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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jpgRobert Indiana, LOVE, 1966-1999, Channel Garden

2019년 맨해튼 6애브뉴&55스트릿 코너에서 보존을 위해 철거됐던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2018)의 인기 조각 'LOVE'가 9월 13일 록펠러센터의 채널가든에 설치됐다. 'LOVE'는 10월 23일까지 록펠러 플라자에서 열리는 로버트 인디애나 전시로 8피트 높이 강철조각 “One Through Zero”(The Ten Numbers, 1980-2001)과 인디애나가 9/11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그린 평화 그림이 록펠러센터 링크를 둘러싼 193개 깃발로 전시된다. 올 여름 채널가든 'LOVE' 자리엔 한인 조각가 이배(Lee Bae)씨의 숯덩이 조각 'Issu de Feu'(6/8-7/23)가 설치됐었다. <2023. 9. 16.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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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는 맨해튼 6애브뉴 & 55스트릿에 설치됐다가 2019년 보존을 위해 철거됐다.  

 

LOVE 조각으로 유명한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가 5월 19일 메인주 바이날헤이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인디애나는 1978년부터 뉴욕을 떠나 바이날헤이븐섬에 은둔해 살아왔다. 2013년 휘트니뮤지엄에서는 그의 회고전 'Robert Indiana-Beyond LOVE'가 열렸다. 사망 전날인 18일 맨해튼 법정에는 그의 작품을 대표했던 모간아트재단이 인디애나를 따돌리고, 지난 2년간 인디애나의 이름으로 제작해온 것으로 의심되는 그의 관리인 제이미 토마스와 퍼블리셔 마이클 맥켄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8. 5. 22>

 

 

로버트 인디애나(1928-2018): 사랑을 넘어서@휘트니뮤지엄(9/26-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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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1928-1987)이 팝 아트(Pop Art)의 스타였다면, 가장 유명한 팝 아트는 아마도 로버트 인디애나(1928- )LOVE 조각일 것이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LOVE 조각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히트작 LOVE는 그에게 축복이라기 보다는 저주였다. 전 세계에 조각이 설치되고, 티셔츠와 머그잔까지 LOVE는 수없이 복제됐지만, 그에게 돈도 명예도 주지 못했다.

 

지난 9 26일부터 휘트니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로버트 인디애나: LOVE를 넘어서(Robert Indiana: Beyond Love)’ 85세 작가 최초의 뉴욕 회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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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쉬타인, 클라에스 올덴버그가 미국의 상업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반면, 인디애나의 작품은 자전적이면서 단어와 숫자, 그리고 메시지를 강조해왔다.

 

로버트 인디애나: LOVE를 넘어서는 인디애나가 전후 미국 아방가르드의 중심 인물이었음을 입증하는 이 특별전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맥네이 아트 뮤지엄으로 순회전시된다.

 

 

LOVE와 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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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조각 @6애브뉴 & 55스트릿, NYC 

 

로버트 인디애나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이었다.

 

1964 MoMA는 인디애나의 회화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을 구입한 후 크리스마스 카드 디자인을 의뢰했다. 인디애나는 자신이 어릴 적 다니던 크리스천 사이언스 처치에서 늘 보던 God is Love 사인에서 영감을 얻은 LOVE를 디자인했다. 기울어진 O는 망가진 것일 수도 우아한 것일 수도 있다. 영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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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너무 많은 LOVE가 그의 재능을 깎아내고 있었다.

1960년대 LOVE 로고는 의류, 액세서리, 타월, 카페트까지 사용됐고, 1973년 미국 우표에도 등장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인디애나가 받은 LOVE 디자인료는 1000달러에 불과했다. 저작권 신청을 했지만, 단어는 저작권을 보호할 수 없다고 거부당했다. 인디애나의 LOVE는 전 세계에서 수없이 복제됐어도, 수입은 무일푼이었다.

 

 

SCOPE ANDY WARHOL AND ROBERT INDIANA WILLIAM JOHN KENNEDY 1963.JPEG

 

1963년 MoMA에서 앤디 워홀과 로버트 인디애나. Courtesy of Kiwi Projects Group
 

1957년 뉴욕에서 연 개인전은 비평가들로부터 무시당했다인디애나와 워홀은 1962년 뉴욕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워홀을 찬미했다인디애나는 워홀의 팩토리, 스튜디오 54와 할리우드 스타로 명성을 누리는데, 반해 자신은 그 만한 주목을 받지 못해 실망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동갑내기 워홀은 1987년 세상을 떠났고, 인디애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는 85세다.

 

나는 항상 더 크고, 더 대담한 LOVE 조각을 원했다

이제까지 가장 큰 건 12피트인데, 24피트 짜리 LOVE를 만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Robert Indiana: Beyond Love' Highlight

 

어느 예술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화가의 작품은 자전적이다. 입양되어 수많은 이사, 부모의 이혼 그리고 앤디 워홀과의 라이벌 의식... 인디애나의 작품은 애정 결핍과 가난,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08148812ap.jpg Photo: AP 

고아: 1928 9 13일 태어났다.

 

입양: 인디애나주 뉴 캐슬의 정유회사 매니저 얼 클락과 가정 주부 카르멘 와터스 부부가 입양했다. 본명은 로버트 클락. 외동 아들로 자랐다.

