOW: Making the Chinese American Restaurant
@MOFAD (The Museum of Food and Drink), Brooklyn
MOFAD의 CHOW 전시 입구엔 7250개의 테이크아웃 박스로 만들어진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포토 챈스!
'세계 음식의 메카' '유행 음식의 1번지' 뉴욕에도 마침내 음식뮤지엄이 생겼다. 2015년 10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오픈한 음식박물관(MOFAD, Museum of Food and Drink)은 아담한 크기지만, 눈과 코, 그리고 입맛까지 체험할 수 있는 리틀 뮤지엄이다.
지난해 11월 2일 시작된 중국 음식 역사 특별전 '음식: 차이니즈아메리칸 식당 만들기(CHOW: Making the Chinese American Restaurant)'는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사의 뒤안길에 조명을 비추며 애잔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황금광 시대, 노다지(No Touch!)를 찾아 태평양을 건너왔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곧 백인들로부터 혐오대상이 된다. 그리고, 1882년엔 '중국인 배척법'이라는 이민 특별법을 탄생시켰다. 일본인들 또한, 진주만 공격 후 격리수용됐던 눈물의 이민사가 있었다.
1910년부터 2016년까지 중식당 메뉴 컬렉션. 차이니즈아메리칸 이민사와 중화요리의 진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MOFAD의 특별전 'CHOW: Making the Chinese American Restaurant'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170년 이민사를 통해 중화요리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7천250개의 테이크아웃 박스로 만들어진 커튼을 지나면, 중국인 이민 역사를 설명하는 패널 사이로 역사를 플래시백한다. 찹 수이(Chop Suey)로 대표되는 중화요리의 보급과정, 중국식당의 메뉴 컬렉션, 웍 등 전시를 감상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포춘쿠키 제작 공정을 보며, 컨베이어 벨트로 나오는 포춘 쿠키를 (무제한으로) 맛보며 자신의 운세를 확인한다. 한켠의 오픈 키친 카운터에서는 그날의 중국 메뉴를 시식하며 요리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미각 뿐 아니라 후각도 맛의 기본이다. 향미를 각자 합성할 수 있는 실험소.
중화요리 특별전 외에도 커피와 각종 맛을 냄새로 분석, 합성해보는 랩까지 후각을 자극시키는 교육적이며, 흥미진진한 뮤지엄이다. 유니온스퀘어에서 윌리엄스버그 방향 L트레인을 타고, 브루클린 첫 정거장 베드포드 애브뉴에서 약 10분 정도 매카렌 파크 쪽으로 걷는다. http://www.mofad.org/hours-directions
EAT, DRINK, CHINESE, AMERICAN
CHOW: Making the Chinese American Restaurant
1849-1882년 사이 본토의 중국인들은 경제난과 기근, 정치 갈등에 시달리다가 '기회의 땅'을 찾아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Gold Rush)' 붐을 타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어 '금산(Gold Mountain)'으로 불리웠다. 중국인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금광 인부로 돈을 벌었다.
1851년 미국에 중국 이민자는 2만5천여명에 달했다. 이듬해엔 2만여명이 더 입국했다. 1880년, 중국계 미국인은 10만명에 달한다. 대부분은 바다에 가까운 광동지역에서 이민왔다. 언어가 통하는 중국인들끼리 몰려 살았고, 첫 차이나타운이 생긴다.
1853년 금광에서 인부들
From a daguerreotype attributed to Joseph B. Starkweather Photo: California State Library
하지만, 1850년대말 백인 광산업자들로부터 차별받게 된다. 백인들은 생김새가 다르고,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아가는 중국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품었다. 그러자, 중국인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바로, 철도 인부였다. 중국인들은 1776마일에 달하는 첫 대륙횡단 철도 건설에 투입된다.
