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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남편의 그늘 아래서

MoMA 전후 여성작가 <4> 리 크래스너 Vs. 일레인 드 쿠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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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크래스너(왼쪽)와 엘레인 드 쿠닝의 자화상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쌍두마차 잭슨 폴락(Jackson Pollock)과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부인이었던 리 크래스너(Lee Krasner)와 일레인 드 쿠닝(Elaine de Kooning). 만일, 이들이 결혼하지 었더라면 지금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리 크래스너와 엘레인 드 쿠닝은 매니저처럼 남편을 서포트했다. 

 

이들은 천재적인 남편들을 위해 스스로의 커리어를 희생했을까? 아니면, 가부장적인 미술계에서 남편들의 유명세 그림자에 가리워진 희생양들이었을까? 

 

리 크래스너와 엘레인 드 쿠닝은 브루클린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고,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결혼한 여성화가들이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아마추어 유대인 화가 루스 클리그만(Ruth Kligman)이 그녀들 남편의 애인이었다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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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리 크래스너와 잭슨 폴락(왼쪽). 1953년 엘레인 드 쿠닝과 윌렘 드 쿠닝 Photo: Hans Namuth 

 

리 크래스너와 일레인 드 쿠닝은 남편의 유명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품에 종종 L. K.나 E de K같은 이니셜을 사용했다. 

는 4살 연하의 폴락과 교회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성은 끝내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늘 미시즈 폴락(Mrs. Pollock)을 자청하다가 묘비에 Pollock을 붙였다. 윌렘보다 14살 연하였던 엘레인 드 쿠닝은 성을 바꾸었다. 

 

폴락은 음주운전으로 44세에 사망했고, 드 쿠닝은 치매를 앓다가 92세에 눈을 감았다. 말년에 두 여인들은 남편의 커리어를 돌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들의 유명세에 가려졌던 리 크래스너와 일레인 드 쿠닝을 재조명해본다.  

 

 

리 크래스너  Lee Krasner(1908-1984)                                       

 

입체파를 버리고 폴락을 흡수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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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 본명은 레나 크래스너(Lena Krasner). 크래스너는 쿠퍼유니온, 아트 스튜던트 리그와 내셔널아카데미오브디자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독일 출신 화가 한스 호프만 교수로부터 큐비즘을 배워 신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 호프만은 크래스너에게 “네 작품이 너무도 훌륭해서 여자가 그린 것인줄 모를 정도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 크래스너는 1935년부터 43년까지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의 미술가 후원 프로젝트인 WPA(Public Work of Art Project)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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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Gaea, 1966, Oil on Canvas, Museum of Modern Art

 

# 1941년 뉴욕에서 열린 그룹전 ‘프랑스와 미국 회화’전에 초대되었고,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 유럽 회가들과 함께 전시에서 낯선 미국 화가 ‘잭슨 폴락’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폴락의 작업실을 예고없이 방문, 그의 에너지 넘치는 캔버스에 반하게 된다. 서부(와이오밍) 출신 스코틀랜드와 아이리쉬계 알콜중독자와 동부(브루클린) 출신 철두철미한 러시아계 유대인은 자석처럼 끌렸다.  

 

# 폴락과 크래스너는 1945년 11월 5일 맨해튼 마블 칼리지에이트 교회에서 하객 없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맨해튼을 탈출하기 위해 신혼집을 물색하러 이스트햄턴으로 갔다. 스프링 지구에서 어부의 집을 발견한 폴락은 페기 구겐하임으로부터 빌린 2000달러를 다운페이하고, 은행 융자를 빌려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d0046533_50d857b33d7d9.jpg 리 크래스너와 잭슨 폴락

 

# 폴락은 처음에 2층의 침실을 작업실로 사용하다가 이듬해 외양간을 스튜디오로 개조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신 침실은 크래스너의 스튜디오가 됐다. 결혼 후 크래스너는 자신의 작업보다 매니저처럼 폴락을 돌보고, 조언하는데 더 열중했다. "입체파를 버리고, 폴락을 흡수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폴락은 그녀에게 이미 미술의 한 사조(ism)였다. 

