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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fterlives: Recovering the Lost Stories of Looted Art <2> 

 

쥬이시뮤지엄 나치약탈 환수 미술품 특별전(8/20-1/9, 2022)

마티스, 피카소, 세잔, 샤갈, 클레, 쿠르베, 피싸로,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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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lives: Recovering the Lost Stories of Looted Art, The Jewish Museum. 2021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 학살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미술품과 문화재를 약탈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술품 100만여점과 도서 250만권이 회수됐다.  

 

맨해튼 쥬이시뮤지엄에서 열리는 '여생: 나치 약탈 미술품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서 Afterlives: Recovering the Lost Stories of Looted Art'(8/20-1/9, 2022) 전시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 폴 세잔, 피에르 보나르, 구스타프 쿠르베, 폴 클레, 카미유 피싸로, 프란츠 마크 등의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약탈되었다가 환수된 미술품을 소개한다.

 

이 전시는 예술가의 자유혼이 담긴 그림들이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 새 삶을 찾게 되었는지 그림 밖의 스토리를 전해주고 있다. 뉴욕컬처비트는 이 전시에서 주목할만한 약탈 미술품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Raiders of Lost Art & Stories <2>

 

#4 마티스, 소녀와 기타(1939) & 데이지꽃(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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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Matisse(1869–1954), Girl in Yellow and Blue with Guitar, 1939, Oil on canvas, Art Institute of Chicago, Brooks McCormick Estate/ Daisies, 1939, Oil on canvas Art Institute of Chicago, gift of Helen Pauling Donnelley in memory of her parents, Mary Fredericka and Edward George Pauling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Art Institute of Chicago)가 소장한 이 두 작품은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기 직전, 마티스가 완성했다. '노랑과 파랑색 옷에 기타를 든 소녀(Girl in Yellow and Blue with Guitar, 1939)'는 노란 상의와 파랑 치마 차림에 기타를 잡고 앉아 있는 소녀가 강렬한 검은색 윤곽으로 두드러진다. 기타는 음악광이었던 마티스의 취향을 보여준다. 배경의 붉은색은 MoMA가 소장한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The Red Studio, 1911)'을 떠올린다.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에게 영향을 준 그림이다.

 

한편, '데이지 꽃(Daisies, 1939)'은 한 캔버스 안에 3점의 그림이 들어 있다. 핑크 누드의 여인과 상념에 잠긴 붉은 바탕의 소년(?) 그리고 화병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데이지꽃 한다발은 성적인 메타포로도 해석할 수 있을 법하다. 과감한 구도와 'Frame in Frame'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내러티브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대부분의 모던 아트와 실험적인 작품을 독일 미술관에서 금지시켰다. 마티스는 당시 남부 프랑스에 살며 작업했으며, 이 두 그림은 프랑스의 아트딜러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 1881-1959)에게 팔았던 작품이다. 유대인이었던 폴 로젠버그는 미국으로 도피하기 전 소장품을 보르도의 은행 금고에 보관했지만, 1940년 나치에 의해 압수됐다.

 

나치가 약탈한 작품들은 파리에서 전시된 후 죄데폼 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 창고에 보관됐다. 그후 나치군 장교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이 '노랑과 파랑색 옷에 기타를 든 소녀'를 가져갔으며, '데이지꽃'은 창고에 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 두 작품은 로젠버그에게 반환되었으며, 이후에 팔렸다. '데이지꽃'은 1983년, '소녀'는 24년 후인 2007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으로 들어가 재회하게 된다.   

https://www.artic.edu/artworks/100226/daisies

https://www.artic.edu/artworks/191565/girl-in-yellow-and-blue-with-gui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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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Rosenberg/ Odalisque in a Yellow Robe, 1937 by Henri Matisse, Collection of Phiadelphia Museum of Art

 

1881년 파리에서 골동품상 가정에서 태어난 폴 로젠버그는 형 레옹스와 함께 아버지 사업을 물려 받은 후 인상파, 후기 인상파 아트딜러로 이름을 날렸다. 반 고흐 드로잉과 마네의 인물화를 220달러에 구입하기도 했다. 레옹스는 입체파에 열광했고, 폴은 피카소, 조지 브라크, 페르낭 레제, 그리고 마티스와 독점 계약을 맺었다.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로젠버그는 소장품 2천여점을 화랑과 창고에 두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총영사가 목숨을 걸고 비자를 발급해주었다고 한다.  

