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도어 제리코 석판화 전@프랑스 샹티이성 콩데뮤지엄
Château de Chantilly/ Musée Condé
소외된 인간군상 묘사한 데오도어 제리코 석판화전
June 15 to October 14, 2018
Le Cabinet d’Arts Graphiques du Musée Condé à Chantilly
오말 공작(Duke of Aumale, 1822-1897)의 컬렉션을 모은 프랑스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의 콩데뮤지엄(Musée Condé)은 그의 사후 작품 대여를 금지하며, 일체의 전시 배열을 바꿀 수 없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아직도 1897년의 오말 공작 취향대로 작품들이 걸려있다.
하지만, 콩데뮤지엄에선 특별전을 여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데오도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의 석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에는 제리코가 말(horse)을 탐구했으며, 빈곤하고 병든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을 묘사하면서 사회를 비판한 흔적들이 보인다. 전시는 6월 1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열렸다.
1798년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난 데오도르 제리코는 어릴적부터 그림과 말을 좋아했다. 고전주의 화가피에르-나르시세 게랭(Pierre-Narcisse Guérin)을 사사했고, 루브르에서 루벤스, 티치아노, 벨라스케즈, 렘브란트를 복사하면서 스킬을 늘려가는 한편,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말을 타면서 그림을 그렸다.
1812년 21세에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돌격하는 샤세르(The Charging Chasseur)'를 파리 살롱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2년 후엔 역시 말과 군인이 들장하는 '부상당한 중기병(Wounded Cuirassier)'을 선보였다. 제리코는 군대에 자원해서 베르사이유의 유격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에 매료되었다.
1819년 선장이 떠나버린 후 난파한 배의 승객들의 실화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부패한 사회를 비판한 회화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로 논쟁에 휘말혔다. 허나 이듬해 런던에 전시했을 때는 찬사를 받았다. 제리코는 런던에서 도시 빈곤을 목도하고, 석판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1821년 프랑스로 돌아온 제리코는 '미친 여인' 등을 비롯 초상화 시리즈를 그렸으며, 만성 폐질환에 말에서 떨어지며 건강이 악화되어 1824년 33세에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제리코보다 7세 어렸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의 땟목'의 모델이 되었으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제리코가 1824년 33세로 요절했을 때 들라크루아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아침 내 작업실에서 우리 불쌍한 제리코의 사망 편지를 받았다....그는 내 친구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불운함은 나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이 소식은 나의 모든 작품들으로부터 도망가고, 내가 이제까지 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게 만든다."
루브르뮤지엄의 갤러리 700에는 제리코의 '메두사의 땟목'(1819)과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이 나란히 걸려있다.
Château de Chantilly - Musée Condé
7 rue du Connétable
60500 Chantilly
http://www.domainedechantilly.com/en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 가이드
*프랑스 샹파뉴의 시골마을 르메닐쉬로제(Le Mesnil sur Oger)에서 하룻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