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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20.06.13 22:54

(506) 스테파니 S. 리: 코로나 너 때문에, 코로나 너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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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45) 잘~먹고, 잘~사는 것

코로나 너 때문에, 코로나 너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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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다운(lockdown) 두달 째가 넘어간다.

첫 한달은 영 우울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이제는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에 뭔가 적응되고 있다. 그리 나쁘지 않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머리 염색비용도 들지 않는다. 대체로 잠옷만 입고 지내니 빨래도 많이 줄었다. 아이도 학교에 가지않아 좋다며 리모트 러닝(remote learning)에 잘 적응하고 있다. 


올 봄은 눈보라까지 치며 유난히 춥더니 5월 중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도 따스해지고 꽃과 나무에도 생기가 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지고 활력이 좀 생긴다. 침대 시트를 뒤집어 빨고, 청소기 필터교체를 하고, 세탁조 소독을 했다. 안읽고 쌓아뒀던 책들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꽤 부지런히 쉬지 않고 쓸고 닦은 것 같은데, 벼르고 있던 공기청정기 필터 교체와 여기저기 널려있는 지난 서류들을 정리하는 일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묵은때를 벗기고 집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두어달은 더 필요할 것같다. 뮤지움 관련 일들도 인터넷 연결만 되면 가능해서 지금도 재택근무를 큰 무리없이 하고 있는지라 이제는 다시 일을 나오라고 하면 나가기 싫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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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하루 세끼를 다 집에서 해먹는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식사준비도 제법 익숙해졌다. 요리 앱을 깔아 새로운 음식들에 도전도 해보기도 하며 이왕 해먹는거면 맛있는걸 해 먹어보려고 노력중이다. 시장 보러 가는 것은 여전히 좀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가족 모두 건강히 굶지않고 하루 세끼 잘 먹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동안 처박아두기만 하고 쓰지 않았던 요리 기구들도 다시 꺼내 잘 사용하고 있다. 브라우니 굽기에도 도전해보고, 거품기로 휘핑크림도 만들어보고, 와플도 구워먹고, 파니니 만드는 그릴로 닭고기도 제법 근사하게 구워낼수 있게 되었다. 요즘 유행이라는 달고나 커피도 여러번 만들어 먹었다. 믹스커피 위에 휘핑 크림도 얹어먹어보고, 수란도 만들어보고… 그동안 몰랐던 다양한 커피와 계란의 조리법을 다 섭렵해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매일 아침을 식구 모두가 같이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것도 좋은점 중 하나다. 아침상은 특별히 조리할 것이 없고 대충 꺼내놓기만해도 제법 폼이 나서 노력 대비 만족도가 높다. 예전엔 모두 시간 맞춰 등교하고 출근하기 바빠 아침 챙겨먹고 다닐 기회가 좀처럼 없어 일요일에나 한번씩 차려먹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을 좋아하는 그릇들 돌려쓰며 여유있게 차려 먹을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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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마침 정원일 시작하기도 적기라 꽃도 사다 심고, 잡초도 많이 뽑았다. 죽어가나 싶어 포기했는데 봄이 되니 엄청난 속도로 죽순들을 밀어올리며 다시 살아나는 대나무를 보고 용기를 얻어 화분에 대나무도 두그루 더 사다 심었다. 남편은 차고 지붕에 올라가 엄청난 양의 낙엽과 도토리를 뿌려대던 도토리 나무의 가지도 몇개 잘라냈다. 코너집이라 워낙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많아서 울타리용 향나무를 빙 둘러 심었다. 둘이서 정원일을 하며 하루종일 집에 있자니 은퇴 후 노년의 삶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는 아마 힘이 없어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나무묘목 수십그루를 직접 심지는 못하겠지만…


인터넷 쇼핑도 일과가 되었다. 수입은 줄었는데 시간이 많으니 계속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생각나 지출은 늘고 있다. 가게들이 문을 닫아 온라인 쇼핑으로 사니 매일같이 집으로 박스가 배달되어 온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마음을 딱 읽어 적시 적소에 친절하게 뜨는 광고들에 귀기울이며 성실하게 크레딧카드 번호를 입력하다보니 어느새 카드번호를 외워버려 카드를 꺼낼 필요도 없이 한방에 결제가 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은 수맥 탐지기와 유해파 측정기, 잡초 뽑는 기계와 같은 기계류를 주로 사고, 나는 친환경 세제부터, 블루라이트 차단용 안경, 책, 비타민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주문한다. 어디 입고 나갈데도 없는데 꽃무늬 원피스는 왜 자꾸 눈에 들어오는지…


첫 한달간 내리 질리도록 많이 봐서 그런지 이제는 TV 보는것은 딱 싫어져서 다행히 책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TV에 중독이 되어 바보가 되어가나 했는데 천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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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림에는 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많으면 그림을 실컷 그릴줄 알았는데… 스케치 하나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고 있다. 그나마 민화 교실을 할때는 내 그림을 그리진 못하더라도 물감이랑 붓을 만져는 봤는데 이젠 수업도 못하고 있으니 붓 잡아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이번 격리기간 동안 새로운 경험들도 많이 했지만, 내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선명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육아로 힘들 때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아무리 바쁘고 시간에 쫒기더라도 마음 속엔 늘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림을 못그리면 못견디는 사람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 그림 그리는 것이 우선 순위 제일 뒤쪽으로 밀려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나에게 그림은 전시 기한에 맞춰 하는 숙제나, 기분 내킬때 하는 취미생활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주로 할애하는 부분을 돌아보니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 보다 일상의 소소한 것, 특히 먹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구나 싶다. 하긴 거창한 목표없이 잘~먹고 잘~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모토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림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일상에 너무 충실히 젖어사느라 빠져나오지 못할 뿐, 여전히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에는 마음이 무겁고, 구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는 넘친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더이상 대지 못하니 장소를 탓해보자면, 똑같은 컴퓨터로 일을 해도 집 놔두고 카페에 나가 앉아 있어야 공부가 되듯이 작업실이 따로 필요한 이유가 이건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어느 시기가 지나 TV가 갑자기 보기 싫어져서 책을 읽기 시작했듯, 어느날 갑자기 그림을 몰아쳐 그릴 날도 오기를 바래본다. 익숙해진 격리생활도 이제 뉴욕이 순차적으로 오픈하며 곧 끝날테니 방콕 생활에 익숙해진 몸을 다시 추스려 새로운 생활리듬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 이 모든 변화에도 곧 잘 적응해나갈 것이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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