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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
2017.06.01 12:05

(272) 이영주: 남루함 속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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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촌뜨기의 일기 (44): 뉴저지 촌뜨기 일기 (1)


남루함 속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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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서울, 1956-1963 © 한영수문화재단


저지에 살고 있지만 사실 뉴저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딸들 연주가 있던 몇 도시, 아니면 시민권 때문에 갔던 뉴왁 정도입니다. 유럽이며 아프리카, 남미, 북구 등 제법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미국 국내 여행을 한 적이 많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뉴저지 촌뜨기로서 요즘 제가 겨은 뉴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한국 사진작가 한영수(1933~1999)의 개인전 ‘한영수: 사진으로 본 서울, 1956~63’(2월 24일~6월 9일)'이 열리고 있는 저지시티, ICP의 마나 컨템포러리 전시장에 다녀왔습니다. 큰딸이 엄마가 봐야 할 전시회라기에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사진작가 친구가 시간을 내줘서 함께 갔습니다. 뉴욕 국제사진센터(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www.icp.org)는 전 세계 사진작가들의 구심점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명성 높은 사진기자이자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한 로버트 카파(1913~1954)의 동생으로 역시 사진작가였던 코넬 카파(1918~2008)가 형을 기리며 1974년 설립했습니다.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 인근에서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 바워리(Bowery)가의 뉴 뮤지엄(New Museum) 맞은편에 ICP 미술관을 옮긴 것은 2014년입니다. 


한영수 사진전은 6층에 있는 전시장에 38점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낯익은 모습의 사진을 때문에 보자마자 앗, 이게 뭐지? 한 방 맞은 것처럼, 아니 타임 캡슐을 타고 그 시대 속으로 이동되었습니다. 바지 뒤춤에 막대기 저울을 꽂고 손에는 넓적한 가위를 들고 리어카를 끌고 있는 엿장수 모습, 한강 백사장의 환상적인 예술적 사진, 한 때 유행의 산실이었던 명동의 송옥 백화점, 명동거리를 지나는 모피 코트 입은 모던 여성의 당당한 자태, 명동 입구 좁은 골목길에 있던 철 지난 외국잡지 책방,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 등신대 배우 그림으로 치장된 광화문의 아카데미 극장, 애들과 말타기 하는 모습 등등.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제가, 아니 우리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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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만화', 서울 장충단공원, 1960/ 한영수, 말타기, 1957 ©한영수문화재단



동네에 엿장수 리어카가 뜨면 집집마다 아이들은 구멍 난 냄비며 헌 숟가락까지 들고 나와 엿과 바꿔 먹었습니다. 리어카 좌판엔 엿이 있지만 밑에는 모아진 찌그러진 양은그릇들 한 쪽에 커다란 강냉이 자루도 있어서 아이들이 자기 기호대로 엿이나 강냉이를 바꿔 먹던 그 꿀 재미. 엿 먹는 동무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멀쩡한 양은냄비를 주고 엿을 바꿔 먹었다가 엄마한테 혼났던 이야기는 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만화책은 정말 인기였습니다. 저는 취향은 권선징악적인 스토리 였습니다.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정의의 사도인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마침내 무찌르는 이야기는 사이다처럼 속을 뻥-뚫어주었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드리 헵번을 좋아해서 명동 그 좁은 골목 헌 잡지 책 파는 곳에 가서 오드리 헵번 얼굴이 나온 잡지는 무조건 사 모았던 추억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친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좋아해서 그녀의 얼굴 잡지만 모았습니다. 현재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노후를 보내는 일본의 미찌코 왕비를 처음 본 것도 이곳서 파는 일본 주부생활 잡지를 통해서 였습니다. 둥근 모자를 쓰고, 귀족적 미모에 테니스를 즐기는 미찌코 여사의 젊은 모습은 찬란했고, 평민이 황태자비가 된다는 사실은 꿈 많던 우리 소녀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광화문 아카데미 극장은 청춘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외국영화를 두 편씩 상영하던 외화 전문관 시절부터 개봉관으로 탈바꿈해 한창 인기정상인 신성일, 엄앵란 콤비의 영화를 줄줄이 상영할 때까지 청춘들은 아카데미 극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사진은 1956년에서부터 1963년까지의 서울이라는데, 전쟁 후의 서울 모습이 남루하거나 비관적이지 않고, 왠지 살아있는 느낌, 생활의 따뜻함들이 오롯이 솟아났습니다. 사진에 문외한인 제 눈에도 그가 보여주는 앵글이 얼마나 독특하고 세련돼 보이는지 문화비평가 이영준이 그의 사진을 두고 “그는 서울을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보여주었다. 50~60년대 한국의 곤궁했던 현실을 넘어섰다는 의미에서, 그의 사진은 초현실적이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공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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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서울, 송옥양복점, 1956-1963/ 한영수, 서울 을지로1가 (구)반도호텔,1956-1963 © 한영수문화재단 


진작가로서의 한영수의 차별 점은 그의 사진에는 정신과 영혼이 있는 점입니다. 그는 대상을 놓고 정물화처럼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기다리면서, 찰나적 일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발굴해냈습니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하고, 명동거리를 활보하던 청춘 시절의 가슴 뛰는 추억에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이유입니다. 


한영수의 사진 15점이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ICP에 영구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돈을 벌기도 하고 여가를 즐기기도 하니 이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생전의 한영수 작가가 말했듯, 작가로서의 그의 일생은 평탄했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사진 연구단체인 ‘신선회’를 조직해 사진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후, 1966년 한영수사진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 및 패션 사진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딸 한선정이 ‘한영수문화재단’을 만들어 아버지의 필름과 관련 기록을 보존하고 이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한영수 작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소녀가 아름다울 수는 없지요. 그러나 앵글의 각도에 따라 그 소녀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남루함 속에서 풍겨 나온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진입니다.”라고, 생전에 글에서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남루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삶. 그게 어디 사진 뿐이겠습니까. 글을 쓰는 저는 제 글이 비록 유려하지 못해도 그 속에 한 자락 인간다움이 있다면 성공한 글이라 믿는 제 희망사항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지시티의 ‘마나 컨템포러리’에는 처음 가봤습니다. 6층 건물인 이곳에는 갤러리와 라이브러리, 수장고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들 작업실도 층마다 줄지어 있었습니다. 뉴저지 예술의 산실을 처음 찾은 뿌듯함으로 하루 종일 가슴이 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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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아카데미극장, 태평로 서울, 1959 ©한영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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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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