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와 뮤즈 (4) 모딜리아니와 잔느, 안나, 베아트리스
Artist & Muse <4> Amedeo Modigliani & Three Muses
모딜리아니의 뮤즈들: 잔느, 안나, 베아트리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뮤즈들. 잔느 에뷔테른(왼쪽부터), 안나 아흐마토바, 베아트리스 해이스팅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미남, 알콜과 마약중독, 플레이보이, 단 하루에 막을 내린 평생 단 한번의 개인전, 그리고 35세로 요절한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같은 록스타의 삶을 연상시킨다. 그의 부인이자 뮤즈 잔느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1898-1920)은 모딜리아니 사망 이틀 후 친정집 5층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 자살했다. 임신 8개월째였다. 고아가 된 외동딸 잔느 모딜리아니(1918-1984)는 이탈리아 고모와 조부모 집에서 부모에 대해 모른 채 자랐다. 딸 잔느는 미술사를 전공한 후 1958년 아버지 모딜리아니의 전기를 썼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918, 왼쪽)/ 자화상(1919)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올 무렵 번창했던 광산업자인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불운이 드리워졌다. 아메데오는 어릴 적부터 늑막염, 장티푸스, 폐결핵 등 병마에 시달리며 자랐다. 그림에 소질을 보인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 미술학교, 피렌체미술학교, 베니스비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6년 22세에 파리로 갔다.
그의 이름 아메데오(Amedeo)는 신이 사랑한 사람이라는 의미.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멜란콜리한 천사', '보헤미안 왕자'로 불리웠다. 미남에 위트 넘치고, 매력있었다. 검은 곱슬 머리에 우윳빛 피부에 깊고 검은 눈동자로 여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의 패셔니스타였다. 초콜릿 색의 코드로이 수트, 노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 같은 스타일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가난했지만, 늘 멋쟁이로 입고 다녀 주목을 끌었다. 세살 위의 친구 파블로 피카소는 모딜리아니가 "옷을 잘 입을 줄 하는 유일한 남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술에 취하면 소리 지르거나, 컵을 깨고, 옷을 벗거나, 웨이터를 모욕하는 주정도 부렸다.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
안나 아흐마토바/ 드로잉(1911)
1910년 4월 지성과 미모를 갖춘 한 러시아의 젊은 시인 커플이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린 후 파리로 신혼여행을 갔다. 훗날 노벨 문학상 후보에 두차례 오를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와 시인 니콜레이 구밀료프(Nikolay Gumilev)였다. 이 커플은 몽파르나스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당시 24세의 모딜리아니는 자석같은 매력의 아흐마토바에 홀딱 반했다. 신랑이 친구들과 점심 먹을 때 아흐마토바는 모딜리아니와 공원 데이트를 했다. 곧 아흐마토바는 상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이들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열애의 감정을 키웠다. 이듬해 아흐마토바는 다시 파리로 가서 모딜리아니와 재회한다. 모딜리아니는 이집트 미술에 심취했던 아흐마토바를 데리고 루브르박물관 이집트 갤러리에서 그녀를 모델로 그렸다. 작업실에서도 물론 그녀는 뮤즈였다. 누드를 포함, 아흐마토바 그림이 20여점 나왔다. 얼마 후 아흐마토바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영영 이별이었다. 이때부터 모딜리아니는 우울증이 생겼고, 마약에 빠지게 된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남편 구밀료프는 2921년 반혁명분자로 처형당했으며, 두번째 남편 쉴레이코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세번째 남편 니콜레이 푸닌은 강제수용소에서 눈을 감았다. 아흐마토바는 스탈린 체제 하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1960)와 절친 사이로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아흐마토바는 노벨상 후보에 두 차례 올랐다. 러시아의 문호는 196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모딜리아니는 왜 인물의 목을 길게 그렸을까?
아프리카 에쿠아도르 기니아의 탈(왼쪽부터), 모딜리아니의 여성 두상(1915). 아프리카 아이보리코스트의 탈과 모딜리아니의 잔느 에뷔테른 초상화(1918)
아티스트들에게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중요하다. 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인물의 목은 특출나게 길지 않았다. 그가 1910년부터 그림을 중단하고, 조각을 시작한다. 그는 파리의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Musée d'Ethnographie du Trocadéro)을 드나들면서 아프리카 가면, 고대 에투르스크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피카소 역시 원시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에서 인물들은 아프리카 가면처럼 목이 길다. 하지만, 1914년 모딜리아니는 체력이 딸리고, 돌가루가 날리며, 재료비가 비싼 조각을 중단하고 회화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그림 속에 긴 목에 가면처럼 눈동자가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모딜리아니의 시그내쳐가 됐다.
