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출신 뉴욕 세자매 성공의 비결
이아라 리, 주사라 리, 주피라 리
"롤 모델은 엄마, '빨리 빨리' 정신 배웠지요"
이아라(Iara), 주사라(Jussara), 주피라(Jupira)… 아마존 인디언의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성은 이(Lee)씨다. 브라질 사웅파울로에서 한인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이씨 세 자매는 80년대 후반 뉴욕에 왔다. 그리고, 각각 영화감독/인권운동가(이아라 리), 패션디자이너(주사라 리), 그리고 레스토랑 대표(주피라 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웨스트빌리지에서 재회한 세 자매. 왼쪽부터 막내 주피라, 장녀 이아라, 차녀 주사라씨. Photo: Sukie Park
큰 언니 이아라 리(46)씨는 2010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난민들을 위한 국제구호선에 승선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스라엘 특공대의 공격을 촬영해 나와 UN에서 공개한 인물이다. 1990년대 테크노팝의 영향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이아라씨는 2003년 이라크전 발발 후 카메라를 들고 세계의 유목민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화약고’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돌며 문화로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저항의 문화(Culture of Resistance)’ 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둘째 패션디자이너 주사라 리(45)씨는 1991년 자신의 이름을 딴 ‘Jussara Lee’를 론칭해 고급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으며, 막내 주피라 리(40)씨는 1998년부터 웨스트빌리지의 한적한 베드포드스트릿에서 브라질 토속요리 전문 레스토랑 ‘카사(Casa)’를 운영해왔다.
한인의 DNA를 갖고 브라질에서 성장한 후 뉴욕에서 온 세 자매. 이들이 각각 영화•패션•식당계에서 이룬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최근 브라질로 귀국했던 이아라씨가 남편 조지 건디 3세와 뉴욕에서 하루 경유, 시리아로 향하는 길에 두 동생들과 재회했다. 지난 11일 오전 웨스트빌리지의 ‘카페 클루니’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난 세자매는 NYCB와의 인터뷰에선 영어를, 서로간에는 포르투갈어를 썼다.
돈보다 중요한 건 '삶의 질'
-NYCultureBeat(NYCB): 주피라의 식당 카사를 두고, 왜 여기서 모였나.
-주피라: 난 남의 식당에 잘 간다. 난 많이, 잘 먹는 편이다.
-이아라: 주피라는 식당에서 돈 벌어서 좋은 식당 찾아 다니며 먹는다! 주피라는 삶의 질의 중요시한다. 사람들이 카사 체인을 열라고 하지만, “백만장자가 되기보다는, 작은 레스토랑 하나만 운영하며, 굿 라이프를 즐기고 싶다”고 말한다.
-주피라: 백만장자가 되어 시간이 없는 것보다 낫다!
-이아라: 주피라는 브라질에서 두 달 휴가를 보내고 얼마 전에 왔다. 주피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안다.
-NYCB: 스물여섯살에 식당 대표가 됐는데, 누구 밑에서 일해본 적 없나.
-주피라: 나도 때때로 직원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절친한 친구는 때가 되면 고향으로 휴가 가서 즐기는데, 난 식당 일로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NYCB: 그래도 사장이니 장점이 많을 텐데.
-주피라: 자유가 좀 더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보스라서 사람들이 뒤에서 욕을 한다(웃음)!
북한에서 전통과 문화를 배우고 싶다는 영화감독 이아라씨.
패션, 영화 공부하러 뉴욕에
-NYBC: 어떻게 뉴욕에 오게 됐나.
-주사라: 내가 제일 먼저, 1987년 패션 공부하러 왔다.
-NYBC: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주사라: 자라면서 일본 패션잡지 ‘논노’’앙앙’을 즐겨 봤다. 아버지가 미술에 관심이 많으셔서 영향을 받은 셈이다.
-이아라: 그리고, 난 사웅파울로 영화제에서 일하다가 카메라 뒤에 서기로 결정한 후 1989년 영화 공부하러 왔고,
-주피라: 난 고등학교 때 사랑에 빠져서 남자친구가 있었다. 열일곱살 때였는데, 엄마가 우리 사이를 떼어놓으시려고, ‘6개월만 뉴욕에 공부하러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왔는데, 엄마가 반대해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NYCB: 남자 친구는 어떻게 됐나.
-주피라: 결혼했는데, 지금 나와 좋은 친구 사이다.
-이아라: 주피라는 사귀었던 남자들 모두와 친구로 남는다. 무척 좋은 기술이다!
