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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스테파니 S. 리: 그녀의 마지막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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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지막 전시
Artist Shirley Z. Piniat, at her house in Jackson Heights, NY, April 2016
지난해 4월에 열려고 준비중이던 셜리 할머니(Shirley Piniat)의 92세 기념 회고전이 무산됐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바람에 올해로 연기되었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Shirley Zina (Wohl) Piniat은 1925년 7월 13일에 태어났으며, 2017년 7월 9일 수면중 평화롭게 임종했다. John Piniat의 사랑받던 아내이자 총 23명의 조카와 조카 손녀, 증손자들에게 좋은 고모, 고모 할머니 그리고 증조 할머니였고 많은 이들의 좋은 친구였다. 그녀는 Sadie와 Max Wohl의 딸로 남자형제인 Jerome Wohl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Shirley-Zina는 교사이자 작가였으며 무엇보다 영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은 늘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했으며, 세상 곳곳을 여행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2013년에는 Shirley 혼자 쿠바로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다.
그녀는 잭슨 하이츠의 자택에서 50년이 넘는 생을 보냈으며, 마지막 날들은 포레스트힐스의 아트리아(*양로원)에서 즐거이 마무리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연극 'Alarm'에서 앨리스 역을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 Shirley는 본인이 주연을 맡은 이유가 "금발을 원했고, 내게 가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hirley-Zina 고모는 유머감각과 사회적 양심, 그리고 세상을 향한 관심과 친구와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한평생 잃지 않고 살았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모두가 그녀를 그리워 할 것이다."
Dignity Memorial의 웹사이트에 화가 셜리 할머니의 사망을 알리는 글 중 일부분이다.
Shirley’s husband, John Piniat’s portrait by Shirley(left), Shirley’s portrait by John Piniat
내가 셜리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돌아가시기 두해 전인 2016년이었다. 가끔 전시 디자인 및 설치일을 도와주는 타운홀 갤러리에서 할머니의 전시 설치를 도와줄 사람으로 나를 추천해주셨다. 처음 전시의뢰를 받았을때는 영 탐탁치가 않았다. 이메일도 못하시고 거동도 불편하시니 내가 집으로 찾아가야 하고 작품 반입과 반출도 도와드려야 하는데다, 온라인으로 소통하면 간단할 일을 일일이 전화와 우편으로 소통해야 하니 답답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서 작품들을 보기 전까진 이 나이에 무슨 전시를 하시겠다고 욕심을 부리시나, 과연 전시할 때까지 살아계실수나 있으실까 싶은 못된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준비기간 동안에 되려 할머니가 더 정확하셔서 때되면 잊지않고 전화를 주시며 젊은 사람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전시 기획에 참여 하셔서 한번 놀랐다. 그리고, 댁으로 찾아가서 할머니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처음의 귀찮았던 마음이 할머니의 일생을 정리하는 회고전을 맡게되어 영광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많은 좋은 작품들을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워 이 전시를 꼭 잘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작년 초 할머니가 골반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전시를 연기해야 한다며 요양원에서 전화하셨다. 착수금이라도 먼저 보내주겠다고 하셨을때 내심 가슴이 덜컥했었다. 노인이 되어 골반뼈가 부러지면 대부분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왠지 돈을 먼저 받으면 안좋은 일이 생길것 같아 나중에 만나서 달라며 마다하고 아무렇지 않은듯 밝은 목소리로 “내년 4월에 봐요!”하고 끊었었더랬다.
Shirley Z. Piniat’s paintings, The Nude Studies, 1955, oil on paper
할머니와 연락이 안된다며 전시장측에서 나에게 물어왔을 때까지도 ‘아직 요양원에 계셔서 연락이 안 되는 걸거야…’생각하며 인정하기 싫었는데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결국 사망자 명단에서 할머니의 이름이 나왔단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었지만,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전시준비를 해야지'하며 할머니의 전시는 늘 마음 한 구석에 잊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우려했던 마음이 사실이 되었다. 작년 여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벌써 꽤 되었다. 돌아가신 것만은 아니길 바랬는데…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으로 통화 했을 때만 해도 뼈가 부러진 사람같지 않게 음성이 카랑카랑 하신게 셜리 할머니라면 어쩌면 회복 하실 수 있겠다 싶기도 해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이제는 만날수 없는 사람이 되셨다. 다리가 아파 올라가보지도 못하던 윗층에 쌓여있던 자신의 그 많은 작품들을 결국 다시 보지도 못한 채…
사실 전화 통화는 몇번 했어도 셜리 할머니와 만난 것은 고작 두번이라 할머니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연세에 비해 굉장히 정신이 맑고 목소리에 남다른 힘이 있었다는 것, 유머감각과 따뜻한 정, 빛나던 눈 정도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할머니댁 2층에 쌓여있던 그림들은 또렷이 자꾸 생각이 난다. 할머니의 평생이 담긴 그 많던 그림들은 그렇게 먼지 속에 있다가 사라져 버렸겠지… 동생분이나 친척들 중에 그림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챙겨갔으면 좋겠는데… 아깝고 안타깝다.