 

크래스너는 종종 자신의 그림을 잘라 콜라쥬 작업을 했지만, 자아비판으로 작품을 파기해 남겨진 작품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적 시각이 남편 폴락에게는 중요했다. 크래스너와 폴락의 관계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관계처럼 서로를 자극했다. 이들은 구태의연한 미술과 타협주의, 억압된 문화에 저항했으며, 즉흥성과 개인적인 표현을 중시했다.

 

 

0012.jpg 리 크래스너 1955

 

# 애정이 결핍된 막내로 자랐던 폴락은 아기를 원했다.하지만, 크래스너는 아기를 원치 않았다. 영화 '폴락'(2000)에선 폴락이 이 때문에 폴락의 우울증이 더 심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폴락과 크래스너는 대신 개를 키웠다. 1954년 경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위 사진 속의 아이는 누구였을까? 크래스너는 폴락이 바람둥이 아트딜러 페기 구겐하임과 외도를 하며 재정 지원을 받는 것도 눈감아주었으며, 폴락이 루스 클리그만과 열애에 빠졌을 때 유럽으로 여행가며 초연하게 천재화가의 삶을 지켜주었다.  

 

# 크래스너는 여성 작가로서, 잭슨 폴락의 아내로서 정체성의 고민을 했다. 때문에 이름보다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이니셜 L. K.로 전시하기도 했다. 마티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크래스너는 서예와 콜라쥬를 합성한 회화로 주목을 끌게 된다. 

 

 

51806c7754308adc7c79092fe0552605.jpg 잭슨 폴락과 애인 루스 클리그만, 1956년 8월

 

# 1956년 8월 잭슨 폴락은 붓을 꺾고 18세 아래의 미모 화가 루스 클리그만을 이스트햄턴의 집까지 끌어들였다. 어느날 리 크래스너는 클리그만이 집에서 슬그머니 나가는 걸 목격하고, 페기 구겐하임이 있는 유럽으로 간다.  몇주 후엔 폴락의 열애가 식고, 방황이 정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폴락은 클리그만과 그녀의 친구를 태우고 만취한 채 고속으로 운전하다가 나무와 충돌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집으로 돌아온 크래스너는 폴락을 그린우드 리버에 묻었다. 친구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도 지켜봤다. 한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루스 클리그만은 리 크래스너 측을 상대로 교통사고 부상에 대한 1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1만 달러를 받아낸다.

 

# 폴락 사망 후 크래스너는 폴락의 작품을 뮤지엄에 팔고, 관리하면서 붓을 다시 잡았다. 침실에서 나와  폴락이 쓰던 외양간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다. 1965년 크래스너는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와 1973년 휘트니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화단에서 '잭슨 폴락의 부인'보다 '리 크래스너'로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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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Untitled,1948, Oil on Canvas, The Jewish Museum

 

# 리 크래스너는 관절염을 앓다가 1984년 6월 19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폴락을 묻은 그린리버 공동묘지 옆에 자신도 묻혔다. 묘비명엔 Lee Krasner Pollock이라고 붙여졌다.

 

# 1983년 가을 휴스턴 뮤지엄에서는리 크래스너의 회고전을 시작했고, 크래스너는 오프닝에 참석했다. 이 회고전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크라이슬러뮤지엄, 피닉스미술관을 거쳐 마침내 MoMA까지 왔지만 볼 수 없었다. 크래스너가 숨을 거둔지 6개월 후였다.  이전에 MoMA에서 여성작가의 회고전이 열린 것은 루이스 부르주아(1982)에 이어 두번째였다. 이후로 MoMA에선 헬렌 프랭켄탈러(1989), 엘리자베스 머레이(2004), 신디 셔만(2012)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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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아일랜드 스프링스의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스튜디오에 전시 중인 리 크래스너의 신발.