-주피라: 내 남자 친구는 질투하지만…
한국인의 근면성과 효율성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디자이너 주사라씨.
우리는 뉴욕의 '클럽 키드'
-NYCB: 그래서 세 자매가 모두 뉴욕으로 왔는데, 당시 뉴욕 분위기는.
-주사라: 클럽이 많았다.
-이아라: 주사라는 클럽 키드(club kid)였다!
-주피라: 우리는 플랫폼 슈즈를 신었다. 주사라는 뉴욕 클럽의 도어맨들과 모두 잘 알았다! 그래서 우린 한번도 줄 선 적이 없다.
-이아라: 너 들어와, 너도 들어와, 너도 들어와!(You in, You in, You in!)
-NYCB: 브라질에서 부모님이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다고 들었는데,
-주사라: 맞다. 아버지를 통해 도나 섬머, 데이빗 보위 등 디스코 음악을 즐겨 들었다.
음과 양처럼 한국성과 브라질성을 겸비한다는 주피라씨.
자매간 라이벌 의식은 당연
-NYCB: 어릴 때 모범생이었나.
-주사라: 난 서퍼(surfer)들과 어울려 다녔다! 언니가 공부를 잘했다.
-NYCB: 자라면서 자매끼리 라이벌 의식이 있었을 것 같다.
-주사라: 우리가 어렸을 땐 늘 싸웠다. 난 중간에서 관심도 많이 받지 못했다.
-이아라: 엄마는 우리가 논쟁할 때 늘 내가 옳다고 하셨다. 사실 주사라가 늘 잘못이었다. 주사라는 늘 성적이 나빴는데, 성적표를 조작하다가 늘 들통이 났다!
-주피라: 그런데, 싸울 때 이아라 언니는 반응하지를 않는다.
-이아라: 난 주피라에게 늘 엄마와도 같았다.
-주피라: 엄마가 늘 일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여섯 살 위인 이아라 언니는 별명이 ‘헬로 키티’였다. 언니가 내 기저귀도 갈고, 먹여주고 했다. 언니가 나 때문에 고생을 너무 해서 애기가 없는 것 같다.
브라질 사회 통합되려 한국어 안써
-NYCB: 브라질에서 자랄 때 한인들이 있었나..
-이아라: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브라질 사회에 통합되기 위해서 가능하면, 한국어를 쓰지 않았다. 우린 집에서 한국어를 잘 했었지만… 그런데, 브라질 아이들이 ‘오! 차이나, 차이나!’하면서 놀려대서 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브라질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피라: 맞다. 우린 한국어 쓰지 않았다.
-NYCB: 집에서 한식을 먹었나.
-주사라: 물론이다. 엄마가 김치찌개 등 한식을 늘 먹고, 한국의 전통과 예절을 잘 가르쳐주셨다. 그러지만, 한인사회에 통합되지 않았다. 브라질 사회에 통합되길 원했다.
-이아라: 난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시간을 오래 보냈지만, 한국에서 뿌리를 찾고 싶어 1년여 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 있으면서 난 중동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예멘, 레바논 등지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아라씨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저항의 문화' 중에서.
한국+브라질+뉴욕=세 자매
-NYCB: 자신 안에 한국인/브라질인/뉴요커의 성향은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주사라: 전에 신디 황의 ‘교포(Kyopo)’ 사진 프로젝트에서 인터뷰할 때 “내 안의 10% 한인, 20% 미국인, 나머지는 브라질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한국인의 감성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문제는 우리가 한국어를 못한다는 것. 그러나, 내 맘 속엔 특별한 한국적인 성향이 있다.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이아라: 난 남한보다 북한 사람들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남한은 너무 미국화한 것 같다.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콘서트에 갔을 때 북한이 뭔가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남한과 북한 중 어디서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북한을 택할 것이다.
-NYCB: 자유가 없는데도.
-이아라: 전통과 문화에 대해 배우고 싶다.
-주사라: 언니가 생각할 수 없는데도!
-주피라: 생각하는 자유가 없어! 자유가 중요해!
-이아라: 북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고립되어 있다.
-주피라: 난 음과 양처럼, 한인과 브라질인의 성향을 고루 갖고 있다고 본다. 브라질의 개방적인 성향과 한국의 윤리의식, 근면성, 게으름 피우지말 것 등을 다 중요시한다.