#영국 작가 베아트리스 해스팅스(Beatrice Hastings)
베아트리스 해스팅스(1918)/ (1915)/ (1916)
1914년 모딜리아니가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다섯살 연상의 영국 작가 베아트리스 해스팅스(1879-1943)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서른살, 알콜 중독에 빠져있었다. 파리 특파원이었던 해스팅스는 모딜리아니의 보헤미안적인 카리스마에 매료됐다. 이후 모딜리아니와 동거에 들어가 그의 모델이 됐다.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모델로 14점의 회화를 그렸으며, 런던 코톨드 갤러리가 소장한 앉아 있는 누드(Seated Nude, 1916)는 그 대표작이다. 모딜리아니는 해이스팅스를 만난 후 와인 대신 보드카같은 독주를 마시기 시작하며 중독의 늪에 빠졌다. 이들의 동거는 3년간 지속되다가 서로의 바람기로 헤어지게 된다.
런던에서 태어난 해스팅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성장했다. 영국으로 돌아가 기숙사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노, 노래, 승마를 즐겼다. 본명은 에밀리 앨리스 하이(Emily Alice Haigh)였지만, '뉴 에이지' 잡지에 정치, 문학평론을 쓰기 위해 필명으로 자신이 대학을 다녔던 도시 해이스팅스로 바꾸었다. 양성애자였던 해스팅스는 뉴질랜드 출신 소설가 캐슬린 맨스필드(Kathleen Mansfield, 1888-1923)와도 연인 사이였다. 맨스필드는 1923년 35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해이스팅스는 1943년 암와 투병하다가 주방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했다.
#프랑스 미술학도 잔느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잔느 에뷔테른/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장(1919)/ 테이트 모던 소장(1918)
모딜리아니와 말년을 함께 했던 최후의 뮤즈는 비극의 주인공 잔느 에뷔테른(1898-1920)이다. 1917년 봄 자학적인 알콜, 약물 중독자에 바람둥이, 폐결핵 환자 그리고 가난한 화가였던 모딜리아니 앞에 나타난 잔느는 19살의 소녀, 화가 지망생이었다. 파리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에뷔테른은 화가였던 오빠 앙드레의 소개로 몽파르나스에 드나들다가 모딜리아니를 만났다. 에뷔테른은 상냥하고, 수줍고, 세심한 미녀였다. 첫눈에 반한 이들은 에뷔테른 부모의 강렬한 반대 속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모딜리아니는 1916년부터 1919년 사이에 누드에 집중했다. 폴란드 출신 아트딜러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éopold Zborowski)가 후원자였다. 즈보로프스키는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었고, 모델을 소개했으며, 미술 재료를 공급했다. 이 시기 모딜리아니는 하루에 15-20프랑을 받으며 그렸다.
1917년 12월,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갤러리에서 모딜리아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열렸다. 누드화 7점 등 30여점을 전시, 오픈 첫날 수많은 관람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체모가 보인 누드화는 외설로 판정되어 하루만에 폐쇄했으며, 모딜리아니와 갤러리 주인은 체포되기 까지 했다. 그림은 단 한점도 팔지 못했다.
1917년 전시 포스터/ 누워있는 누드(Nu couché, 1917)
1918년 모딜리아니와 잔느는 요양차 니스로 이주했고, 딸 잔느가 태어났다. 니스에서 폴 기욤이 주최한 젊은 작가 그룹전에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1919년 봄 이들은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이 심해졌고, 약물남용으로 쇠약해졌다. 에뷔테른은 또 임신했다.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에 에뷔테른의 가족은 상심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틀 후인 26일 잔느는 아파트 5층 창문에서 투신자살 했다. 에뷔테른은 임신 8개월째, 그녀 나이 21세였다.
에뷔테른 가족은 모딜리아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딸을 모딜리아니의 묘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 잔느는 10년 후에야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모딜리아니의 옆에 묻히게 된다.
잔느 에뷔테른 자신도 화가였고, 그림을 남겼지만 오빠과 관리하고, 2000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2000년 베니스에서 열린 모딜리아니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에뷔테른의 그림이 대거 소개됐다. 하지만, 이 전시회에 소개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위작으로 판명됐고, 큐레이터는 감옥으로 갔다.
잔느 위베테른의 작품. 자화상(1916)/ 모딜리아니(1919)/ 죽음(1919)
한편, 태어난지 14개월만에 고아가 된 잔느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 1918–1984)는 아버지의 고향 리보르노에서 고모와 조부모에 의해 길러졌다. 그들은 잔느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에 대해 함구했다. 훗날 부모 이야기를 알게 된 잔느는 피렌체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아버지의 삶을 그린 책 'Modigliani: Man and Myth'(1958)를 출간했다.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는 1917년 전시에 소개됐던 '소파에 앉은 누드(Nu Assis sur un Divan)'가 나와 1천670만 달러에 팔렸다. 2015년 뉴욕 크리스티에선 '누워있는 누드(Nu couché)'가 1억7천40만 달러에 낙찰되며 당시 회화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