 

뉴욕에 도착한 폴 로젠버그는 57스트릿에 갤러리를 오픈하고, 약탈됐던 작품의 다수를 환수할 수 있었다. 1953년 MoMA는 로젠버그 소장품 89점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로젠버그는 MoMA의 초대관장 알프레드 H. 바 주니어와 오랜 친구 사이였다. 

https://www.moma.org/interactives/exhibitions/2010/paulrosenberg

 

 

#5 피카소, 캐릭터 그룹(1929)/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과 바위(186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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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1881–1973), Group of Characters, 1929, Oil on canvas, Association des Amis du Petit Palais, Geneva

 

붉은 배경으로 콤파스(제도기)로 변형된듯한 세 인물이 연결되어 있다. 동갑내기 화가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의 통통한 기계적 인간에 대한 반발일까? 아니면, 후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가 표현할 인간의 실존을 은유했을까? 피카소가 한창 초현실주의에 흥미를 가졌던 1929년 봄에 그린 '캐릭터 그룹'은 기계화한 인간에 대한 불안감이 표현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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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1839–1906), Bather and Rocks, between 1860-66, Oil on canvas, transferred from plaster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irginia, gift of Walter P. Chrysler, Jr.

 

세잔이 그린 누드 인물은 프랑스 남부에 자리한 가문의 18세기 맨션의 벽에 직접 그린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캔버스로 옮겨진 유화는 대담한 붓놀림, 침울한 색조와 고조된 감정이 드러나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캐릭터 그룹(Group of Characters, 1929)'과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과 바위'(Bather and Rocks)'는 프랑스의 아트 콜렉터 알폰스 칸(Alphonse Kann, 1870-1948)이 소장했던 작품이다. 칸은 1944년 와 함께 파리에서 압수되어 독일 수송열차에 실려 체코슬로바키아의 창고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전투기가 이를 차단해 칸의 소장품은 대부분 회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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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onse Kann/ Smoke over Rooftops, 1911 by Fernand Léger

 

알폰스 칸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와 친구였고, 소설 '스완의 사랑(Swann in Love)'의 주인공 찰스 스완은 칸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칸은 1927년 뉴욕에서 브뤼겔, 프라고나르, 루벤스, 틴토레토 등 옛 거장 소장품 대부분을 경매한 후 19세기와 현대미술 구입에 집중하게 된다. 

 

1938년 칸은 파리 교외 생제르망앙라예의 맨션에 보관하고 있던 소장품의 목록을 작성하지 않은 채 영국으로 도피했다. 1940년 10월 나치 점령군은 그의 소장품을 약탈해갔다. 그의 소장품 목록은 60페이지, 300여점에 달했다. 칸은 1948년 영국에서 사망하기 전 약탈품의 일부는 회수할 수 있었다. 

 

그후 칸의 소장품은 유럽과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발견됐다. 미네소타아트인스티튜트에서 소장했던 페르낭 레제의 '지붕 위의 연기(Smoke Over Rooftops, 1911)'은 11년간의 조사 끝에 칸의 상속인에게 돌아갔다.   

https://new.artsmia.org/art-artists/managing-mias-collection/deaccessioning-artworks/smoke-over-rooftops

 

 

#6 마르크 샤갈, 부림절(Purim, 1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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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1887–1985), Purim, 1916 -17, Oil on canvas,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Louis E. Stern Collection, 1963

 

마르크 샤갈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구 페트로그라드)의 유대인예술진흥협회의 위임을 받아 시나고그 부속 유대인 중학교를 위해 제작할 예정이었던 미완성 벽화 '부림절(Purim)'의 드로잉이다. 

