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메트뮤지엄 북미 최초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회고전

Delacroix 


September 17-–January 6, 2019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00000001.jpg

Eugène Delacroix,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Self-Portrait in a Green Vest, ca. 1837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 회고전 '들라크루아(Delacroix)'가 올 여름 파리 루브르뮤지엄(Musée du Louvre 에서 선보인 후 올 가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으로 찾아왔다. 


오는 9월 17일부터 내년 1월 6일까지 계속되는 들라크루아 회고전엔 150여점이 소개된다. 이 전시는 북미지역 사상 최초의 들라크루아 회고전으로 메트뮤지엄 컬렉션과 루브르 뮤지엄을 비롯, 세계 60여개 뮤지엄과 개인 소장품에서 대여해온 회화 150여점과 그의 일기장이 전시된다. 


생동감 넘치는 구도, 대담한 붓놀림, 관능적인 몸부림, 이국적인 풍경과 색채의 효과, 극적인 디테일,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 등 낭만주의(Romanticism) 화풍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후대 세잔을 비롯, 반 고흐, 르노아르, 그리고 피카소까지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르노아르와 마네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베꼈으며, 드가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바론 슈위터의 초상을 사들였다. 

 


00000IMG_20181003_2117418-800.jpg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Louvre Museum


세잔은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프랑스의 위대한 팔레트다. 그만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는 없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1885년 "그는 사물의 생동감, 표현과 움직임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그는 완전히 물감 이상에 존재한다"고 들라크루아를 찬미했다. 또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들라크루아의 천재성은 논쟁의 가치가 없다. 그것은 증명할 것이 아니라 느끼는 무엇이다"라고 썼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그의 캔버스 앞에서 느껴야할 전시다. 


들라크루아 전시 하이라이트는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Greece on the Ruins of Missolonghi, 1826), '낭시의 전투(The Battle of Nancy, 1831), 알제리의 여인들(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자식들을 죽이려하는 메디아(Medea About to Kill Her Children, 1838), 그리고 사자 사냥(The Lion Hunt, 1855)' 등이다. 다만,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인 '민중을 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과 '사르다나팔러스왕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 1827, 392cm × 496cm)은 루브르를 떠나지 못했다. '모나리자'가 보물이라면, 아마도 이 그림은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작인 국보가 아닐까? 대신 1844년 들라크루아가 직접 훨씬 작은 사이즈로 복사한  필라델피아뮤지엄이 소장 두점(73.71cm × 82.47cm)이 왔다.  또한, 들라크루아의 친구였던 파가니니, 쇼팽과 조르쥬 상드의 초상화도 빠져서 아쉽다. 루브르는 미완성으로 남은 쇼팽과 상드의 스케치도 소장하고 있다.



002.jpg

Eugène Delacroix, Self-Portrait as Ravenswood, ca. 1821-24/ Eugène Delacroix, Michelangelo in His Studio, 1849–50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파리 근교 일드프랑스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무장관이었던 아버지 찰스-프랑소아 들라크루아가 외젠이 태어날 당시 암으로 불임 상태라 가십거리였으며, 생부는 들라크루아를 계승해 외무장관이 된 모리스 드 톨리랑으로 알려졌다. 실제 얼굴이 닮았으며, 7살 때 아버지, 16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며 고아가 된 외젠은 바람둥이 톨리랑을 아버지로 여겼다고 한다.    


들라크루아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유아시절엔 소설을 읽던 유모가 졸다가 그에게 촛불을 떨어트려 얼굴과 팔에 화상을 입었다.한번은 하녀가 애인을 보려고 배에 올라타다가 그를 찬 바닷물에 떨어트렸다. 소년 시절엔 중독사고와 질식사고도 겪었다.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갔을까?



168.JPG

Eugène Delacroix, Basket of Flowers and Fruit, 1849/ Basket of Flowers, 1848–49


들라크루아는 리세 루이르그랑과 리세 미페르 코르네이유에서 드로잉 교육을 받았고, 1815년 피에르 나르시세 괴랑에게서 자크-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훈련을 받았다. 1816년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한 후엔 자신이 찬미하는 거장 티치아노와 루벤스가 있는 루브르에 드나들었다.


1819년 교회의 위임으로 라파엘 스타일의 회화를 그렸으며, 이후 루벤스와 제리코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의 뗏목'에 자극받아 '단테의 바르크(The Barque of Dante)'를 그려 1822년 파리 살롱에 출품해 조롱받았으나, 파리 룩셈부르그미술관에서 구매해갔다. 신고전주의에서 결별한 들라크루아의 혁신적인 낭만주의 화풍은 한동안 비평가들과 대중의 반발에 부딪히다가 '키오스의 학살(The Massacre at Chios)'로 찬사를 받기 시작한다.  



092.JPG

Eugène Delacroix, Young Tiger Playing with Its Mother, 1830


1820년대 중반 이름이 알려지면서 문학 서적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 프랑스 번역판(1828)과 햄릿 등을 위해 작업한 석판화도 소개된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부터 파리 동물원 Jardin des Plantes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호랑이, 사자, 말에 인간과 같은 표정, 휴머니티를 감지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의 신화나 종교, 전쟁, 동물, 이국 풍경 회화는 유명하지만, 정물화와 풍경화는 덜 알려졌다. 과일과 꽃이 있는 바구니 그림과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바다 풍경화도 전시 중이다.



