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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s of New York <18> Madison Square Garden drama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왜 '정원(the Garden)'으로 불리우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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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화이트가 설계한 구 매디슨스퀘어 가든, 1890. 건축가 화이트는 이 가든의 극장에서 질투심에 불타는 부호의 총격으로 최후를 맞았다. 

 

마침내 뉴욕 닉스(New York Knicks)가 7년만에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004년 이후 부진했던 뉴욕 프로농구팀이 브루클린 네츠(Nets)와 나란히 동부 8강이 되어 맨해튼 한인타운 인근 펜스테이션(Pennsylvania Station) 지상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 MSG)에서 경기를 하게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어있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이제 뜨거운 뉴요커들의 응원 열기로 가득찰 것으로 보인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일명 더 가든(The Garden)은 프로 농구와 프로 아이스하키 팀(뉴욕 레인저스) 뿐만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복싱 매치,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마이클 잭슨, 마돈나, 롤링스톤스, 엘튼 존, 빌리 조엘, 플리트우드 맥, 사이먼 앤 가펑컬 그리고 밥 말리까지 유명 뮤지션들이 콘서트를 열었던 명소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태디움 겸 공연장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그러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가든-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파크(Madison Square Park)와 혼동되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역사와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웠던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 살인 사건에 얽힌 이야기다. 

 

 

#1, 2, 3, 4차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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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타운 인근 매디슨 스퀘어 가든 Photo: Wikipedia

 

중국 식당에 Garden(정원, 庭園)을 의미하는 원자로 끝나는 이름(북경원, 상춘원, 중화원, 영춘원...) 등이 붙는다. 뉴욕에선 극장 이름에 Garden을 종종 붙였다. 로어맨해튼 배터리 파크의 군사요새 캐슬 클린턴(Castle Clinton)은 1820년부터 1850년까지 '캐슬 가든(Castle Garden)'이라는 이름의 공연장으로 운영됐다. 1820년대 소호 브로드웨이와 프린스 스트릿엔 극장 '니블로스 가든(Niblos's Garden)'이 오픈했다. 뮤지컬 '캐츠'와 '맘마 미아!'가 롱런한 극장은 브로드웨이 50스트릿의 '윈터 가든 시어터(Winter Garden Theater)'다. 

 

사실 현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네번째 건물이다. 오리지널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1879년 현 매디슨 스퀘어 파크 자리인 26스트릿 &매디슨 애브뉴에 건축됐다. 이곳은 원래 뉴욕과 할렘 철도의 차고로 운영되다가 1871년 42스트릿 그랜드 센트럴역으로 옮겨갔다. 1874년 이곳을 서커스단장 P. T. 배넘이 매입해 '그레이트 로만 히포드롬(Great Roman Hippodrome)'이라 명명하고, 서커스와 공연장으로 운영했다. 당초 지붕이 없었던 이 공연장은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876년 음악단장 패트릭 길모어가 인수해서 '길모어 가든(Gilmore's Garden)'으로 바꾸어 플라워쇼, 미인대회, 콘서트, 웨스트민스터케널클럽(WKC) 독쇼, 권투 경기 등이 열렸다. 이후엔 W. M. 타일슨이 인수해 테니스, 경마학교, 아이스 링크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1879년 5월 31일 이곳을 소유했던 철도 재벌 코모도어 밴더빌트가 사망한 후 그의 손자 윌리엄 키쌈 밴더빌트가 운영권을 쥐면서 이름을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바꾸었다. 매디슨은 미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이자 4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1751-1836)을 따서 지었다. 이에 따라 거리 이름도 매디슨 애브뉴가 되었다. 밴더빌트의  야심은 MSG를 스포츠 경기장, 컨벤션 센터 겸 경마 대회, 복싱장, 자전거 대회, 서커스장 등으로 복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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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화이트 설계 매디슨 스퀘어 가든 타워의 다이애나 동상. 철거 후 필라델피아 뮤지엄의 소장품이 됐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1879

 

