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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김호봉: 이스트빌리지 도둑님, 매디슨애브뉴 캐시어
Memory <2> 1995년, 나의 첫 뉴욕
이스트빌리지 도둑님, 매디슨애브뉴 캐시어
Hobong Kim, Soho, NY, 1996, Black & White print
서른 잔치는 끝났다. 뉴욕에서의 학창시절은 서른살이 넘어 선택한 나의 결연한 결단을 필요로 했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결정을 하게될 때까진 많은 고민과 생각들과의 싸움이어서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내가 뉴욕 생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곳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그러나, 현대미술을 하는 이 시대의 아티스트들에겐 꿈의 무대이기도 한 뉴욕에서 나의 첫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기대에 부풀어 있게 만든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내가 아내와 정착한 곳은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였다. 실험영화, 독립영화 상영관인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와 같은 블럭에 있는 4층 아파트 건물의 1층 원베드룸을 렌트했다. 내가 다니는 NYU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과 오토바이 소음, 그리고 취객들의 소란에 잠을 깬 밤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1층 아파트에서는 생생한 라이브쇼로 취객들의 대화를 청취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어느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도둑님이 방문한 것이다. 아파트 내부 여기저기가 뒤집혀 있었다. CD 플레이어와 CD들이 사라졌다. 지금이야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지만, MP3나 DVD가 나오지 않았던 그 당시는 값나가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제일 가치가 나가던 나의 보물 1호 수동 Nikon FM2 카메라가 안보였다. "이런 돈 되는것들은 다 가져갔군" 중얼거리며 더 이상은 없어진 걸 확인한 후 당장 사진수업을 어찌해야되나하고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괜히 싸다고 1층을 선택한 것에 급후회가 밀려온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내도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의 보금자리가 누군가의 손에 뒤집혀진 상황에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인 나야 한번 왔으니 또 그손님이 오겠어 하지만 아내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그 사건으로 우린 이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는 카메라를 새로 사기 위해 알바를 하기로 했다. 사촌형이 여러 주인들과 코퍼레이션으로 비지니스를 하고있는 델리점의 야간 직원이다. 위치는 소위 요새 강남의 압구정같은 동네, 어퍼이스트사이드 매디슨 애브뉴다. 그 동네의 분위기는 이곳 내가 살던 젊은이들의 타운 이스트빌리지와는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잘 차려입은 날씬한 몸매의 여인들, 중절모를 멋지게 쓴 노신사, 귀부인같은 옷차림의 중년부인, 그뒤에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들, 그리고 주변은 온통 비싸게 보이는 부티크와 앤틱샵, 갤러리등 마치 영화에 나오는 멋진 맨하탄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동네였다. 건물들 역시 유럽의 고풍스런 양식의 돌로 만들어진 빌딩들 출입구에는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들이 서있는 곳 아 이곳이 정말 뉴욕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뉴욕은 생존해야하는 도시였다. 이런 매디슨 애브뉴의 분위기는 '그림의 떡'이었고, 나는 밤 8시부터 새벽 6시까지 캐시어 알바를 수행해야 했다. 운동도 할겸 돈도 절약할 겸 자전거를 한대 마련해서 집에서 델리까지 통근을 했다. 여름에 맨해튼의 시원한 밤공기를 가르며 20분 정도 페달을 밟다가 도착하면, 낮에 일하는 캐시어가 내게 인계를 한다. 이제부턴 내가 돈박스를 지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한다. 밤엔 낮과 다르게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 동네 치안이 안전하다고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긴장을 해야했다. 지금은 뉴욕의 치안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 많이 달라 걱정하곤 했다.
캐시어로는 힘든 일은 그리 없지만, 밤과 낮을 바꿔가며 생활하는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또, 한가지는 진상 손님이다. 어떤 이는 돈을 내고 잔돈을 받을 때 큰돈을 지불했다고 따지며 거스름돈을 많이 가져갈려고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주로 손님들이 많은 틈을 타서 정신없게 만든 후 이렇게 생떼를 쓰며 스트레스를 주곤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스패니시 직원들이 도맡아 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생존하기위해 일을 한다. 나의 일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직원들 중에 힘든 일을 도맡아하던 아미고 친구가 생각난다. 이름이 가물가물하기만하다. 체력이 좋고, 에너지가 넘처 주인들이 아끼는 직원이었다. 델리에선 음료수, 캔류 그리고 뷔페 음식을 운영했기 때문에 남은 음식과 설겆이 등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나도 캐시어를 하기 전에 얼마간 같이 도우며 그일을 해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안다. 하루만 해도 몸살이 날 정도였다. 그 직원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사는 이민자들, 유학생들에게 뉴욕은 결코 만만치 않은 도시다. 그러나,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도시다. 아이 러브 뉴욕! 다음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김호봉/화가, Artcomcenter 대표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주요 미술 공모전 등에서 여러차례 수상했다.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Studio Art를 전공하면서 비디오 아트에 매료되어 졸업후 수년간 비디오 작업을 하며 전시를 했다. 이후 뉴저지로 건너와 평면작업으로 이어져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으며 현재는 코리안 커뮤니티센터와 개인스튜디오 아트컴센터(Artcomcenter)에서 성인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업하고 있다. https://www.artcomcen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