1869년 철도가 완공된 후 중국인 노동자들은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이에 시가 공장, 세탁소, 청과물상회, 농장과 생선가게 등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중국식당 사업이었다. 1849년, 샌프란시스코에 첫 중식당 'Canton Restaurant'이 오픈했고, 1년 후엔 4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1952년엔 7개가 영업하고 있었다.
1882년 반중국 무드를 보여주는 풍자만화.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자유의 골든 게이트' 옆에 "공산주의자, 염세주의자 사회주의자, 페니언 단원, 그리고 불량배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중국남자는 불허합니다"라는 공고가 붙어있다.
그런데, 1882년 미국은 중국인 차별정책을 공식적으로 시작한다. 이유는 1870년대부터 미 경제가 기울면서 전국에서 중국인 혐오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금이 고갈되고,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되는 중국인을 폭행했고, 중국이 미국 경제를 망쳤다고 비난했다. 백인 마피아들은 캘리포니아는 물론, 아이다호, 와이오밍, 워싱턴, 콜로라도주 등 각지에서 중국인들을 공격했다. 폭행, 살인에 집단학살도 비일비재했다.
1882년 미국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미 역사상 최초로 자유이민을 제한하고, 인종별 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서명한다. 이로 인해 중국인 이민자 인구는 급감했다. 1890년 10만7488명에서 30년 후인 1920년엔 6만1639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이 법률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야 중국이 일본에 대항해 미국의 연합국이 되면서 폐지된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이민에서 배척되면서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도 제한됐다. 이 때문에 많은 중국계 이민자들이 본토의 가족들과 단절되었고, 자체 생존을 모색하기위해 장벽으로 '차이나타운'을 쌓았다는 설도 있다. 중국인 사업가들은 폭력이 만연한 서부를 떠나 동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곳에 정착해서 식당을 열어 미국인들을 상대로 중국음식을 제공한다. 1903년엔 위스콘신의 깊은 오쉬코쉬까지 중국식당이 들어갔다.
1906년 4월 18일 북부 캘리포니아 대지진으로 화재가 발생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이 초토화된다. 미 전역의 중국인들은 화재로 가족이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서류상 가족(paper family)'이 탄생하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이 대거 입국하게 된다. 1920년부터 20년간 무려 7만1040명의 중국인이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서류상 가족은 이후 미국에 지속적으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중국인 배척법으로 일반 노동자들은 이민할 수 없었어도, 상인(merchant), 학생, 교사, 외교관에게는 특별 비자가 주어졌다. 1916년 연방법원은 식당업도 상인비자의 사업 명단에 추가하게 된다. 그러자 미국내 중국식당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제 2차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중국이 우방이 된 후 중국 배척법을 철폐됐다. 그리고, 중국 식당은 도처로 퍼진다. 마침내 수퍼마켓에서도 인스턴트 찹 수이와 초우 멘 패키지를 팔게 된다.
MOFAD의 전시 셰프 윌슨 정(Wilson Chung)이 Beef & Black Pepper Dumpling과 유초이(Yu Choy)를 시연하고 있다.
하지만, 1949년 모택동의 공산당이 집권하고, 미소 냉전 기간 중 미국과 '중공' 사이도 냉각된다.
한편, 미국에서 반차별법으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직장, 주택, 교육 기회가 균등하게 열린다. 일자리가 증가하면서 차이니즈 아메리칸 음식의 지평도 넓어진다. 그리고, 식당들이 고급화되면서 찹수이 대신 중국 지방병 토속음식을 메뉴에 올리게 된다.
2013 제임스비어드재단상 시상식에서 세실리아 치앙 여사. Photo: Sukie Park
이후 부상한 셰프가 조이스 첸(Joyce Chen)이다. 보스턴/캠브리지에 4개의 식당을 열고, 요리책을 내면서 중국 북부요리와 상해요리를 보급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 레스토랑 만다린(Madarin)을 열고 베이징, 후난, 시추안 요리를 제공한 세실리아 치앙(Cecilia Chiang)이다. 두 여걸은 레스토랑과 요리책을 통해 지방 중화요리를 미국에 전파시킨 인물들이다. 세실리아 치앙 여사(97세)는 2013년 제임스비어드상(James Beard Foundation Awards)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1972년 닉슨이 핑퐁 외교로 죽의 장막을 걷으며,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북경 오리(Peking Duck)의 훌륭한 세일즈맨이 된다.
