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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의 천재, 피카소의 영감 1901-1906

Picasso. Blue and Rose@Musée d’Orsay <3> His Inspiration

9월 18일-2019년 1월 6일
@파리 오르세 뮤지엄(Musée d’Or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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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Portrait of Sebastian Juner Vidal, 1903/ La Famille Soler, 1903. Picasso. Blue and Rose, Musée d’Orsay

20세기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91세로 장수하면서 무려 5만여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880점, 드로잉 1만2천여점, 그리고 판화, 태피스트리, 러그 등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피카소 작품만을 모은 미술관도 파리의 피카소뮤지엄(Musée Picasso),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뮤지엄(Museu Picasso), 그리고 고향 말라가의 피카소 뮤지엄(Museo Picasso Málaga) 등  프랑스, 스페인, 독일에 무려 8개의 피카소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다.

피카소 주제 전시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열려왔으며, 주제도 다양하다. 2012년 뉴욕의 구겐하임뮤지엄은 '피카소의 흑백전(Picasso Black and White, 10/5-1/23)을 열었고, 올 바르셀로나 피카소뮤지엄은 '피카소의 부엌(Picasso's Kitchen, 5/25-9/30)'을 주제로 한 특별전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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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Femme dans la loge, 1901. Picasso. Blue and Rose, Musée d’Orsay

피카소의 변화무쌍한 화풍은 청색시대(Blue Period, 1901–1904), 장미빛시대(Rose Period, 1904–1906), 입체주의(Cubism, 1907–1917), 고전주의(Neoclassicism, 1917-1924),  초현실주의(Surrealism, 1925-1932)와 그 이후로 나뉘어진다. 

지금 파리의 오르세뮤지엄(Musée d’Orsay)에서는 1973년 피카소 사후 처음으로 청색시대와 장미빛시대를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피카소. 블루 앤 로즈(Picasso. Blue and Rose)'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스페인 출신 무명의 청년화가 피카소가 파리에 정착한 후 빈센트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렉,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드 마네 등 동시대 화가들의 모티프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면서 자신의 체험에서 기반한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던 시기, 천재의 몸부림을 느낄 수 있는 특별전이다. 

1990년 18세의 열혈청년 파블로 루이즈(*아버지 성)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기차로 파리의 오르세 역(Gare d’Orsay)에 도착했다. 이후 파리의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사랑하며, 밤을 새워 작업하며 그림에 '파블로 피카소(어머니 성)'로 사인하기 시작한다. 1986년 오르세 철도역은 오르세뮤지엄으로 개조되어 오픈했으며, 1848년부터 1914년 사이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9월 18일 개막된 피카소 특별전은 1월 6일까지 계속된다. 이 전시는 내년 2월 3일부터 5월 29일까지 스위스 바젤의 퐁다시옹 베옐러(Fondation Beyeler)로 이동해 열린다. http://www.musee-orsay.fr/en

오르세뮤지엄의 '피카소. 블루 앤 로즈(Picasso. Blue and Rose)' 전시는 16개의 갤러리에서 13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전시를 <1> 청색시대(1901-1904), <2> 장미시대(1904-1906) <3> 모방의 천재, 피카소의 영감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3> 모방의 천재, 피카소의 영감 Who Inspired Picasso?


"좋은 화가는 베끼고, 위대한 화가는 훔친다" -파블로 피카소-

"다른 이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불쌍하다."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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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ni de Toulouse-Lautrec, ‘In a Private Dining Room (At the Rat Mort),’ c. 1899. The Samuel Courtauld Trust,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 ‘Pablo Picasso, ‘The Wait (Margot),’ Paris, spring 1901. Museu Picasso, Barcelona


에드 해리스 감독의 영화 '폴락(Pollock, 2000)'에서 미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은 술에 취한 채 "젠장 피카소가 다 해버렸어!"라고 외친다. 파블로 피카소의 천재성은 거장과 동료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모방하면서 독창적으로 진화하는 변증법적 사고관을 가졌던 것 같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Imitation is the Mother of Creation)"!


