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 Muse <20> Andrew Wyeth, Christina & Helga 

앤드류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와 헬가

Andrew Wyeth/Christina’s World, 1948. The Museum of Modern Art/Helga in Braids, 1977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한 앤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 1917-2009) 작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1948)'는 미스테리 영화의 한 장면같은 분위기의 그림이다.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들판에 넘어진듯한 한 여인이 위의 멀리 떨어진 집을 바라보는 뒷 모습이 리얼하게 담겨 있다. 그녀의 갈망과 절망감이 동시에 묘사된 그림이다. 가는 벨트를 맨 분홍색 단아한 원피스 차림에 뒤로 묶은 검은 머리, 가녀린 팔과 흰 양말과 회색 단화를 통해 관람객은 크리스티나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 그녀를 도와주러 나타날까?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의 스릴러 만큼이나 수수께끼적이다. 영화 '현기증(Vertigo, 1958)'의 킴 노박을 모델로 상상해 보라. 또한, 1970-80년대 한국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누렸던 TV 시리즈 '초원의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처럼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펜주 화가 가문에서 홈스쿨링 

1961년경 스튜디오에서 앤드류 와이어스

먼저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는 누구인가? 

앤드류 와이어스는 1917년 7월 12일 펜실베니아주 채즈포드(Chadds Ford)에서 삽화가 N.C. 와이어스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이자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소로는 숲 속의 금욕적인 삶을 기록한 '월든'으로 톨스토이, 간디, 법정 스님까지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졌다. 때문에 앤드류 와이어스는 평생 소로의 작품을 비롯,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등 문학에 매료되었다. 아버지의 유명세로 집에는 소설가  F. 스캇 피츠제럴드와 무성영화 스타 메리 픽포드도 찾아왔다. 

앤드류는 홈스쿨 교육을 받았고, 그림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누이 헨리어트(Henriette)와 캐롤린(Carolyn)도 화가가 된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윈슬로우 호머와 토마스 잇킨스 회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37년 뉴욕의 맥베스 갤러리에서 수채화 1인전을 열었으며, 전 작품이 매진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Andrew Wyeth, Betsy, Maga's Daughter, 1966

이후 와이어스는 채즈포드의 쿠어너(Kuerner) 농장의 안나와 칼 쿠어너 부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1937년 자신의 22살 생일날 여름 별장이 있던 메인주 사우스쿠슁(South Kushing)에서 화가 밀리 제임스(Mele James)를 만나러 갔다가 17세였던 그의 딸 벳시(Betsy James)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듬해엔 결혼식을 올렸다. 벳시는 와이어스에게 '진짜 메인주'를 보여주겠다며 와이어스를 헤이톤 포인트(Hathorne Point)로 데려가 친구인 크리스티나와 아발로 올슨 부부를 소개했다. 그후로 올슨 가족은 그의 모델이 된다. '크리스티나의 세계' 속 여인은 바로 안나 크리스티나 올슨(Anna Christina Olson, 1893-1968)이 모델이었다. 그녀는 앤드류 와이어스의 뮤즈였다. 

#메인주 뮤즈, 안나 크리스티나 올슨 Anna Christina Olson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 Egg tempera on gessoed panel, 1948, Museum of Modern Art

1948년 앤드류 와이어스가 걸작을 그릴 당시 크리스티나 올슨은 와이어스보다 24살 연상, 55세의 중년 여인이었다. 올슨은 예전엔 소아마비에 걸린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후에 신경학자들에 따르면 유전자 중복으로 인해 손, 발, 말초신경의 정상적인 발달이 저하되어 손이 굽고 마비가 오는 질병인 샤르코-마리 투스(CMT, Charcot-Marie Tooth)를 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올슨은 하반신 장애로 종종 기어서 움직이곤 했다.  

와이어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리게된 계기는 어느 날 오후 별장 창문 밖으로 올슨이 들판에서 기어서 움직이는 모습은 본 후였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단순히 올슨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영감은 크리스티나였지만, 실제 모델은 와이어스의 젊은 부인 벳시였다. 당시 20대였던 벳시는 올슨보다 무려 30년 어렸다. 올슨은 화가의 모델이 되기에는 고통이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와이어스는 벳시의 머리와 몸통을 모델로 그렸다. 즉, 컨셉은 올슨으로부터 왔으며, 실제 모델은 부인 벳시였던 셈이다.  

작가는 어떤 의도로 그렸을까? 와이어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녀가 특별한 삶에서 정복의 의미를 입증하고 싶었다. 그녀의 세계가 육체적으로 제한되었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람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회화다. 어떤 목표도,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정신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Andrew Wyeth, Christina Olson, 1947/ Christina Olson, 1967