지금 뉴욕은 럭셔리 콘도 개발 붐과 렌트 상승으로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들을 위시하여 명물 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도 옷장 사이즈의 허름한 차이니즈 테이크아웃 식당들은 오히려 건재하다. 싸고, 칼로리가 많고, 빠른 중국 테이크아웃 식당은 불황을 모르는듯 하다. 오늘날 미국 내 중식당의 수는 5만여개소에 이른다.
그러면, 한국의 짜장면과 탕수육처럼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진화한 중화요리는? 찹 수이(Chop Suey), 제너럴 초우 치킨, 궁보치킨, 에그드롭 수프, 부다즈 딜라이트, 해피 패밀리, 브로콜리 비프 등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차이니즈 아메리칸 중화요리에 관해 알아야할 세가지 스토리
#1 찹 수이(Chop Suey)
오 헨리의 단편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그리고 루이 암스트랑의 곡에도 등장한 찹 수이는 차이니즈 아메리칸 요리 제 1호다. 광동의 카이샨 출신 이민자들이 개발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청경채 등 야채에 고기, 버섯, 죽순 등에 전분을 넣어 볶은 잡탕 요리. 1900년 뉴욕타임스가 "찹 수이에 열광한 도시"라고 보도한 후 중국 식당들이 찹 수이를 광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3년 맨해튼 14스트릿에서 45스트릿 사이, 바워리스트릿에서 8애브뉴까지 찹 수이 식당이 100여개 이상 영업하게 된다.
Edward Hopper, Chop Suey, 1929, Oil on canvas
#2 포춘 쿠키 (Fortune Cookie)
중식당에서 식사 후엔 운세가 적힌 포춘 쿠키가 나온다. 사실 포춘 쿠키는 일본의 '추지우라 센베이(행운의 쿠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91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인 이민자 모토코 하기와라가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1916년 LA의 홍콩국수 공장에서 중국계 이민자 데이빗 정이 발명해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공사 중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안 중식당 라 신(La Chine)의 포춘 쿠키
포춘쿠키는 1920년대 중국 식당 메뉴에 포춘 티 케이크(fortune tea cake)으로 등장했다. 일본계 이민자들이 생산해서 중국인들에게 팔다가 진주만 공습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일본인 격리 수용되기 시작한다. 이때를 틈타 포춘쿠키 사업은 중국계로 넘어간다. 1950년대 말 미국인들은 연간 2억5천만개 소비했으며, 해마다 포춘 쿠키는 30억개 생산된다고. 세계 최대의 생산자는 브루클린 부쉬윅의 완톤 푸드(Wonton Food Inc.)라고.
#3 테이크아웃 박스 Takeout Box
시카고의 미국인 프레데릭 윅스 윌콕스(Frederick Weeks Wilcox)가 일본의 종이접기(오리가미)에서 착안해 발명한 식품포장용 종이 박스. 1894년 '종이 빠께스(Paper Pail)'로 특허권을 냈다. 방수처리된 용기에 철사 손잡이는 생굴을 운반하는데 유용했다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테이크아웃이 흔해지면서 중국식당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됐다. 1970년대 'Fold-Pak'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빨간색 탑과 'Thank You'를 추가했다.
Museum of Food and Drink
62 Bayard St. Brooklyn, NY http://www.mofad.org
개관 시간: 금요일-일요일 정오-오후 6시.
티켓: $14(18세 이상), $10(학생, 노인, 저소득층, 군가족), $7(6-17세), 무료(5세 이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안 중식당 라 신(La Chine)
*런던 발 뉴욕 상륙 고급 중식당 하카산(Hakka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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