 

불안한 성장기: 17살 때까지 가족은 21차례 이사를 다녔다. 엄마는 친척의 살인 재판에서 증언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고, 아버지는 다른 여성과 혼외정사에 빠졌다. 8살 때 부모가 이혼하자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아버지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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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인디애나에게 부모는 어떤 모습이었나? ‘Mother and Father’(1963-66)

양부모: 휘트니 회고전 입구에는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를 연상시키는 남자와 여자의 그림 어머니와 아버지’(1963-66)'가 걸려있다남자는 늘 떠나는 자동차 앞에 선 아버지여자는 상반신이 벗겨진 매춘부 같은 모습의 어머니다.

 

화가의 꿈: 소년 인디애나의 꿈은 화가나 시인이었다. 그는 5살 때 부모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부모는 화가는 다락방에서 살며, 콩이나 먹고 산다’며 반대했다.

 

군대와 미술: 미 공군(1946-49)에 복무한 후 군인 장학금(GI Bill, 2차세계대전 재향 군인에게 주는 혜택)을 받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1949-53)에 다녔으며, 1953년 여름엔 메인주의 스코웨건회화조각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영국의 에딘버러미술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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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와 토템: 인디애나는 17세까지 21차례 집을 바꾸어야 하는 불안정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이삿짐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가족외동아들 인디애나에게는 도로 표지판과 자동차 바퀴가 강인하게 남아 있었다.

 

뉴욕 이주: 인디애나는 1954년 뉴욕 이주, 로어맨해튼 코엔티즈 슬립의 낡은 창고를 대여해 작업하기 시작하다. 여기서 아그네스 마틴, 엘스워스 켈리 등을 만났고, 켈리와는 한때 동성애 연인 사이였다. 인디애나는 켈리와 만나 갑자기 20세기에 왔다고 술회했다.

1969년 다운타운 스프링스트릿과 바워리스트릿의 5층짜리 빌딩을 렌트해서 작업했으며, 1978년 메인주 비날헤이븐으로 이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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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rphosis of Norma Jeane Mortenson'(1967)은 에서 자란 노마 진 모텐슨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면서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게 된 변형을 그린 작품이다. 

 

▶클락에서 인디애나로: 1958년 서른 살이 되자 미국을 테마로 한 작업을 하기 위해 성을 자신이 자란 주의 이름을 따 인디애나로 바꿈.(*페미니스트 작가 주디 시카고는 주디 코헨에서 고향 시카고로 바꾸었다.)

 

표지판 화가: 1959년 단어 철, 바퀴 등 아상블라쥬 작업으로 주목을 끔. 본인은표지판 화가(sign painter)’라고 자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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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성향: 인디애나는 친숙한 이미지와 오브제를 작품에 활용하는 팝 아트에서 벗어나 민권과 인종주의 등 정치적인 진술로서 작품을 제작했다.

 

먹다/죽다: 인디애나는 알래스카에서 공군으로 복무하던 중 암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병상의 어머니는 그에게 "밥은 먹었니?"라는 말을 남기고 5분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했고, 식당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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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는 또한 동성애 팝아티스트이자 라이벌이었던 앤디 워홀의 단편영화 ‘Eat’(1962)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인디애나는 소호의 아파트에서 40분 동안 버섯을 먹는다.

 

EAT: 1964년 건축가 필립 존슨은 뉴욕 세계박람회(New York World Fair)의 뉴욕주 파빌리온에 EAT 조각을 위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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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1966년엔 회화 'USA 666'를 발표했다. 인디애나는 아버지가 6인 가족 중 6월에 태어났으며, 필립스 66에서 일했다고 술회했다. 아버니는 하이웨이 66를 달리던 중 어머니를 버렸다면서 숫자에 대한 집착을 토로했다. 

 

9/11 조각: 인디애나는 20049/11 참사 후 작품을 모아 평화의 그림(Peace Paintings)’을 주제로 뉴욕에서 전시를 열었다.

 

▶마스덴 하틀리에게 경배를: 1989-1994년 사이 화가 마스덴 하틀리가 1913-15년 사이 베를린에서 작업한 전쟁 모티프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18점을 그렸다. 인디애나가 살고 있는 비날헤이븐 아일랜드는 1938년 메인주 출신 하틀리가 여름 휴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오바마를 위하여: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캠페인에 LOVE 스타일의 HOPE 머천다이징(티셔츠, , 범퍼 스티커, 포스터)으로 올린 기금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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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의상: 1976년 미 여성 참정권 주창자인 수잔 B. 안소니의 이야기를 그린 산타페 오페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The Mother of Us All)’의 의상을 담당했다.

 

섬으로 망명: 인디애나가 어렸을 때의 꿈은 탑이 있는 빅토리안 양식의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사진작가 엘리소폰이 사는 메인주의 섬 비날헤이븐의 빅토리안 하우스에 작업실을 빌려 시작하다가 1973년 엘리소폰이 사망하자 1만 달러에 사들인 후 1978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메인주는 랍스터로 유명하지만, 인디애나는 랍스터를 싫어한다. 그의 드림 하우스엔 개, 고양이, 거위들이 뛰놀고 있다.

 

경매: 2011년 12피트짜리 LOVE 조각이 410만 달러에 팔렸다.

 

사망: 2018년 5월 19일 메인주 바이날 헤이븐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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