 

유대인 명절인 부림절(Purim)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들을 모두 살해할 음모를 꾀했지만 실패되고, 유대인들은 구원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대인 달력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킨다.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가난한 사람 두명 이상에게 음식이나 돈으로 자선을 베푼다. 부림절 점심 때부터 저녁까지 삶은 콩, 완두, 양귀비씨(poppy seeds)나 과일을 넣은 세모난 과자(*유대인의 원수 원수 하만의 귀 모양으로 만들어 '하만의 주머니', '하만의 귀'라 부르는 쿠키)도 먹는다. 또한 마스크를 쓰고, 남녀가 옷을 바꿔 입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카니발을 즐긴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 제국 리오즈나(현 벨라루스)의 가난한 유대계 집안에서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모이시 자카로비치 샤갈(Moishe Zakharovich Shagal). 아버지는 청어 가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야채장수였다. 19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부림절'은 1928년 독일 에센의 볼프강 미술관(Museum Folkwang)이 구입했다. 나치는 당시 현대미술의 보고였던 볼프강 미술관이 소장한 마티스, 뭉크, 브라크, 세잔, 키리코, 드랭 등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미술품 등에 '퇴폐미술'의 낙인을 찍어 1천200여점을 압수했다.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무려 1만7천여점을 압수해 '퇴폐미술' 전시회를 열었은데, 오히려 큰 인기를 누리자 압수 미술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팔리지 않은 미술품 약 5천여점은 불태웠다. 독일 미술관들은 작품 회수를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법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궁극적으로 독일 정부의 재산이었으며, 정부가 이를 처분할 법적 권리가 있었다. 

 

'부림절은 유대인 축제를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빨간색 들판이 기쁨을 강조한다. 이 그림은 나치 당원이었이자 아트 컬렉터였던 쿠르트 펠드하우저(Kurt Feldhäusser)의 소장품이 되었다. 1945년 펠드하우저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자, 펠드하우저의 어머니가 그림과 함께 브루클린으로 이주했다가 팔았다. 1963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으로 들어갔다. 

https://philamuseum.org/collection/object/59482

 

 

#퇴폐미술(Entartete Kunst/ Degenerate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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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을 관람하는 요제프 괴벨스(중앙).

 

나치 집권기(1933-1945) 이데올로기와 조화될 수 없는 모더니즘 예술작품을 박해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히틀러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신고전주의를 추종하며, 이를 통해 게르만족의 민족 우월주의를 고양했다. 

 

나치는 인상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입체파, 야수파, 바우하우스 등 미술 사조를 불온한 퇴폐미술로 간주했다. 모더니스트 미술은 독일적 감정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미술관에서 제거, 압수, 파괴됐다. 미독일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퇴폐 예술가로 낙인됐다. 

 

퇴폐미술가로 치부된 작가로는 에른스트 바를라흐, 빌리 바우마이스터, 막스 베크만, 카를 카스파, 쿠르트 슈비터, 마리아 카스파 필저, 오토 딕스, 막스 에른스트, 오토 프론인트리히, 빌헬름 가이어, 오토 그리벨, 게오르크 그로츠, 카를 호퍼, 카를 훕부흐,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폴 클레, 오스카 코코슈카, 케테 콜비츠, 엘프리데 로제 베히틀러,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파울라 모더존 베커, 루돌프 묄러, 오토 판코크, 막스 페히슈타인, 카를 슈미트 로트루프 등이 타겟이 됐다.  키르히너는 자살했고, 슈비터는 망명했다. 

 

1937년 7월 나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는 뮌헨의 호프가르텐 아케이드에서 탄압하기 위한 명목으로 퇴폐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엔 클레,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독일 뮤지엄 32곳에서 압수한 650점이 소개됐으며, 200여만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독일미술회관(Das Haus der Deutschen Kunst)의 위대한 독일미술전(Große Deutsche Kunstausstellung)은 42만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쥬이시뮤지엄 나치 약탈 미술품의 잃어버린 스토리를 찾아서 (1)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Art2&document_srl=4045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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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9.13 20:05
    나치 히틀러의 만행은 끝이없네요. 600만명의 유태인 학살로도 성이 안풀렸나 봅니다. 퇴폐주의라는 얼토당토한 틀을 씌워서 미술가들의 영혼을 짓밟았으니, 악마가 바로 히틀러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회화 100만점과 250만권의 책이 살아남았다니 눈물겹습니다.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생각납니다. 이 두 동과 서의 악마가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미술품 딜러인 로젠버그와 칸의 업적을 재조명해야 겠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피카소, 마티스, 쿠르벨, 뭉크, 샤갈 등등의 기라성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오늘날 우리가 편안하게 감상할 수있게 기회를 준 공적을 높이 치하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