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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쿠사마 88세 '생의 축제(Festival of Life)'

미니멀리즘, 팝아트, 퍼포먼스까지 삶의 와일드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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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yoi Kusama, All My Love For The Tulips, I Pray Forever@David Zwirner / Kusama in Tokyo Studio Photo: Jeremy Sutton Hibbert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88)는 지금 제프 쿤스, 아이 웨이웨이, 데미안 허스트 등 블루칩 남성 작가군에서 독보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성 작가다. 2014년 세계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생존 화가는 바로 야요이 쿠사마였다. 201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작, 리오데자네이로, 사웅파울로 브라질리아, 그리고 멕시코시티까지 순회 전시된 야요이 쿠사마의 회고전 '무한한 강박관념(Infinite Obsession)'은 무려 2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이끈 블록버스터 전시였다. 


2012년 휘트니뮤지엄에서 회고전을 열었던 야요이 쿠사마는 지금 도쿄의 정신병원에서 작업하고 있다. 쿠사마가 뉴욕에 컴백했다. 첼시의 데이빗 즈워너(David Zwirner) 갤러리에서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 전시 '생의 축제(Festival of Life)'가 11월 2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열린다. 대기 시간이 2시간에 달할 정도로 인파가 몰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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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첼시 19스트릿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 블럭에 쿠사마 전시를 보기 위해 줄서 있는 사람들. 최대 4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쿠사마는 1957년부터 1973년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15년간 뉴욕에 살면서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여전사였다.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도날드 저드, 클레스 올덴버그, 오노 요코 등과 당대에 활동하며 팝아트, 미니멀리즘, 페미니즘 미술까지 두루 '이즘'을 섭렵한 작가다. 

 

1977년 도쿄의의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해 살아오면서도 작업실에서 주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역 미술가. 사실, 쿠사마는 한동안 서양 위주,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미술 세계에서 소외되고, 잊혀졌던 인물이었으나, 2012년 휘트니뮤지엄 회고전 이후 글로벌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루이스 부르주아(프랑스)나 에바 헤세(독일)처럼 유럽 출신이 아닌 쿠사마는 자그마하지만, 도발적인 아시안 여성이었다.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부인인 전위예술가 요꼬 오노(Yoko Ono)처럼 난해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이미지로 유희적인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야요이 쿠사마를 다시 본다.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삶과 꿈 사이에서

                                                                                         

미술은 쿠사마의 치유이자 생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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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yoi Kusama, My Eternal Soul paintings@David Zwirner

 

▶출생: 1929년 3월 22일 나가노현의 마츠모토에서 씨앗 도매사업을 하는 중산층의 5남매중 네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일본어로 草間 彌生.

 

▶어머니의 학대: 사업가 아버지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쿠사마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자랐다고 전해진다. 열살 무렵 물방울과 그물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인 모습을 점박이로 땡땡 칠해서 가리곤 했다. 


▶정신착란 증세: 자서전에 따르면, 어릴 적 쿠사마는 종종 착란 증세와 강박관념, 그리고 때때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어느 날 제비꽃밭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꽃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식탁보의 빨간 꽃이 수십개로 불어나서 식탁 밖, 벽으로, 천장으로 팽창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일본화에 염증: 쿠사마는 1948년 교토로 가서 일본화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너무나 전통적인 화법과 도제 체계에 거부감을 느낀 후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다. 1950년대 마츠모토와 도쿄에서 전시회를 연 후 이윽고 해외로 갈 결심을 한다.

 

▶프랑스 대통령에게 편지: 처음 고개를 돌린 곳은 파리였다. 쿠사마는 르데 코티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저는 당신의 나라를 보고 싶어요, 프랑스요.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코티 대통령은 “고맙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상의해보라”고 답장해왔다. 하지만, 쿠사마는 불어에 장벽을 느끼고 포기한다. 

 


7.jpg 1957년 뉴욕에 온 야요이 쿠사마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 영어가 더 쉬웠으니, 목표는 뉴욕이었다. 이번엔 중고책방 미술서적에서 본 오키프가 들어왔다. 오키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화가였다. 쿠사마는 6시간 기차를 타고 도쿄의 미국대사관으로 찾아가 인명사전에서 Georgia O’Keefee의 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화가로서 조언을 구합니다’.

