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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최초의 수퍼모델


'아메리칸 비너스' 오드리 먼슨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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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버스 서클 센트럴파크 입구(왼쪽 위부터), 맨해튼 뮤니시펄 꼭대기, 컬럼비아대 도서관 계단, 오드리 먼슨, 뉴욕공립도서관, 플라자 호텔 앞 분수대.



우리는 그녀를 뉴욕 곳곳에서 만난다. 

뉴욕공립도서관 앞, 센트럴파크 입구,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컬럼비아대 도서관 계단, 플라자 호텔 앞, 맨해튼 뮤니시펄 꼭대기, 프릭컬렉션, 브루클린뮤지엄, 리버사이드 파크, 브로드웨이 극장가 그리고 10센트 동전까지... 


별명은 '아메리칸 비너스(American Venus)' '미스 맨해튼(Miss Manhattan), '미국 보자르의 뮤즈(The Muse of America's Beaux Arts)'... 그녀는 미 최초의 수퍼모델이었다. 우리가 거의 매일 보고 있지만, 뉴요커들조차 그녀를 모른다. 잊혀진 여인, 그녀 이름은 오드리 먼슨(Audrey Munson, 1891-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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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뮤니시펄 빌딩 꼭대기의 오드리 먼슨은 25피트, 센트럴파크 입구의 조각 꼭대기와 하단 모델. 


오드리 먼슨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맨해튼 뮤니시펄 빌딩(Municipal Building, 1 Centre St.) 꼭대기에 서있는 황금조각 '시민의 명예(Civic Fame)'의 모델이었으며, 컬럼비아 대 로우 라이브러리 계단 앞에 앉은 'Alma Mater'과 컬럼버스서클 센트럴파크 입구 USS 메인 국립 기념비, 맨해튼 브리지 입구 '상업의 영혼(Spirit of Commerce)' 천사도 그녀를 모델로 제작되었다. 뉴욕공립도서관 정문 남쪽의 대리석 조각도 그녀가 모델이었다. 뉴욕에 오드리 먼슨의 모습을 담은 조각은 15개에 달한다.



locaudreymunson.jpg Portrait of Audrey Munson by Arnold Genthe (1915)


그러면, 오드리 먼슨은 누구인가?

1891년 코닥필름 회사로 한때 번성했던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여덟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오드리는 엄마를 따라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로 이주했다. 

17세에 배우가 되기위해 엄마와 뉴욕으로 온다. 그해 ' The Boy and The Girl at the Aerial Garden'에서 하녀 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The Girl and the Wizard', 'Girlies' 'La Belle Paree'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어느날 5애브뉴에서 윈도우 쇼핑을 하던 중 사진작가 펠릭스 베네딕트 헤어조그(Felix Benedict Herzog)의 눈에 띄여 그의 스튜디오에서 모델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헤어조그의 추천으로 비엔나 출신 조각가 이시도어 콘티(Isidore Konti)를 만나 처음으로 누드로 포즈를 취했다. 콘티는 그녀를 모델로 '삼미신(Three Graces)'을 제작해 아스터 호텔의 그랜드볼룸에 설치했다. 


이후 오드리 먼슨은 연기보다 조각가와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누드 모델로 활동하면서 아티스트들의 뮤즈가 된다. 이때부터 작가들은 오드리 먼슨에게 '미스 맨해튼(Miss Manhatta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15년엔 모빌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의 아버지 알렉산더 스티어링 칼더의 모델로 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Panama-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 출품작의 모델로 섰다. 이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작품의 과반수 이상에 모델로 포즈를 취하게 된며 '파나마 태평양 소녀(Panama-Pacific Girl)'라는 별명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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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파나마-패시픽 박람회용 '스타 메이든(Star Maiden)'을 제작하는 알렉산더 스털링 칼더(왼쪽)와 오드리 먼슨.


조각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Daniel Chester French), 아돌프 와인맨(Adolph Weinman), 알렉산더 칼더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스티어링 칼더(Alexander Stirling Calder)부터 보자르 양식으로 명성을 얻은 건축가 트리오 맥킴, 미드 & 화이트(McKim, Mead & White)까지 오드리 먼슨을 총애했다. 그녀는 수퍼 모델이었다.


