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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김호봉: 화가 맞아요? 나의 변명
Memory <1> 나의 변명
"화가 맞아요?"
Hobong Kim, Blue bird, oil on canvas, 36x18 inches, 2017
벌써 이곳에 지낸 지가 25년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1993년 가을, 30대 초반에 미국에서 다시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학생으로 돌아갔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설레이고 흥분되었던 이곳 뉴욕의 삶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동안 여느 유학생들처럼 이것저것 한국에선 해보지 못한, 아니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델리 알바, 사무용품 배달부까지 경험시켜준 곳, 뉴욕. 한때는 너무 힘이 들어 아트를 접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이젠 제법 나이가 들었고, 나는 미술을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뉴욕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을 버리려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첫 칼럼은 나의 셀프 소개를 해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무조건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원래는 국민학교라 써야하겠지만) 땐 월트 디즈니 그림책에 푹 빠졌다. 그 책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연필로 스케치하고 포스터 컬러(아직도 이 물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중요한 페인트 재료)로 칠하곤 했다. 그게 아마 초등 3, 4학년때 쯤으로 기억된다. 그 시기엔 사실 만화영화 자체도 국산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나에겐 중요한 볼거리였고, 따라할만한 매력적인 것들이었다. 일본 만화영화에서 나오던 '아톰'이나 '황금박쥐', '마린보이' 등은 유년시절 잊혀지지않는 추억의 캐릭터들이며, 주제가는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 나와 비슷한 세대분들도 다들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말로 아이돌같은 레벨의 캐릭터들이니 그당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 향수에 젖어, 아톰이 그리워서 간혹 일본을 여행할려는 지인들이 있으면, 인형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나같은 사람을 '키덜트'라고하던가! 흠 ! 그렇치만 난 그 단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변명 같지만, 난 그 시기의 추억을 사고싶은 맘이지 정작 컬렉션을 하고 싶은 건 아니기 떄문이다. 변명인가?
조금 더 자란 후엔 달력에 인쇄된 멋진 할리우드 배우 얼굴들과 친척분들 얼굴도 그리며 완전 그림에 푹빠져 지냈다. 나를 보시던 분들이 한번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칭찬과 조언을 해주셨다. 그김에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화실을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4남매를 키우시기에는 넉넉치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선뜻 "그럼 몇개월만 다녀봐라"하시며 승낙해주셨다. 사실 당시 공무원인 아버지 월급으론 자식들 사교육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걸 나이 어린 나도 눈치를 챌 수 있었으니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에서 멀지않는 미술학원에 다니며 난생 처음 사람을 그리는 법을 익혀주는 석고소묘와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에 만나 석고상들의 모습, 과거의 로마의 장군상, 그리스의 신들의 초상 등 정말 멋진 석고상들이 그안에 즐비해 방과 후 화실에 들어갈 때마다 벅찬 희열을 느끼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틈만 나면 휴일에 이젤과 화구 박스를 들고, 버스를 타고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고궁으로 나갔다. 앉아서 풍경화 그리는 것을 즐겼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그리는 동안 주위에 사람들이 그림 구경하려고 모여드는 거였다. 어린 마음에 그때마다 두근거리지만 그걸 즐기곤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중학교 땐 상도 많이 받았고, 고등학교는 선화예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사립고 수업료 부담을 줄일수 있었다. 또한, 3년 동안 디자인, 동양화, 서양화, 조소 등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다.
고3 때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고 나는 당연히 서양화를 선택했다. 당시엔 서양화를 선택해야 화가가 된다라는 말이 안되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교 입시 때는 회화과를 지원하여 장학금 받고 입학하는 행운도 따랐다. 그 당시 대학입시전형에 사상 최초로 실기가 60%를 차지해서 당연히 예고 출신들에게 유리한 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도 잠시, 들어가선 정신없는 캠퍼스시절이 시작되었다. 아르바이트의 시작인 것이다.
용돈 벌어가며, 그림 그려가며, 밀린 과제를 하며 바쁘게 보낸 대학 4년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의 개인 실기실 공간을 비우기 일수였다. 다른 친구나 형님 누님들(그 당시 재수, 삼수, 또는 타대학에 다니다 오신 분들)은 대부분 남아서 작업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아쉬운 생각 뿐이다. 대학 때 배운건 물론 수업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또한 주변의 학우들과 선배 그리고 스승의 작품들을 보며 직간접적으로 배운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모습들 그때의 대학 작업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학졸업 후엔 서울 공립교사 순위고사에 합격하여 잠시 서울의 모 중학교에 6개월 근무하다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엔 바로 모교 선화예고에서 소묘를 가르치며, 대학원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그시기가 몇년간 작업에 집중하며 크다면 큰 상도 몇차례 받으며, 작업에 대한 욕심도 갖게 되었다. 같은 고교와 같은 대학 전공 후배인 아내는 일찌감치 유학을 결혼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와 결혼 후 결국은 둘다 유학을 결정했다. 뉴욕주립대에서 언어연수후에 아내는 S.V.A. 대학원으로, 나는 NYU 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에 집중했다. 90년대 초반 미술계 최고의 관심사가 비디오 아트였다. 졸업 후 수년간 비디오 작업하며 소호의 몇군데 갤러리에서 아내와 함께 비디오와 인스톨레이션전도 갖고, 2000년 뉴욕한국문화원의 갤러리코리아에서 전시를 끝으로 아쉽지만 사실상 비디오 작업을 마감했다.
이유는 경제적인 면이 컸다. 대학원 졸업 후 뉴저지로 이사를 한 것 또한 다시 평면작업을 하게된 계기가 큰 것같다. 주위분들이 진담반 농담반 우리에게 화가가 맞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데 그림이 집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살고있는 주변의 풍경을 유화나 수채화로 자주 그려 주변사람들이 그림을 구입하기도하고 학생들도 가르치며 생활에 보태고, 아내 또한 전공이 아닌 풀타임 CAD 디자이너로 맞벌이하며 생활을 해오고 있다. 현재 나는 일반 풍경이 아닌 나만의 풍경으로 전환을 하여 '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컨셉 아래 내 기억의 요소들을 가지고 창작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내도 그동안 붓을 잡지 못했지만, 이젠 서서히 워밍업을 하며 뭔가를 보여줄 기세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김호봉/화가, Artcomcenter 대표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주요 미술 공모전 등에서 여러차례 수상했다.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Studio Art를 전공하면서 비디오 아트에 매료되어 졸업후 수년간 비디오 작업을 하며 전시를 했다. 이후 뉴저지로 건너와 평면작업으로 이어져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으며 현재는 코리안 커뮤니티센터와 개인스튜디오 아트컴센터(Artcomcenter)에서 성인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업하고 있다. https://www.artcomcen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