크리스티나 올슨은 완성된 그림을 보고 무척이나 흡족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앤디는 내가 원했던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지금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없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림으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1948년 맨해튼의 맥베스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됐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혹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그림에 대해 "(제 2차 세계대전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추상표현주의같은) 미적인 흐름을 무시한 싸구려 노스탤지아"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알프레드 바(Alfred Barr) 당시 뉴욕현대미술관(MoMA) 관장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당시 1천800달러(2019년 싯가 1만5천 600달러)에 구입해 뮤지엄 컬렉션으로 들여가게 된다. 와이어스는 이 그림으로 수입이 생겼고, 올슨 가족에게 선물을 제안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돈을 완강하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슨 가문은 계속 헐어빠진 농가에서 살았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 대해 비판적 시각도 많다. 와이어스가 장애자의 상황에서 착안했지만, 모델은 젊은 부인으로 대처한 그렸다는 점, 장애자의 분투로부터 간접적으로 돈을 벌었지만, 정작 크리스티나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1968년 세상을 떠난 크리스티나와 친구로 지냈다. 와이어스는 2008년 사망 1년 전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올슨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Andrew Wyeth, Winter, 1946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뉴욕파같은 주류에 소속되지 못했기에 아웃사이더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잭슨 폴락과 윌렘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가 뉴욕 미술계를 풍미하던 1940년대, 와이어스는 펜주와 메인주를 오가며 독자적인 리얼리스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와이어스는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을 비롯, 팝 아티스트, 미니멀리스트들이 도외시한 '사람'과 '풍경'을 치열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업주의, 정신주의라는 이즘에 가려졌던 전통적인 소재로의 회귀, 인본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는듯 하다.  

1948년 당시 미술 비평가들은 혹평했지만, 세월이 흘러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미국 미술의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이 그림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에서 우주인의 호텔방 안에 빈센트 반 고흐 작 '아를르의 다리'와 함께 걸려있으며,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도 등장했다.  

그림에 나오는 올슨 하우스(The Olson House) 사실 외양간과 떨어져 있다. 올슨 하우스는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메인주 로클랜드의 판스워스미술관(Farnsworth Art Museum)에서 관리하고 있다. 판스워스미술관은 앤드류 와이어스와 삽화가였던 아버지 N.C. 와이어스(Newell Convers Wyeth, 1882-1945), 화가 아들 제이미 와이어스(James Browning Wyeth, 1946- ) 등 와이어스 가족의 최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이웃집 뮤즈, 헬가 테스토프 Helga Testorf

Andrew Wyeth, Letting Her Hair Down(Helga), 1972/ Nude(Helga), 1976 

1986년 와이어스가 숨겨왔던 여인 그림 245점, 일명 '헬가 시리즈(Helga Series)'로 스캔달이 됐다. 그림의 주인공은 독일 출신의 헬가 테스토프(Helga Testorf, 1917-2009)로 와이어스의 고향 칼 쿠에너의 농장에 간병인으로 드나들던 여인이었다. 와이어스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부인과 헬가의 남편 모르게 그녀를 모델로 그렸다. 다수는 누드화였다. 때문에 이들이 불륜 관계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했다. 무뚝뚝한 표정의 헬가는 와이어스에게 비밀의 뮤즈였다. 

 

1917년 독일에서 태어난 헬가 테스토프는 1955년 아버지가 지정해준 프로이센 개신교 수녀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병에 걸려 수녀원을 나왔다. 그리고, 만하임에 살며 간호학을 공부하면서 안마사 자격증을 땄다. 1957년 미국인 존 테스토프와 결혼, 필라델피아를 거쳐 채즈포드로 이주했다. 여기서 네자녀를 키우며 이웃의 칼 크루너 농장주와 노인네들을 보살피다가 1971년부터 와이어스의 모델이 된다. 

Andrew Wyeth, Wind from the Sea, 1947.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와이어스와 헬가는 서로의 배우자에게 비밀로 하면서 작업했다. 부인 베시는 와이어스의 매니저로 아버지처럼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시아버지의 미움을 사게 된다. 벳시는 와이어스에 대해 "나는 감독이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매니저 부인 몰래 그렸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45점의 회화와 200여점의 드로잉 중 다수가 누드였고, 그림은 와이어스의 제자 집에 숨겨두었다가 1986년 세상 밖으로 나왔다.   

훗날 와이어스는 헬가 시리즈에 대해 "나와 여러 화가들의 차이점은 나의 경우는 모델과 개인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나는 매혹되어야 한다. 빠져야 한다. 그것이 내가 헬가를 봤을 때 느낀 점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헬가는 와이어스와 가족처럼 지냈고, 노년의 와이어스를 돌보아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와이어스의 90세 생일 파티에도 참석했다.   

2017년 앤드류 와이어스 탄생 100주년을 기해 발행된 우표 세트

헬가 시리즈는 1986년 필라델피아의 백만장자 출판인 레오나드 E. B. 앤드류스가 구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내셔널갤러리(DC)를 비롯, 보스턴미술관, 휴스턴뮤지엄, LA카운티뮤지엄, 샌프란시스코미술관, 디트로이트뮤지엄 등지에 순회 전시됐다. 

와이어스는 1963년 존 F. 케네디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같은 해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2007년엔 아마추어 화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예술메달상(National Medal of Arts)을 받았다. 와이어스는 2008년 91세에 고향 채즈포드에서 세상을 떠났고, 올슨이 잠들어 있는 쿠슁에 묻혔다.

2017년 앤드류 와이어스의 고향인 채스포드의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Brandywine River Museum of Art)에서는 100주년 회고전(6/24-9/17)이 열렸으며, 12종 우표 세트가 발행됐다. 부인 벳시 와이어스는 올 4월 98세로 사망했다. 이들 사이엔 2남을 두었으며, 둘째 제임스 와이어스도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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