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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 이영주: 겨울무 예찬
뉴욕 촌뜨기의 일기 (56) 무나물과 깍두기
겨울무 예찬
겨울무와 깍두기
제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를 보면 앞뒤 생각없이 무조건 사는 병입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 그로서리에 갔는데, 너무나 예쁘고 매끈하게 빠진 무들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갔을 땐 뚱뚱한 대형 참외처럼, 웬만한 사람 얼굴 크기의 엄청 배불뚝이 무 뿐이어서 실망했는데, 이번엔 그야말로 준수한 영맨 무가 나온 것입니다. 무조건 골라서 3개를 사왔습니다. 오렌지가 10개에 1불 99센트할 때 혹은 파가 10단에 99센트 할 때는 그 가격이 너무 좋아서, 버섯이 세일할 땐 냉장고에 이미 사둔 버섯이 있어도 무조건 또 사고. 그래서 냉장고가 늘 만원이고, 그러다가 한편에선 상한 식품들이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딸들이 그러지 말라고 지청구(*꾸지람)를 주는 데도, 제 자신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더 치명적인 약점은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단 한번 불이 붙으면 반드시 다 끝내야 하는 겁니다. 이쁜 무를 사온 날은 아직 몸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무를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잘 모셔두고 이삼일 지나니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침대 속에서 뭉개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7시 경에 일어나 부엌으로 직진. 일단 무로 깍두기를 담기로 하고, 무부터 씻었습니다. 그리고 깍두기에 넣을 마늘과 생강, 파도 준비하고, 무를 깍둑 썰어 절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보니 버섯이 3통, 가지 한 팩, 양배추, 오이, 부추, 호박까지 가득합니다. 무조건 다 꺼내어 다듬고 씻었습니다.
무 한개는 반을 잘라 무국을 끓였습니다. 양념해서 볶아 놓은 소고기에 무를 넣고 볶다가 냉동실에 얼려 놓았던 멸치육수로 국을 끓이니 국물이 답니다. 성공입니다. 무 반개는 가늘게 채썰어 들기름에 하얗게 볶았습니다. 그렇게 기름이 배이도록 볶다가 약한 불로 뭉근하게 오래 익히면 무에서 물이 우러나와 타지 않고 맛있는 무나물이 됩니다. 맛있는 겨울무의 최고의 품위있는 변신입니다. 양배추와 오이는 채썰어 샐러드로 만들었습니다. 약간의 소금과 식초만 넣어도 담백하고 신선합니다.
버섯가지 볶음
내가 좋아하는 메뉴 중의 하나는 버섯, 가지볶음입니다. 중국식으로 굴소스에 볶으면 아주 고급진 요리가 됩니다. 버섯과 가지를 따로 기름에 튀기듯이 넉넉한 기름에 볶아서 나중에 굴소스와 마늘 다진 것에 한번 더 휘둘러줍니다. 뜨거운 불에 짧게 화끈하게 볶는 것이 관건입니다. 먹기 직전 파란 대파로 빛깔을 입히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눈도 입도 모두 만족스런 요리가 됩니다. 부추는 오징어를 듬뿍 넣고 호박, 양파를 곁들여 수수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전을 부쳤습니다. 전이 부서져서 전분가루를 추가했는데도 부서지는 바람에 애를 먹었습니다. 깍두기는 배와 사과, 양파, 마늘, 생강, 새우젓, 밥을 한 숟갈, 고추가루까지 넣어 한데 갈아서 양념을 했습니다. 고추가루를 추가할 때, 피시소스를 조금 더 넣어 주니 얼마나 감칠 맛이 그만입니다.
이렇게 몇 가지의 쿠킹이 끝나고 보니 정오가 되었습니다. 무려 5시간을 논스톱으로 일한 것입니다. 내 나이에 이건 보통 노동이 아닙니다. 요리를 마치고 설거지하고 나니 완전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벌렁 누웠습니다. 한 30분을 그렇게 안정한 뒤에야 겨우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제가 저는 참 한심한 것입니다. 발동이 걸리면,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무슨 연구를 하는 학자도 아니고,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선 먹을 것만 해서 대충 먹을 것이지 왜 이리 일을 벌이는지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전 담근 동치미
그래도 무로 여러가지 먹거리를 장만한 것은 잘한 일인 것같습니다. "무는 잘 먹으면 인삼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몸에 좋은 식재료고, 특히 겨울무는 참으로 싱싱하고 맛이 좋습니다. 무채도 맛있지만 저는 따뜻한 백색의 익힌 무나물이 부드러워서 더 좋습니다. 무국은 제가 미역국 다음으로 좋아하는 국입니다. 무 맑은 장국에 싱싱한 갈치 한 토막 구워 함께 먹으면 맛이 환상입니다.
6천년전 이집트에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무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고 합니다. 그것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져서, 기원전 400년경 고대 중국의 서경(書經)이라는 역사책 하서우공(夏書禹貢) 편에 무를 소금절임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에 들어와 재배돼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엔 아주 중요한 채소로 취급되었다고 하네요. 오늘날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는 19세기에 등장한다고 하니 예상 밖입니다.
무에 포함된 수용성 식이섬유소는 콜레스테롤을 방출하는 역할을 하고 불용성 식이섬유소는 장 운동을 촉진하고 수분을 흡수해 변비 예방, 정장용 (장청소)에 좋다고 합니다. 천연소화제인 무는 감기,숙취해소는 물론 관절염, 항암효능도 높습니다. 무뿌리와 잎에 있는 성분인 인돌과 글루코시노레이트는 몸속에 들어온 발암 물질의 독성을 없애는 효과가 있어 조림이나, 국을 하면 국물에 인돌 성분이 녹아들어 항암 효과를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무청은 식이섬유의 보고입니다. 식이섬유와 카로틴, 철분, 칼슘 등이 풍부해서 칼슘은 무(뿌리)의 약 4배나 되며 비타민 C도 풍부합니다. 무는 뿌리며 줄기와 잎까지 유용한 효자 식물입니다.
깍두기 얘기를 하려던 게 저도 모르게 무의 효용성까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깍두기를 방금 담았는데, 저는 벌써 “이렇게 무가 맛있을 때 곧 깍두기를 더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못말리는 병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