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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이수임: 레몬향 나는 그녀
창가의 선인장 (134) Lemon Tree
레몬향 나는 그녀
Sooim Lee, The Shade of a Lemon Tree, 2023, gouache on panel, 12 x 12 in
친구와 통화 중 전화선 너머로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산책하니?”
“아니, 뒤뜰로 나왔어.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옛날 이야기하니까 담배가 땅기네.”
우리의 대화 중 젊은 날의 즐거움과 회한이 그녀를 자극했나 보다. 나는 친구를 닮아 밝게 빛나는 그녀의 집 뒤뜰에 있는 200개의 레몬이 열린다는 나무가 생각났다.
“너 레몬 나무 아래서 담배 피우고 있지? 여기까지 레몬 향을 품은 담배 냄새가 난다.”
대학 다닐 때는 친하지 않았던 LA에 사는 친구다. 학교를 졸업한 그해, 늦가을 나는 직업, 결혼, 등을 고민하며 안국동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나를 본 이 친구가 내 모습이 가련했는지 큰소리로 나를 불러세웠다.
“야 반갑다. 너 어디 가니?”
“그냥, 근처에 왔다가 집에 가는 중이야.” 소심한 나는 활달한 그녀를 약간 경계하며 소리죽여 말했다.
“내 화실이 이 근처야.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함께 가서 한잔하자.”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반응에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갔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리되지 않은 어두운 화실 안을 살피려고 눈동자를 확장하려는 순간, 훤하게 빛을 발하는 덩치가 큰 잘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남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두 청춘 남녀 사이에 끼어있자니 무척 불편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친구들이 들이닥칠 거라며 더 놀다 가라는 그녀의 친절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는 화실에서 작업도 하고 잘생긴 애인도 있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젊음을 한껏 즐긴다’는 것에 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안국동 돌담길을 걷다가 저녁놀이 뜨고 지고 어스름한 밤이 올 때까지 광화문 정류장에 마냥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이끌어주길 기다리듯이.
우리는 우연히 같은 해 미국에 왔다. 친구는 그 멀쩡하고 덩치 큰 남자와 결혼하고 LA로 이민을 왔다. 나는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뉴욕으로 왔다. 그녀와 나는 전화 통화만 하다가 가물에 콩 나듯 LA와 뉴욕을 오가며 만난다. 고민 많던 그 시절, 나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내 기억에 각인되어 나는 그녀와의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듯하다.
이수임/화가
노란색 레몬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레몬나무가 봄을 느끼게합니다. 한개 뚝 따서 레몬향을 맡아보고 싶습니다. 이수임 작가의 그림은 늘 가까이에 서있는 친구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까지 써내려 오는데 내 책상이 온통 레몬향으로 가득찼습니다. 코로 입으로 그향을 맡으면서 안국동 골목과 광화문을 연상했습니다. 아무도 손잡아 주는 이 없는 처지가 암담함을 절감할 찰나 레몬향이 기쁨을 가져다 주어서 정신이 번쩍했습니다. 레몬향이 있는한 외롭지않고 이쪽저쪽에서 손잡고 싶다고 내미는 손들이 행복을 안겨줍니다. 고독 대신 레몬 추리가 성큼성큼 오고있습니다. 향이 너무 좋아서 두손을 펴고 안을 준비를 합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레몬나무가 있으니까요.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