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는 플라워 아티스트였다...재키 케네디와의 우정
Grace Kelly as an Artist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플라워 아트
모나코 왕비가 된 후 압화 작품에 몰두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재클린 케네디의 편집으로 'My Book of Flowers'(1980)를 출간했다.
“꽃에 대한 사랑은 나에게 많은 문을 열어주었다."
-그레이스 켈리-
오스카상 수상 할리우드 스타에서 모나코 왕비로,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친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1982)는 아티스트였다. 연기를 포기하고, 센트럴파크보다 작은 나라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자신의 연기 재능을 플라워 아트로 전환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잉그리드 버그만을 롤 모델로 연기를 꿈꾸었다. 켈리는 꽃을 사랑했고, 아마도 1829년부터 시작된 필라델피아 플라워쇼(Philadelphia Flower Show)를 보면서 자랐을 터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레이스 켈리는 당대 최고의 남우들과 공연하며 염문을 뿌렸다. 1952년 게리 쿠퍼와 공연한 서부극 '하이눈(High Noon)'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공연한 '모감보(Mogambo, 1953)', 이어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1954)' '이창(Rear Window, 1954)'그리고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덴과 공연한 '컨트리 걸(The Country Girl, 1954)'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켈리는 1955년 칸영화제에 갔다가 모나코 공 레이니에 3세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캐리 그란트와 공연한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1955)' ,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와 공연한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High Society, 1956)'처럼 궁전 속으로 들어가며 은막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압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My Book of Flowers'(1980)
'지지(Gigi)'의 프랑스 소설가 콜레트는 모나코를 "국경이 꽃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말했다. 그레이스 켈리 왕비는 1966년 모나코에서 플라워 쇼(1966)를 열었다. 그녀는 정원 가꾸기 뿐만 아니라 드라이플라워 콜라쥬 아트가 취미였다. 왕비의 전공은 압화 콜라쥬(pressed flower collage, 壓花 콜라쥬)였다. 1977년엔 파리(Galerie Drouant)에서 전시회도 열어 46점을 모두($500-$1,300) 팔았다.
1980년엔 자신의 작품을 모아 'My Book of Flowers'을 출간했다. 영문판은 그레이스 켈리의 친구였던 JFK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dey Onassis, 1929-1994)가 편집했다. 이 책엔 켈리의 콜라쥬 작품과 함께 모나코 왕궁 정원 사진도 소개되었다.
올레그 카씨니와 약혼했던 그레이스 켈리, 카씨니는 재키 케네디의 옷을 300여벌 제작하며 '재키 스타일'을 창조했다.
동갑이었던 그레이스 켈리와 재키 케네디는 인연이 깊다.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스타일을 만든 이는 러시아 출신 패션디자이너이 올레그 카시니(Oleg Cassini)와 오스카 트로피 8개를 거머쥔 할리우드 의상디자이너 이디스 헤드(Edith Head)였다. 올레그 카시니는 학교 교사 타입의 그레이스 켈리를 섹시한 이미지로 변신시킨 인물이다.
미모의 배우 진 티어니(Jean Tierney)와 이혼한 카씨니는 '모감보' 촬영 중 켈리에게 매일 빨간 장미 한다발을 바치며 구애를 했고, 켈리와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했다. 켈리의 부모는 2번 이혼한 플레이보이 카시니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나코의 레이니에공과 결혼한 그레이스 켈리는 디자이너를 카시니에서 지방시(Givenchy)로 갈아탔다.
한편,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이던 1953년 JFK와 재키는 뉴포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JFK는 뉴욕에서 허리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이때 그레이스 켈리는 재키의 제안으로 간호원 복장을 하고 JFK를 병문안한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 그레이스 켈리가 레이니에공과 결혼 후 아리스토틀 오나씨스의 요트 '크리스티나'를 타고 신혼여행을 즐겼다.
1929년 동갑내기 그레이스 켈리와 재키 케네디는 인연이 깊다. 1961년 켈리는 남편 레이니에와 백악관을 방문했다.
한편, 올레그 카시니는 재키 케네디를 변신시키게 된다. 카씨니는 "나는 재키가 할리우드 스타처럼, 가장 유명한 퍼스트레이디가 되도록 옷을 입혔다"라고 말했다. 카시니는 3년 동안 재키 케네디를 위해 무려 300벌 이상의 옷을 디자인했으며 "Jackie Look"은 이후 패션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1년 5월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에 공은 백악관을 방문해 JFK와 재키 케네디의 영접을 받았으며, 1963년 11월 JFK가 암살된 후 그레이스 켈리는 알링톤의 묘소를 찾아갔다.
재키 케네디는 조지워싱턴대 불문과에 재학 중 '보그(Vogue)'에서 1년간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백악관 시절과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한 후엔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1975년 오나시스가 사망하자 46세에 출판사 바이킹(Viking)에서 에디터로 일을 시작했다. 재키는 바이킹에서 연봉 1만 달러를 받다가 더블데이(Doubleday)로 옮겨 1994년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픽션과 넌픽션 100여권을 편집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압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My Book of Flowers'(1980)
그레이스 켈리의 플라워 아트를 소개한 'My Book of Flowers'(더블데이, 1980)도 재키 케네디의 편집을 거쳤다. 이 책에서 그레이스 켈리는 손톱 끝이나 작은 줄기를 사용해 꽃잎을 제자리로 옮기는 것을 선호한다.
켈리 왕비는 "압화(壓花) 그림을 완성하면서 눈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꽃들을 제 자리에 놓는 것 만으로도 바느질, 크로체, 뜨개질처럼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고 밝혔다. 그녀는 꽃의 간격을 중시하며, '순수한 형식미'의 기하학적 콜라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레이스 켈리의 압화 작품 'My Book of Flowers'(1980)
그레이스 켈리는 레이니에 3세와 사이에 카롤린, 알베르 2세, 스테파니를 낳았다. 1982년 9월 13일 딸 스테파니를 태우고 모나코로 가던 중 뇌졸중으로 자동차가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며 세상을 떠났다. 그녀 나이 52세였다.
"음악처럼 꽃과의 소통도 시대를 초월한 유구한 소통의 감각입니다.
꽃들은 가장 매혹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것이 인생이 전부가 아니던가요?"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와 재클린 케네디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두 여인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여인이지요. 두 여인은 세상의 모든 것-미모와 재력과 왕비, 대통령 부인, 아들과 딸의 엄마란 타이틀을 가졌던 여인이지요.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멋진 여성임을 알 수 있지요.
일년에 한번 열리는 필라델피아 Flower show는 볼만합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dazzling을 느낍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필라델피아 출신이라 이 꽃 전시를 많이 관람해서 마음에 꽂의 향기를 간직했다고 봅니다. 켈리 왕비의 꽃 작품이 아름답네요. 케네디 여사는 100권의 책을 편집한 지성의 상징이지요. 부러울 것 없던 두 여인도 켈리는 50대에 재클린 여사는 60대에 명을 다한 것을 보면, 평범하지만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필부필부가 훨씬 좋아보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