요즘엔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으로 장례참관도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아직 내게는 어색하지만 먼 거리에서 오지 못하는 사람이나 나처럼 연락이 끊긴 사람을 찾아야 할 경우에는 유용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죽으면 응당 다시 무로 돌아가야하는게 자연의 이치이건만, 태우지도 못하고 일일이 쫒아가 지워버리지도 못하는 나의 사진과 내 인생을 평하는 한 단락의 글이 사후에도 인터넷의 바다를 부유하며 돌어다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냥 마음이 편치만는 않을 것 같다.
Shirley Z. Piniat’s paintings on the second floor of her house.
어쨌든 장의사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사진을 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또렷이 다시 기억난다. 할머니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보고서야 할머니한테 자식이 없었다는 것도 알았다. 냉장고에 잔뜩 붙어있던, 플로리다에 산다던 아이들의 사진들이 손녀 손자인줄 알았더니 조카손자들이었나보다. 먼저 떠난 남편의 물건들이며 침실까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다 전시 설명에 꼭 남편을 기리는 전시라고 덧붙여 달라고 하셔서 좀 특별한 커플이구나 싶었는데 아마도 둘 밖에 없으니 남편과의 관계가 더 애틋했겠구나 싶다. 같은 예술 분야에 있으면서 자유롭게 여행다니며 보낸 삶이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91세 까지면 장수하신 편이고 평화롭게 주무시다 가셨다고 써 있는걸 이렇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5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산 추억이 고스란히 있던 집에 다시 와보시지도 못하고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했지만, 요양원에 계실 때도 아파서 누워만 계신계 아니라 연극에 참여할 만큼 활동적이고 즐겁게 지내다 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니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 자에게는 아직 미련이 많다. 고심 끝에 ‘A Life in Art’라고 지으신 전시 제목처럼 한 평생 그린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본인도 한번 보고, 지인들에게도 보여주고 떠나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나마 나라도 봐줘서 누구 하나라도 봐 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준비하는 기간동안이나마 설레고 즐거우셨을 거라고 위로해보지만 예술가의 삶이라는게 이런건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처음에는 작게 그리기 시작했다가 작가의 Ego만큼이나 점점 커지는 그림들. 이런 저런 새로운 시도들을 하며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나는, 잠시 잠깐 전시장에 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포개지고 쌓여있다가 종래에는 이렇게 버려질 작품들… 그 많은 작품들이 셜리 할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상당 부분 남편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지만 본인만이 알겠지…
Shirley Z. Piniat’s paintings and her collections at her house.
반드시 유명해 질 필요도 없고, 반드시 누군가 알아줘야 하는 것 도 아닌거라고, 스스로가 열정을 바쳐 열심히 작업활동을 했다면 그것으로 예술가의 삶은 충분히 아름다운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왜 자꾸 짠한지 모르겠다. 평범하지 않았으나 평범했던 화가들이 가는 마지막 길은 참으로 아깝고, 안타깝고,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뭐 따지고 보면 다른 죽음이라고 딱히 다를 리 있을까 싶다. 어떤 죽음이건 다 안타까운 것이겠지.
사람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가 이다지도 가벼운 거였나 싶은 생각도 문득 들어 허무하기도 하다. 아마도 아직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슬픔의 깊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해 후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살아 생전에도 드문드문 왕래한데다, 어렸을 때라 죽음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살다가 문득문득 스치듯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저 하늘에서 잘 계시리라 믿고 빌어드리기에 몹시 슬프거나 하지는 않다. 어쨌든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있음에 익숙해져서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지에만 집중하던 우리에게 어떻게 잘 죽어야 하는 건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셜리 할머니가 전시를 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해서 그 끝이 딱히 해피 엔딩이 되었을까 싶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아쉽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순전히 남아있는 사람의 착각일런지는 모르나 그래도 누군가 한사람이라도 더 봐 줄 때 의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2018년 봄에 예정되었던, 혼자 보기 아까운 셜리 할머니의 작품들을 이렇게나마 공유해본다. 이럴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제대로 찍어둘 걸 그랬다. 전화기에 저장된 셜리 할머니의 연락처는 한동안 지우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조금 더 오래 아쉬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