 

# 리 크래스너 사망 이후 폴락과 살던 집은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가 되었다. 

크래스너는 생전에 폴락-크래스너 재단(Pollock-Krasner Foundation)을 설립해 재정지원이 필요한 젊은 화가들을 지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리 크래스너가 사망했을 때 재단의 자산은 280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85년 폴락-크래스너 재단이 설립된 후 매년 100여명 이상의 신인작가들에게 200여만 달러의 그랜트를 수여해오고 있다. http://www.pkf.org

 

 

일레인 드 쿠닝(Elaine de Kooning, 1918-1989)

윌렘 드 쿠닝의 영원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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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던 일레인 드 쿠닝

 

# 본명은 일레인 마리 캐서린 프라이드( Elaine Marie Catherine Fried). 1918년(자신이 후에 1920년이라고 정정함) 브루클린 플랫부쉬에서 유대인 가정의 4자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미술애호가였던 엄마는 일레인이 5살 때부터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데리고 다녔으며, 침실을 라파엘, 렘브란트,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의 복사 그림을 붙여놓았다. 8살이 되자 일레인은 급우의 얼굴을 그려서 팔 정도가 된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들을 잘 돌보는 편은 아니었다. 이웃은 아이들을 방치한다고 엄마를 신고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장녀인 엘레인이 엄마 노릇까지 하게 된다.

 

# 일레인은 스포츠광이었다. 야구와 하키게임을 즐기는 한편, 발레 레슨도 받았다. 옥상에서 다이빙을 한 적도 있다. 고교 졸업 후엔 맨해튼 헌터칼리지에 입학했다가 먗 주만에 중퇴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학교에 등록한다. 이어 아메리칸 아티스트 스쿨로 옮겨 공부하면서 모델로 돈을 벌기도 했다. 일레인은 큰 키에 날씬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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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과 일레인 드 쿠닝

 

# 1938년 스무살의 일레인은 교수의 소개로 한 카페에서 윌렘 드 쿠닝을 만난다. 네덜란드계 이민자로 14살 연상이었던 드 쿠닝은 일레인에게 드로잉과 회화를 가르치게 된다. 엄격한 스승이었던 드 쿠닝은 일레인의 드로잉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 1943년 9월 일레인과 윌렘은 시청에서 약식 결혼식을 올린 후 다운타운의 바에서 술을 마셨다. 일레인은 윌렘의 첼시 로프트(143 West 21st St.)에 이사해 스튜디오를 나누어 쓰며 작업했다.  

 

# 일레인 드 쿠닝은 자신의 작품에 풀 네임 대신 이니셜을 썼다. '여성 화가'로 불리우는 것도, 윌렘 드 쿠닝과 혼동되는 것도 피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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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aine de Kooning, Bullfight, 1960, Acrylic on paper, Museum of Modern Art

 

# 1952년 일레인은 첫 개인전을 연 후 파워 딜러 레오 카스텔리의 햄턴 별장에서 보냈다. 

 

# 일레인 드 쿠닝은 뉴욕 8스트릿 클럽(the Club)에서 활동했다. 뉴욕 스쿨로 알려진 이 추상표현주의 화가 클럽엔 남편 윌렘 드쿠닝을 비롯, 프란츠 클라인, 클리포드 스틸, 한스 호프만 등이 멤버였다. 마초 남성화가 그룹에서 일레인 드 쿠닝은 희귀한 여성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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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 사망 이듬해인 1957년 윌렘 드쿠닝과 루스 클리그만.

 

# 일레인 드 쿠닝은 바람끼와 음주벽으로 유명했다. 윌렘과 '개방형 결혼(open marriage)'을 영위하며 자유 연애주의자로 집주인과 바람을 피며 렌트를 피하는가 하면, 천재로 믿었던 남편의 성공을 위해 파워 비평가 토마스 헤스나 아트뉴스 기자 해롤드 로젠버그, 아트딜러 찰스 이건 등과 외도를 했다. 한편, 윌렘 드 쿠닝도 플레이보이였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유대인 아마추어 화가 루스 클리그만으로 훗날 잭슨 폴락의 '팜므 파탈'이 되어 불의의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다.

 

# 그녀는 미국 미술사에서 최초의 여성 비평가 겸 화가였다. 1948년 아트뉴스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 100여건의 평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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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전시된 윌렘 드 쿠닝과 엘레인 드 쿠닝의 자화상. #Gallery 919

 

 

# 일레인과 윌렘 드 쿠닝은 둘 다 끊임없는 외도, 음주벽, 언쟁의 나날을 보낸다. 급기야 윌렘은 다른 여인과 사이에 딸(리사 드 쿠닝)이 생겼고, 1956년 별거에 들어갔다. 

 

# 결별 후 뉴욕에 남은 일레인은 가난에 시달렸고, 1956년 잭슨 폴락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넘버 원 미국 화가로 등극한 윌렘은 롱아일랜드로 이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둘다 알콜중독에 시달리면서 그림을 그렸다. 