1900년부터 1906년까지 파블로 피카소는 청색시대와 장미시대를 거치면서 파리 화가들의 화풍을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당대 파워 아트딜러 앙브로아즈 볼야르(Ambroise Vollard)의 갤러리에서 첫 파리 개인전을 위해 하루에 세점씩 그릴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던 피카소는 당대 화가들 반 고흐, 로트렉, 고갱, 드가, 마네 등를 베끼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해나갔다. 뿐만 아니라 루브르뮤지엄에서 본 자크 루이 다비드과 외젠 들라크루아, 앵그르, 도미에, 쿠르베의 회화에 심취했으며,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이베리아, 아프리카 조각까지 입체파(Cubism)의 전조가 될 아이디어를 전폭 수용하게 된다.



# 피카소와 엘 그레코 

   

스페인의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가 처음 한 말은 '연필'이었다고 한다. 미술교사이자 큐레이터였던 아버지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파블로의 첫 스승이었다. 피카소는 14살 때 아버지의 손에 끌려 마드리드로 가서 프라도뮤지엄(Museo del Prado)을 구경했다. 수많은 유럽의 옛 거장들 중에서 피카소에게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와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Velázquez, 1599-1660)에 매료됐다. 1989년 피카소는 자신의 공책에 "그레코, 벨라스케즈, 그들은 나에게 영감을 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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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El entierro de Casagemas, 1901/ El Greco, El entierro del Conde Orgaz, 1588/ The Opening of the Fifth Seal,1614


피카소는 1901년 친구 카를로스 카사예마스가 자살한 후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Orgaz, 1588)'을 베낀 '카사예마스의 매장(El entierro de Casagemas, 1901)'을 그렸다. 청색시대로 들어간 피카소는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레코처럼 길에 묘사하게 된다. 그리고, 엘 그레코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The Opening of the Fifth Seal,1608-14, 메트뮤지엄 소장)'는 입체파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MoMA 소장)'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 피카소와 벨라스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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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Woman in Blue, 1901/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Teresa in a Blue Dress, 1659/ Las Meninas, 1656


1900년 가을 첫 파리 여행 후 1901년 겨울 피카소는 마드리드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프라도뮤지엄에서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즈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청색 드레스의 여인'을 그렸다. 피카소는 1957년 여름부터 피카소는 '시녀들(Las Meninas, 1656)'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시리즈 44점을 그리게 된다.



# 피카소와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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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The Absinthe Drinker, 1901/ Paul Cézanne, Madame Cézanne Leaning on a Table, 1874


피카소와 마티스는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1905년 가을살롱에서 열린 세잔 회고전 후 세잔은 피카소 전 생애를 거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양한 시점으로 그린 사과, 풍경화, 인물화 등 세잔의 테크닉은 피카소와 조르쥬 브라크가 큐비즘을 창시하는 발판이 되었다.  


피카소는 1958년 세잔의 고향이자 수많은 풍경화에 등장한 생빅투아르산(Montagne Sainte Victoire)에 있는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의 17세기 샤토 보그나르그( Château de Vauvenargues)를 사들인다. 피카소는 그후 3년간 자클린 로크와 함께 살았으며, 1973년 샤토에 묻혔다. 이 샤토는 로크의 딸이 소유하고 있다. 1973년 피카소 사망 후 그의 컬렉션에는 세잔의 엑상 프로방스와 샤토 누아르, 레스타크 등 풍경화 세점이 알려졌다.  



# 피카소와 로트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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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The Absinthe Drinker, 1901/ Henri Toulouse-Lautrec, The Hangover, 1901


인상파 화가 앙리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1901년 37세에 매독으로 사망한다. 피카소는 로트렉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카페, 카바레, 물랑루즈 극장의 밤, 서커스의 풍경, 매춘굴의 여인들 등 로트렉이 사랑한 하층계급의 삶과 독주 압생트는 바르셀로나의 화가 피카소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넨미사 미술관(Museo Thyssen-Bornemisza)에서는 지난해 말 '피카소/로트렉(Picasso/Lautrec)' 전시에서 100여점을 비교했다.  