-주사라: 가장 큰 한인 DNA라면 효율성이다. ‘빨리, 빨리!’ 빠른 시간 내에 최대의 효과를 이루는 성향이다. 그것이 이민자들 성공의 비결이다. 난 지난 20년간 패션 사업을 했고, 주피라도 15년, 이아라는 20년 이상 영화계에 있었다. 한인들은 포커스를 잘 하며, 더 잘 하는 방법을 안다.
-NYCB: 한 우물만 파라?
-주사라: 맞다!
미니멀하고 우아한 디자인이 주사라씨의 컬렉션 중에서.
우아한 디자인 주사라, 다민족 취향 이아라
-NYBC: 자라면서 한국적인 것 배웠나.
-이아라: 사실 난 태권도 황색 벨트 소유자다. 19년 전, 연세대학교에서 벨트를 땄다.
-주피라: 난 막내였기 때문에, 언니들이 어떻게 하는가 눈치를 봤다가 더 잘 했다!
-주사라: 주피라는 어렸을 때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엄마 사업이 안정되면서 명품도 사주셨고, 응석받이였다.
-NYCB: 한국에선 세 자매가 있으면,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는데.
-주피라: 정말? 6년 차이가 나는데도? 주사라는 늘 내 옷을 갖다 입었다.
-주사라: 그래서 내가 직접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디자이너가 된 셈이다!
-주피라: 그런가 보다!
-NYCB: 언니와 동생이 주사라가 디자인한 옷을 잘 입나.
-주사라: 종종 입는다. 내가 오늘 입은 옷 내가 만든 것이다.
-이아라: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쿠르디스탄의 뮤지션이 선물로 준 거다.
-주사라: 이아라 언니의 패션은 문화적 다민족의 취향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를 돌며 평화운동을 하는 이아라씨.
예술적 기질은 아버지의 피
-NYCB: 어떻게 세 자매가 영화/패션/음식에서 각자 일을 하게 됐나.
-이아라: 정말 신기하다! F(film)/F(fashion)/F(food) 3F다! 아버지가 식당을 하셨고,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주피라: 아버지가 무척 예술가 타입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퇴학 당할 뻔했는데, 산업디자인대회에서 1등을 해서 남았다고 한다.
-이아라: 우리 부모님은 1965년 브라질로 이민한 제 1세대 한인 이민자다. 우리 모두 브라질에서 태어났다.
-NYCB: 뉴욕의 한인타운에도 종종 가나.
-주피라: 물론이다. 슈퍼마켓 한아름에도 가고, 우리가 대학에 있을 때 공부하다가 감미옥 설렁탕 같이 먹으러 다녔다. 그러면 기운이 난다.
-이아라: 서울에 가보니 발 맛사지도 하는 북 카페가 있더라.
-주피라: 우와! 우린 때 미는 것도 좋아한다. 이태리 타월로.
-주사라: 스팀 사우나를 좋아하지만, 내 타월을 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이파네마 비치. 사웅파울로에서 자란 세 자매가 그리워하는 것은 비치, 사람, 음식이다. SP
브라질은 우리의 고향
-NYCB: 브라질 떠나 뉴욕에서 살면서 가장 그리운 것은.
-주사라: 비치!
-주피라: 비치와 브라질 사람들… 너무 좋다.
-이아라: 그리고 음식. 난 밥과 콩(beans and rice)를 먹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일 밥과 콩을 먹어야 한다!
-NYCB: 카사에서 먹을 수 있을텐데…
-주피라: 그래도 브라질에서 먹는 건 다르다.
-이아라: 브라질은 천연 자원이 많다!
-주사라: 요즘엔 더구나 GMO(유전자 조작 생물) 등으로 대량 생산하고 있지 않나.
-NYCB: 브라질에선 수퍼푸드라고 불리우는 ‘아사이(açaí)’도 잘 알려져 있는데.
-주사라: 내 이름 주사라는 바로 아사이 베리가 나오는 야자수 나무에서 따왔다!
-주피라: 우리 식당에선 브런치에 아사이 메뉴가 있다.
주피라씨의 레스토랑 '카사'의 콩과 육류 요리 페조아다. SP
"퓨전은 싫다, 정통 음식이 좋다", 주피라
-NYCB:패션 브랜드 주사라 리의 디자인 컨셉은.
-주사라: 미니멀 디자인, 트렌디보다는 굿 퀄러티를 중요시한다. 소수 제작하며, 절대 할인하지 않는다. 금융위기에도 우리는 비즈니스에 영향이 별로 없었다.