그러나, 지붕이 없는 '가든'은 여름엔 너무 무더웠고, 겨울엔 얼어붙어 4계절 운영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이에 따라 새 스태디움을 건축하기 위해 당대 명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Stanford White)를 기용하고, 1889년 여름 오리지널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철거되기에 디른다. 그리고, 500만 달러가 투여된 두번째 MSG가 1890년 뉴욕에서 두번째로 높은 건물(최고 건물은  New York World Building)로 오픈했다. 이때 화이트는 자신과 절친한 친구였던 조각가 어거스터스 세인트 고든스(Augustus Saint-Gaudens, 1848-1907)에게 위임한 '다이애나(Diana)'를 타워 꼭대기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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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뮤지엄의 '다이애나'

 

1926년 스탠포드 화이트의 '가든'은 철거되고, 이 자리에 울워스 빌딩의 건축가 캐스 길버트(Cass Gilbert)가 설계한 보험회사 뉴욕 라이프 빌딩(New York Life Building)이 세워지게 된다. 조각 '다이애나'는 1932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으로 기부됐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아메리칸 윙에도 '다이애나'(1928년 캐스트), 프린스턴대 미술관(1987년 캐스트)가 전시되어 있다. 

 

세번째 MSG는 웨스트사이드(8애브뉴 49스트릿)에 극장 전문 건축가 토마스 W. 램(Thomas W. Lamb)의 설계로 지어졌다. 1만8천496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권투 경기가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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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권투 전성기의 메카였다. 1971년 알리 대 프레이저 '세기의 싸움'.

 

네번째 MSG는 1968년 맥킴, 미드 & 화이트가 설계한 보자르 양식의 오리지널 펜 스테이션을 철거한 후 그 위에 세워진 모던 빌딩이다. 펜스테이션 철거는 뉴요커들을 분노케했으며, 뉴욕시 랜드마크보존위원회(NYC Landmark Preservation Committee)가 설립된다. 1968년 2월 새 펜스테이션 오픈했을 때 예일대 건축사학자 빈센트 스컬리는 "하나는 신처럼 도시에 들어섰고, 지금 하나는 쥐처럼 잽싸게 움직인다"고 비판했다. 

 

찰스 럭맨(Charles Luckman)이 설계한 펜스테이션 위의 현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약 2만여명을 수용한다. 농구, 아이스하키, 권투를 비롯 스포츠와 콘서트, 독쇼(WKC Dog Show) 등 이벤트가 열리는 복합 스태디움이다. 필자는 사이먼 & 가펑컬(Simon & Garfunkel)와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재결합 콘서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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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NBA 뉴욕 닉스와 토론토 랩터스 경기

 

1971년 3월 8일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무하마드 알리 대 조 프레이저의 헤비급 챔피언 복싱 매치는 프레이저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세기의 싸움(The Fight of the Century'는 세계 3억명이 시청했으며, 4천500만달러의 수입을 거두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프로농구팀 뉴욕 닉스의 홈 구장으로 가장 유명하다. 익스는 1970년 NBA 챔피온쉽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4년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닉스는 마이클 조단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의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휴스턴 로켓에 3:4로 패하고 말았다. 여전히 가든은 NBA의 메카로 꼽히며, 모든 농구 선수들이 뛰고 싶어사는 스태디움이 되었다. https://www.thegarden.com

 

 

#세기의 재판: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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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와 그의 옛 애인, 그리고 부호의 아들. 스탠포드 화이트/ 이블린 네스비/ 해리 소오

 

오리지널 펜 스테이션, 워싱턴 스퀘어 개선문,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촬영지였던 뉴포트의 로즈클리프 맨션 등 설계로 유명한 건축회사 맥킴, 미드 & 화이트(McKim, Mead & White)의 스탠포드 화이트는 매디슨 스퀘어 시어터에서 드라마틱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1853년 뉴욕에서 셰익스피어 학자 리처드 그랜트 화이트와 알렉시나 블랙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스테인드글래스 아티스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와 존 라파쥬, 센트럴파크 조경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화이트는 정식으로 건축학 교육을 받지 않고, 18살 때부터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가 헨리 홉슨 리처드슨의 조수로 6년간 수련했다. 

 

1878년 유럽에서 1년 반 동안 여행하면서 건축 양식에 대해 견습하고 돌아왔다. 이듬해엔 찰스 폴른 맥킴(Charles Follen McKim), 윌리엄 루터포드 미드(William Rutherford Mead)와 함께 건축회사 맥킴, 미드 앤 화이트를 설립했다. 6살 위의 맥킴은 하버드대를 거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헨리 홉슨 리처드슨 아래서 일했고, 7살 위의 미드는 노위치대와 앰러스트대를 거쳐 건축가 조지 플레처 밥를 사사했다. 