 

당시 남편인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를 잃은 오키프는 친절하게도 답장을 보내왔다. “이 나라에서 화가로서 먹고사는 것은 힘들다…하지만...”  오키프의  편지 한장이 스폰서가 되어 쿠사마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시애틀을 거쳐 드디어 뉴욕에 왔다. 1957년, 그녀 나이 스물일곱살이었다. 그로부터 55년 후 쿠사마는 자신의 은인인 오키프의 그림이 걸린 휘트니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뉴욕 미술을 흡수하다: 뉴욕에 정착한 후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대형 회화를 그리다가 천을 이용한 부드러운 조각으로 옮겨갔다. 이후 거울과 전등을 사용한 환경 조각을 선보였다. 쿠사마는 1960년대 초 앤디 워홀, 클라에스 올덴버그, 조지 시걸 등과 나란히 전시를 하면서 팝아트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60년대 후반엔 바디페인팅 페스티벌 등 해프닝과 패션쇼, 반전 시위에도 가담한다. 또한 영화를 제작하는가 하면, 신문도 발행했다.

 

▶뉴욕 데뷔 개인전: 1959년 뉴욕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호평을 쓴 이는 화가 도날드 저드. 그 전시회에 나온 작품을 저드와 프랭크 스텔라가 구입해갔다. 저드가 소장했던 ‘무한의 그물 2(Infinity Net, No. 2)’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510만 달러에 팔리며, 쿠사마를 생존 여성화가 중 가장 비싼 작가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무한의 그물'은 2011년 쿠사마 자서전의 제목이 됐다. 

 

▶‘무한의 그물(Infinity Nets, 1959): 가로 30피트의 대형 회화엔 그물과 점 모양으로 환각 상태를 표현한다. ‘무한의 그물’ 시리즈로 쿠사마는 잭슨 폴락, 마크 로츠코, 바넷 뉴만 등 당대 유명 화가들과 어깨를 겨누었다. 하지만, 뉴욕을 떠난 후 쿠사마는 1980년대 후반까지 ‘잊혀진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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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기법을 따른 쿠사마의 '무한의 그물' 시리즈(디테일)로 당대 잭슨 폴락, 재스퍼 존스 등과 그룹전을 열었다. SP 


   

▶해프닝의 리더: 뉴욕에서 아방 가르드 운동에 가담한 쿠사마는 도발적인 해프닝으로 금방 리더가 된다. 1961년 도날드 저드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작업실을 옮긴다. 친구가 된 헤세는 1970년 서른네살에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남근 조각: 성 혁명이 대세였던 미국의 1960년대, 쿠사마는 남근 모티프로 사다리, 구두와 의자 등을 감싸는 부드러운 조각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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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휘트니뮤지엄 회고전에 전시된 남근 조각들.


 

▶거울 방: 1963년부터는 거울이 설치된 방에 네온색깔의 전구를 설치해 무한대의 우주에 있는듯한 환상을 주는 ‘거울/무한(Mirror/infinity)’ 시리즈를 시작했다.   


▶패션 비즈니스: 쿠사마가 패션에 손을 댄 것은 1968년 뉴욕에서다. 그는 쿠사마패션컴퍼니를 세우고 전위적인 패션을 디자인해 블루밍데일 백화점의 ‘쿠사마 코너’에 팔기 시작했다.

  

▶바디 랭귀지: 1960년대 후반 히피 운동이 떠오르면서 쿠사마는 나체족들이 등장하는 ‘몸 축제(body festival)’를 열고, 몸에 컬러풀한 물방울을 그리면서 주목을 끌었다. 

 


“물방울 무늬는 우주와 우리 삶의 에너지의 상징인 태양의 형태다. 또한, 고요한 달의 형태이기도 하다. 

둥글고, 부드럽고, 컬러풀하고, 무의미하고, 미지의 물방울 무늬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무한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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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yoi Kusama, All My Love For The Tulips, I Pray Forever@David Zwirner

  