누드 모델로 유명해지면서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 1915년 조각가의 모델 이야기를 그린 무성영화 '영감(Inspiration)'에서 먼슨은 미 영화사상 처음으로 누드로 출연한다. 하지만, 먼슨의 연기력은 보잘 것 없었다. 그녀는 누드 장면에만 출연했고, 연기 장면엔 유사한 얼굴의 제인 토마스를 출연시켰다. 예술에 관한 영화라 가위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영화는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먼슨은 캘리포니아주 산타 바바라에서 에로영화 '순수(Purity, 1916)'와 '소녀의 꿈(The Girl's Dream, 1916)'에도 출연했다. 작품을 위해 옷을 스스럼없이 벗을 수 있었던 자유의 여신, 먼슨은 신여성이었다. 먼슨은 여성도 남자와 같은 수영복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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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rey Munson in the 1915 film ‘Inspiration’


할리우드 첫 누드 스타가 된 먼슨은 영화 출연으로 수입도 쏟아졌다. 그러나, 먼슨과 매니저 어머니는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1916년 겨울 동부 시라큐스로 돌아온 오드리 먼슨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총각이었던 뉴포트 허만 오엘리치스 주니어를 만난다. 그러나, 은광업자 재벌의 상속자인 오엘리치스 주니어는 동성애자로 판명된다. 


이듬해 초 먼슨은 연방국무국에 오엘리치스 주니어가 친독일 네트워크로 자신을 영화산업에서 퇴출당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영화에 출연할 것이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낸다. 또한, 연방하원에 보내는 청원서에서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처형되는 것으로부터 막아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사실 딸의 매니저로 일했던 먼슨의 엄마는 드센 반유대주의자였다. 오드리 먼슨도 이처럼 종종 반유대 감정을 드러냈고, 스스로를 유럽의 귀족 혈통이라 주장하면서 '오드리 메리 먼슨-먼슨 남작 부인(Baroness Audrey Meri Munson-Munson)'으로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설상가상으로 1919년 오드리 먼슨의 인생을 바꾸는 스캔달이 일어난다. 

그녀가 살던 어퍼웨스트사이드 아파트 주인 월터 킨 윌킨스 박사가 부인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윌킨스는 아내가 절도범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갖고 있던 먼슨의 사진이 문제였다. 경찰수사 결과 윌킨스는 오드리 먼슨과 결혼하기 위해 부인을 살해한 것으로 파악했다. 경찰은 사건 수사를 위해 먼슨을 소환했지만, 오드리는 뉴욕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한 채 토론토에서 수사를 받았다. 먼슨은 물론 윌킨스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결국 재판에서 윌킨스는 전기의자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사형집행 이전 감옥에서 목매 자살한다. 


이 사건으로 대중은 오드리 먼슨이 윌킨스와 연애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작가들도, 할리우드에서도 순수한 이미지를 잃은 먼슨을 찾지 않았다. 먼슨은 일자리를 잃고 엄마와 시라큐스로 이주했다.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가가호호 방문, 은식기를 팔며 연명했다. 게다가 보자르(Beaux Arts)의 여인은 아르데코(Art Deco)의 등장으로 빛이 퇴색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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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메트뮤지엄 소장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의 'Mourning Victory', 머큐리 다임(위)와 걷는 리버티(아래), 브루클린 뮤지엄에 설치된 프렌치의 '맨해튼'.


1920년 먼슨에게 복귀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프로듀서 알란 록이 먼슨에게 지불한 네번째 영화 '머리없는 나방(Headless Moths)'의 출연료 조로 체크 2만7500달러 광고를 냈다. 그러나, 이 출연료는 허위였고,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조작극임을 알게된 먼슨은 알란 록을 고소했다. 영화 내용도 먼슨의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싸움꾼이 되어 우울증에 시달리던 먼슨은 1922년, 서른한살에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 1931년 엄마는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오그덴스버그의 정신병원에 보낸다. 마흔한살,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65년 동안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살았다.  그리고, 방문객 없이 쓸쓸한 삶 끝에 1996년 104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드리 먼슨은 뉴헤이븐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2016년 제임스 본(James Bone)이 누드 모델, 살인 스캔달, 자살 미수, 정신병원 수용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먼슨의 전기 '미인의 저주('The Curse of Beauty)'를 출간했다. 제임스 본은 자신의 책이 영화화된다면, 오드리 먼슨 역에는 제니퍼 로렌스가 맡아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임스 본의 책에 따르면, 먼슨은 집시 점쟁이의 예언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먼슨이 다섯살 때 손금을 봐준 점쟁이는 "너는 사랑받고, 유명해질 거란다. 하지만, 행복이 너에게 왔다고 생각했을 때, 사해(Dead Sea)의 과실이 너의 입안에서 재로 변할 것이야."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오드리 먼슨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담은 청동, 화강암, 대리석 조각들은 여신으로, 천사로 뉴욕에 남아 매일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다. 그녀는 '아메리칸 비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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