-주피라: 따 봉! 따 봉!
-NYCB: 주피라, 식당 주인으로서 모모푸쿠에 대한 생각은
-주피라: 데이빗 장은 톱 5 요리사다. 그런데, 한식은 아닌 것 같다.
-NYCB: 레스토랑을 한식과 퓨전하는 것은.
-주피라: No! 카사는 브라질의 가정용 요리를 서브한다. 그리고, 난 정통 한식을 좋아한다. 육개장 등 진짜 한식말이다. 뉴욕에 새로 생기는 식당에 관심이 많다. 헬스키친(단지)과 트라이베카(정식) 식당 이야기도 들었다.
-NYCB: 한국영화도 보나
-주사라: 영화 ‘마더’ 정말 좋았다.
-주피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친구’다! 너무 재밌다!
-이아라: ‘나쁜 남자’를 잘 봤다. 감독(김기덕)도 만났다.
뉴욕에 와서 성공한 세 자매에게 롤 모델은 엄마다.
남은 것은 엄마에게 효도하는 일
-NYCB: 엄마를 브라질에 두고 셋이 다 떠나왔는데.
-주사라: 엄마가 다시 뉴욕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우리 모두를 보내셨다. 희생하시면서 우리에게 교육시켜주셨다. 사립학교 보내주시고, 유학 보내시고…
-NYCB: 어떻게 효도하나.
-주사라: 우리가 신문에 나면 좋아하신다.
-주피라: “엄마 우리 TV에 나왔어!”
-NYCB: 오래 전에 세 자매가 뉴욕타임스에 나왔다.
-주사라: 내가 최근 숍을 웨스트빌리지로 옮겼는데, 내일 뉴욕타임스가 가게에 온다. 엄마가 무척 좋아하실 것이다!
-NYCB: 계획은.
-주피라: 브라질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엄마를 보러 71세.. 1년에 1-2번 본다.
-이아라: 엄마가 10년 더 사신다 해도, 겨우 10번이다. 우리가 더 자주 뵈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뉴욕에 아파트를 사주셨다. 정말 좋은 엄마다.
-주피라: 엄마의 유일한 실수는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한국의 제임스 딘’과 결혼하신 것이다.
-NYCB: 엄마가 주신 교훈은.
-주사라: 남자 볼 때 얼굴만 따지지 말아라!
-주피라: 엄마가 조지(이아라씨 남편)를 정말 좋아한다. 엄마 생신 때 오키드 선물했는데, 정말 아끼신다!
이아라씨는 전 아이스하키 구단주이자 영화제작자인 남편 조지 군드 3세(George Gund III)와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콘서트도 후원했다. SP (*조지 군드 3세는 2013년 7월 위암으로 별세했다.)
-이아라: 난 남편감으로 아버지 타입을 찾았다. 그래서 조지와 결혼했는데, 내가 엄마처럼 됐다!
-NYCB: 누가 롤 모델인가.
-주사라: 단연 우리 엄마다. 모두들 유명인사를 들지만, 왜 엄마를 두고 다른 데서 찾나. 우리 엄마는 강하고, 단호하고, 높은 도덕성이 있는 분이다.
-이아라: 맞다! 엄마는 정말 현명하시다!
-주피라: 맞다!
☞이아라 리(Iara Lee)10대에 사웅파울루국제영화제에서 어씨스턴트와 프로듀서로 일했다. 뉴욕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테크노팝에 대한 다큐멘터리 ‘모듈레이션’, 인공물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인조쾌락’을 연출했다. 새너제이 하키팀 ‘샤크스’의 전 소유주였던 남편 조지 건드 3세와 문화로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네트워크 ‘저항의 문화(Cultures of Resistance Network)을 설립했다.
www.CulturesOfResistance.org.,
☞주사라 리(Jussara Lee)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후 1991년 패션 브랜드 ‘Jussara Lee’를 론칭했다. 우아하고, 심플하며, 고급스러운 컬렉션으로 주목 받고 있다. 남성복/여성복/웨딩드레스/커스텀 디자인도 한다. 최근 부티크를 미트패킹디스트릭트에서 웨스트빌리지로 옮겼다. www.jussaralee.com.
☞주피라 리(Jupira Lee) 열일곱살인 1989년 뉴욕 행, 파슨스와 FIT에서 패션을 전공했다. 1998년 웨스트빌리지에 브라질 요리 전문 레스토랑 카사를 오픈했다. www.casarestauran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