 

키가 훤칠하고, 콧수염을 기른 스탠포드 화이트는 31살에 9살 어린 롱아일랜드 갑부 가문의 딸 베씨 스프링스 스미스와 결혼했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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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화이트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 옥상의 뮤지컬 극장에서 살해된 사건을 다룬 '뉴욕 아메리칸'지. 

 

화이트는 사실 소아 성애자로 지하 남성들의 섹스 서클 '유니온 클럽'의 멤버였다. 고가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했던 화이트의 24스트릿 맨션에는 녹색 벽이 칠해진 거울방에 빨간 벨벳의 그네도 설치됐다. 1901년 48살의 유부남 스탠포드 화이트는 16살 짜리 이블린 네스비(Evelyn Nesbit)와 관계를 맺으면서(*네스비는 샴페인과 약물로 성폭행했다고 주장) 뉴욕 화가와 사진가들에게 모델로 소개시켜주었고, 그녀의 가족을 호텔로 이주시켰으며, 아들의 교육비로 내주는 스폰서가 됐다. 화이트의 맨션에는 소녀들이 드나들며 뉴욕 엘리트들과 난교가 행해졌다. 화이트는 자신이 정복한 소녀들의 이름을 'little black book'에 기록했다. (*화이트는 제프리 엡스틴의 롤 모델이었을까?)  

 

1905년 네스비는 할리우드 스타 존 배리무어의 청혼을 거절한 후 피츠버그의 석탄, 철도 재벌가문의 해리 K. 소오(Harry Kendall Thaw)와 결혼했다. 정신질환 전력이 있던 소오는 질투심에 불타 화이트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화이트는 이미 다른 애인이 있었고, 소년티가 나는 소오를 광대, '펜실베니아 퍼그(개)'라며 무시했다.

 

1906년 6월 25일 화이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 루프 시어터에서 열릴 '마드모아젤 샴페인(Mam'zelle Champagne)' 개막 공연 이전 인근 레스토랑 마틴(Martin's)에 저녁식사를 하러갔다. 마침 식당엔 소오와 네스빗도 와 있었다. 모두 뮤지컬을 보러 갔다. 공연이 클라이맥스에서 "I could Love a Million Girls"가 흐르는 동안 소오는 벌떡 일어나 총을 들고 화이트의 좌석으로 가서 3발을 발사했다. 화이트는 얼굴에 2발, 어깨에 1발의 총상을 입고 즉사했다. 소오는 "난 당신이 내 와이프를 망쳤기 때문에 저질렀어!"라고 소리쳤다. 관객들은 처음 이 사건이 뮤지컬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화이트가 죽은 것이 분명해지자 혼란에 휩싸였다. 

 

해리 소오는 1급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됐다. 미 언론은 '세기의 재판'으로 부르며 선정적인 추측과 가십 기사를 쏟아냈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니켈로데온 시어터에서 영화 '루프탑 살인'을 상영했다. 결국 소오는 배심원들의 의견 불일치로 평결을 내지 못하고, 정신이상에 의한 무죄로 판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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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콘서트를 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퀸, 마돈나의 포스터.

 

스탠포드 화이트의 친구였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자서전에서 화이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열렬하고, 바지런 떨고, 게걸스럽고도 무자비하게 어린 소녀들을 사냥해 파괴로 몰고갔다."

 

후대에 스탠포드 화이트의 전기작가들은 조각가 어거스터스 세인트-고든스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화이트가 양성애자였으며, 이 때문에 맥킴, 미드 & 화이트 회사가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화이트 살인사건은 E. L. 덕토로우의 소설 '래그타임(Ragtime)', 밀로스 포만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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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5.31 23:28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역사와 변천사를 잘읽었습니다. 지금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있기까지는 유명한 건축가인 스탠포드 화이트를 비롯해서 네번째로 만들어졌음을 알았습니다. 지붕이 생긴 경위도 알게됐습니다. 사이먼과 가펑클 듀오의 공연을 이곳에서 보셨다니 부럽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The Sound of Silence"도 직접 들었겠네요?
    통일교 문선명씨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빌려서 부흥회를 했다고 하네요. 방탄소년단이 여기서 공연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