 

# 명강의하는 교수로도 유명했다. 윌렘 드 쿠닝과 별거한 후인 1957년 뉴멕시코대학교,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카네기 멜론, 사우스햄턴칼리지, 쿠퍼 유니온, 프랫인스티튜트, RISD, 바드 스쿨, 조지아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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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JFK 스케치 중인 일레인 드 쿠닝

 

# 비록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잘 알려졌지만, 일레인 드 쿠닝은 초상화가로서도 기억되어야할 것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인 알렌 긴스버그와 프랭크 오하라, 안무가 머스 커닝햄, 그리고 남편 윌렘 드 쿠닝까지 초상화를 그렸고, 몇 작품은 워싱턴 D.C.의 초상화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플로리다에서 JFK를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던 일레인 드 쿠닝은 1964년 11월 22일 JFK 사망 후 1년여간은 붓을 잡지 않았다. 

 

# 드 쿠닝 부부는 20년 가까이 별거하면서도 이혼은 끝내하지 않았고, 1976년 재결합에 이른다. 그리고, 엘레인은 윌렘의 건강과 명성을 보호하는데 여생을 바치게 된다. 이들의 총 결혼 기간은 총 4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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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field Porter, Elaine de Kooning, 1957, Oil on canvas #Gallery 91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일레인 드 쿠닝은 1980년대 초 폐암 진단을 받고, 한쪽 폐를 잃었다. 이후 폐기종을 앓다가 1989년 피쉬바흐갤러리에서 '동굴 회화'전이 끝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윌렘 드 쿠닝은 치매를 앓고 있어서 일레인의 사망에 대해 모른 채 8년을 더 살다가 눈을 감게 된다. 

 

 

*MoMA 전후 여성작가와 추상화의 공간을 만들다(4/15-8/13) 연재 순서

 

#1 두 여성 조각가의 유년기와 트라우마 일기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1911-2010) & 에바 헤세 Eva Hesse (1936-1970) 

 

#2 마초 추상표현주의와 여성 쌍두마차 

조안 미첼 Joan Mitchell (1925-1992) & 헬렌 프랭켄탈러 Helen Frankenthaler(1928-2011)

 

#3 초미니멀리즘과 화려한 캔버스: 천재성과 광기 사이

아그네스 마틴 Agnes Martin(1912-2004) & 야요이 쿠사마 Yayoi Kusama(1929- )

 

#4 유명 화가의 아내 화가로 산다는 것

리 크래스너 Lee Krasner (1908-1984) & 일레인 드 쿠닝 Elaine de Kooning (1918-1989)

 

#5 무소의 뿔처럼...대형 조각의 에너지

루이스 네벨슨 Louise Nevelson (1899-1988) & 리 본테쿠 Lee Bontecou(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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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TCHELL, Ladybug, 1957 (left)/ Helen Frankenthaler, Trojan Gates, 1955, 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전후 여성작가와 추상화의 공간을 만들다(4/15-8/13)

 

The Museum of Modern Art

개방시간: 월, 화, 수, 토, 일 오전 10시30분-오후 5시 30분, 금요일 오후 8시. 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 휴관. ♤입장료: 성인($25), 65세 이상($18), 학생($14). *금요일 오후 4시 이후는 무료. 11 West 53rd St. www.moma.org.

 

 

*현대미술의 시작과 끝: MoMA 하이라이트

*아그네스 마틴 회고전@구겐하임

*다큐멘터리 '에바 헤세' 리뷰

*이상한 미술나라의 앨리스, 야요이 쿠사마

*천재화가와 두 여인: 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

*앤 트루이트의 '교차로'@볼티모어뮤지엄

*브라질 구체미술의 기수 리지아 파페 회고전@메트 브로이어

*쿠바 여성작가 101세 휘트니뮤지엄 회고전

*조지아 오키프의 옷장을 열다@브루클린뮤지엄

*뉴욕 스토리 <255> 조지아 오키프의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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