189.JPG

Eugène Delacroix, The Sea at Dieppe, 1852


그는 화가이자 기록가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는 아름다운 필체로 일기를 썼다. 1822년부터 24년, 1847년부터 1863년 사망할 때까지 그림 뒤에 숨겨진 화가의 마음을 그릴 수 있다. 7살 연상의 화가 데오도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가 33세로 요절했을 때 들라크루아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아침 내 작업실에서 우리 불쌍한 제리코의 사망 편지를 받았다....그는 내 친구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불운함은 나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이 소식은 나의 모든 작품들으로부터 도망가고, 내가 이제까지 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게 만든다."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의 땟목'에서 영향을 받았고, 루브르 갤러리 700 안에 함께 걸려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의 전기 'Eugene Delacroix,: His life and work'(1947)에서 "그는 회의주의 정중함, 단정함, 투지, 현명함, 횡포,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재들에겐 늘 있는 특별히 선함과 부드러움으로 뭉친 인물이었다"라고 썼다.  또한, "열정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 인물, 그러나 열정을 표현하는 가능한한 명료하고, 냉철하게 결심했다"고 평했다. 1949년 53세의 들라크루아는 작업실 안의 미켈란젤로를 그렸다.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미켈란젤로와 자신을 동일시했을까? 


들라크루아의 말년도 비극적이었다. 1844년 파리 근교 샹프로제의 작은 오두막집으로 이주해 1963년 사망할 때까지 가정부 잔느 마리 르 귀유가가 충성스럽게 곁을 지켰다. 파리에는 들라크루아 뮤지엄(Musée National Eugène-Delacroix)이 있다.


들라크루와 회고전은 올초 미켈란젤로 드로잉전이 열렸던 2층의 19-20세기 유럽 회화관 옆 Gallery 899에서 열린다. 이와 함께 '들라크루아 드로잉전: 카렌 B. 코헨 컬렉션(Devotion to Drawing: The Karen B. Cohen Collection of Eugène Delacroix, 7/17-11/12, Galleries 691–693)'도 함께 볼만 하다. 



들라크루아 회고전 하이라이트


021.JPG

#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Greece on the Ruins of Missolonghi, 1826)

1825년 그리스가 오스만 터키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하던 중 폐허가된 미솔롱기에 홀로 선 여인의 모습.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운동을 돕기위해 원군을 조직해  최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열병에 걸려 36세에 사망한다. 전사자의 손은 바이런에 대한 애도로 보인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여인은 그리스의 알레고리이며, 뒤의 흑인병사는 오스만 터키를 위해 싸우던 이집트 병사. 들라크루아는 1822년 그리스 키오스섬의 전쟁 '키오스섬의 대학살Massacre of Chios, 1824)' 그렸고, 중국화가 유민준이 패러디로 그려 2007년 소더비에서 410만 달러에 팔렸다. 

 


130.jpg 

# 알제리의 여인들(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details)

1832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면서 들라크루아는 모로코 외교사절단에 동행해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1834년 살롱에 출품한 이 그림은 알제리 여행 때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 화려한 컬러에 금속 쥬얼리로 치장한 세 여인이 앉아있는 모습과 흑인 노예 여성이 서있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꼭 가까이서 음미해야할 작품이다. 들라크루아의 알제리 여인들은 오리엔탈리즘 회화에서 종종 묘사되는 에로틱한 오달리스크 이미지가 아니다. 당시 루이 필립왕이 그림을 구매해 룩셈부르그 국립미술관에 기부했다가 루브르뮤지엄으로 들어갔다. 훗날 반 고스와 고갱은 '알제리의 여인' 1949년판을 보기 위해 몽펠리에까지 갔으며, 인상파들의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남았다. 피카소는 1954년 이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15점의 연작을 그렸다. 그리고, 201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중 한 버전이 1억7940억달러에 팔렸다.  


 

161.JPG

# 자식을 죽이려하는 메디아(Medea about to Kill Her Children, 1838)

1838년 살롱 출품작으로 그리스 신화 중 메디아를 골랐다. 코린트의 공주 글라우케에게 반한 남편 제이슨(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 악녀 메디아의 극적인 모습이다. 세사람의 나신이 피라미드형으로 구축하고, 비극적인 순간을 빛이 감싸고 있다. 



IMG_20181003_2116035.jpg

사르다나팔러스왕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 1844). 루브르뮤지엄 소장 오리지널을 메트에 오지 못했다.


109.jpg

# 사르다나팔러스왕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 1844, details)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러스'(1821)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아씨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러스가 난교와 방탕한 생활 끝에 적에데 포위되자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재산을 불태운 후 자결하기 직전의 모습을 그렸다. 1828년 살롱에 출품됐을 때 이전의 네오클래시즘(신고전주의)의 형식을 배반하는 회화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로 복귀를 의미하는 신고전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회화양식이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였던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사르다나팔러스를 소재로 칸타타를, 리스트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233.JPG



000.jpg *메트로폴리탄뮤지엄 금강산 특별전

*메트뮤지엄을 10배 즐기는 5가지 방법



miss Korea BB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