▶왕성한 작업: 60년대 후반 조셉 코넬, 도날드 저드와 친하게 지낸 쿠사마는 과로 때문에 종종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이에 조지아 오키프는 자신의 아트딜러에게 쿠사마의 작품을 몇 점 구입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닉슨에게도 편지를: 쿠사마는 센트럴파크, 브루클린브리지 등지에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월남전 반대 시위를 했다. 또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을 끝낸다면, 그와 섹스를 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누드, 누드, 누드: 1967-69년 벌거벗은 이들에게 물방울 무늬 바디 페인팅으로 성적인 행위를 묘사하는 해프닝에 집중했다. 1969년 MoMA 조각정원에서 연 ‘죽은 자를 깨우는 그랜드 그룹 섹스(Grand Orgy to Awaken the Dead)’ 퍼포먼스는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다운타운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식(Homosexual Wedding at the Church of Self-Obliteration)’ 해프닝도 벌이면서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하면, 누드 작업실과 동성애자 소셜클럽 ‘Kusama Omophile Kompany’를 오픈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966년 쿠사마는 제 33회 비엔날레에서 거울공 설치작 ‘자아도취 정원(Narcissus Garden)’을 소개한다. 황금 기모노 차림의 쿠사마는 관람객들에게 거울공을 2달러에 팔다가 비엔날레 측에 의해 중단됐다. 그러나, 쿠사마는 자신의 작품을 머천다이징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평가된다. 그만큼 쿠사마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실험영화: 1968년 자신이 주연하고 제작한 ‘자기 망각(Self-Obliteration)’은 벨기에 국제실험영화제와 메릴랜드영화제, 앤아버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유일한 사랑: 쿠사마는 뉴욕에서 조각가 조셉 코넬과 10여년간 동거했다. 하지만, 성관계 없는 플래토닉 러브를 지속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16.jpg 야요이 쿠사마


“내가 정신병원에서 사는 것은 내가 아프기 때문이다. 혼자 있기 힘들다. 난 사람들 사이에서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병원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난 환각 증세가 있다. 주변에서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에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 


 

▶정신병원으로: 1973년 건강이 쇠약해진 쿠사마는 일본으로 귀국, 보수적인 미술계 분위기를 느끼고 아트딜러가 된다. 이후 정신 이상이 생기자 1977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작가 변신: 아트 딜러로 일하면서 단편과 소설, 시를 발표해온 쿠사마는 소설 ‘크리스토퍼스트릿의 매춘굴(The Hustlers Grotto of Christopher Street)’로 일본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다.

  

▶유럽 개인전: 1986년 프랑스 돌(Dole)의 시미술관에서, 3년 후엔 칼레의 ‘뮤제데보자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93년 옥스포드의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영화 배우: 1991년 쿠사마는 무라카미 류 감독의 ‘도쿄 데카당스’에 주연을 맡았으며, 93년엔 요코하마의 설치작에서 영국의 뮤지션 피터 가브리엘과 함께 작업했다.   


▶호박 설치작: 1993년 제 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거울로 장식된 방에 작은 호박이 있는 설치작에서 검은 무늬가 있는 대형 호박 조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호박은 쿠사마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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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의 허쉬혼뮤지엄 정원에 설치된 '호박(Pumkin, 2016)'.   

  

▶옥외 조각: 쿠사마가 옥외 조각을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후쿠오카겐코센터를 비롯, 후쿠오카시미술관, 나오시마의 분카무라(사진), 마츠모토시미술관, 비버리힐즈 비버리가든파크, 안양의 평화공원 등지에도 조각이 설치됐다.

 

▶회고전 재조명: 1996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다시 시작, 2년 후엔 LA카운티뮤지엄, 뉴욕 MoMA와 미네소타의 워커아트센터, 도쿄의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실존: 2000년대 설치작 ‘난 여기에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니예요(I'm Here, but Nothing, 2000–2008)’에선 물방울 무늬로 도배한 방이 등장한다. 

 

▶기록영화: 2008년 다큐멘터리 ‘야요이 쿠사마, 난 나 자신을 사랑한다(Yayoi Kusama, I adore myself)’가 나왔다. 

 

▶경매: 2008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쿠사마의 작품 ‘무한의 그물’이 510만 달러에 팔리며 생존 여성작가로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유명화가 도날드 저드가 소장했던 작품이라 더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패션 컴백: 2009년 쿠사마는 셀폰 모양의 핸드백, 셀폰용 개 모양 홀더를 디자인했다. 2011년엔 랑콤 화장품과 한정판 립글로스를 냈고, 마크 제이콥스와 루이뷔통 라인을 디자인했다.  

 

▶수상: 2000년 일본 교육부의 예술공헌상, 2002년 프랑스 정부의 문화예술공헌훈장을 받았다. 2006년 국가평생공로상 수상. 



delfini2-small.jpg *야요이 쿠사마 '생의 축제'@데이빗 즈워너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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