# 피카소와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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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a Famille Soler, 1903/ Édouard Manet, The Luncheon on the Grass, 1862-63


루브르뮤지엄은 파리 화가들의 학교였다. 1862년 에두아르드 마네(1832-1883)와 에드가 드가(1834-1917)는 루브르에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La Meninas)'를 베끼다가 만났다. 마네는 30세, 드가는 27세였고, 이들은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된다. 피카소는 1932년 루브르에서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식사'를 본 후 봉투의 뒤에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시련은 나중에'라고 메모해놓았다. 그리고, 1903년 30여년 후에 피카소는 이 걸작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27점과 드로잉 140여점, 리놀리움 컷을 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부유한 양복 재단사 솔러는 1902년부터 이듬해까지 피카소의 초기 후원자였다. 솔러는 피카소에게 가족의 초상을 위임했고,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했다. 피카소는 그 댓가로 양복이나 현금을 받았다.1903년 22세의 피카소는 솔러 가족의 소풍 장면을 그리면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의구도를 베끼면서 오마쥬를 표했다. 



# 피카소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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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Portrait of Sebastian Juner Vidal, 1903/ Edgar Degas, The Absinthe Drinker, 1875-76


평생 플레이보이였던 피카소는 발레리나에 집착했던 에드가 드가(1834-1917)를 경배했다. 드가의 인상파 그림을 수집했다. 드가가 즐겨 그린 가수, 발레리나, 세탁부, 목욕하는 여인, 매춘부, 술마시는 여인 등을 피카소도 따라 그렸다. 



# 피카소와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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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a Vie, 1903/ Vincent van Gogh, Sorrow, 1882


피카소 전기작가 존 리처드슨에 따르면,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피카소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화가로 전해진다. 피카소는 반 고흐가 귀를 잘랐다는 신문기사를 액자로 만들 정도로 집착했다. 피카소는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우체부 룰랭 가족으로부터 고흐의 작품을 구입했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걸작 '인생'에서 가운데 아래의 울고 있는 임산부 여인은 반 고흐의 드로잉 '슬픔'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 피카소와 고갱


폴 고갱(1848-1903)도 피카소의 작품과 삶에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는 화가 파코 듀리오를 통해 33세 연상의 고갱의 원시주의와 영혼에 관한 미술철학에 대해 매료됐다. 당시 고갱은 파리를 저버리고, 타히티섬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회고록 '노아노아'를 썼다. 피카소는 '노아노아' 한권을 갖고 있었다. 피카소가 1903년 고갱을 사망 소식을 들은 후 피카소는 타히티 여성의 모습을 그린 '서있는 누드'에 '폴 피카소(PAUL Picasso)'라고 서명했다. 피카소는 특히 도예 작품, 목판화, 회화 전반에 걸쳐 고갱의 스타일을 흡수하게 된다.  



# 피카소와 고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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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Three Dutch Girls, 1905/The Three Graces, Roman copy of the Imperial Era (2nd century AD?) after a Hellenistic original.


여행도 피카소의 영감이었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르와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피카소는 청색시대에서 장미시대로 들어가며,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본 민속 의상 역시 그의 컬러 팔레트를 붉은 톤으로 바꾸게 된다. '세명의 네덜란드 소녀들'은 '삼미신(三美神, The Three Graces)' 조각이나 라파엘의 회화에서 영감을 얻은 흔적이 보인다.  



# 피카소와 고딕 스테인글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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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Enfant au Pigeon, 1901/ Arlequin assis, 1901/Stained-glass window from Chartres Cathedral


피카소는 고딕 성당의 특징인 스테인글래스(stained glass)에서 영감을 받은듯한 굵은 검은색 테두리를 즐겼다. 이 스타일은 1932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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