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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Modern/Contemporary Artists
2017.10.28 23:35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생애

조회 수 59273 댓글 1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종이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 '마크 로스코: 종이 위의 회화(Mark Rothko’s Paintings on Paper)'가 워싱턴 DC의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of Art, 11/19, 2023-3/31, 2024)과 노르웨이 건축디자인국립미술관(The National 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Design, Norway, 5/16-9/22, 2024) 열린다. 이 전시엔 로스코에게 캔버스만큼이나 중요했던 종이 작업 100여점이 소개된다. 한편,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La Fondation Louis Vuitton)에선 대규모 마크 로스코 회고전 'Mark Rothko'(10/18, 2023-2/4, 2024)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엔 워싱턴 DC 내셔널갤러리와 필립 컬렉션, 런던 테이트 모던 등지에서 대여한 로스코 회화 등 115점이 선보인다. 회고전의 큐레이터는 수잔 파제(Suzanne Pagé)와 로스코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Christopher Rothko). <Update, 2023. 11. 13>

 

 

Regarding: Mark Rothko

마크 로스코(Mark Rothko)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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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1903-1970)와 201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200만 달러에 팔린 '오렌지, 레드, 옐로'(1961). 

 

제 2차 세계대전, 진주만 공습, 홀로코스트... 세계의 정세가 인간의 정서를 황폐화하고 있던 1940년대 뉴욕의 화가 잭슨 폴락(1912-1956)과 마크 로스코(1903-1970)는 캔버스에서 그림과 풍경, 스토리를 제거했다. 이들은 대신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추상표현주의 방식으로 미술에 정신세계를 도입했다. 

 

즉흥성을 중시한 폴락이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제스추어 드립 페인팅 방식으로 그린 반면, 사색적인 로스코는 대형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올라가 장시간 대형 페인트붓으로 그렸다. 동(動)적인 화가 폴락은 전성기에 교통사고로, 정(靜)적인 화가 로스코는 전성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Color Field Painting)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로스코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로스코는 고요한 작품에서 색채라는 세계 보편적인 미술 언어로 관람객과 소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코 색면화는 거울이자, 예배당이며, 로스코는 테라피스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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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MoMA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Abstract Expressionist New York)' 전에서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모은 갤러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뮤지엄, 휘트니뮤지엄에서 로스코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로스코가 생전 원했던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만 꾸며진 조그만 공간이었다.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걸리는 그룹전을 싫어했고, 옆에 어떤 그림이 걸리는가에 예민했다. 

 

워싱턴 DC는 로스코의 염원이 담긴 갤러리가 두곳이나 마련되어 있다.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of Art)과 필립스 컬렉션(Phillips Collection)엔 로스코 룸이, 텍사스 휴스턴엔 로스코의 그림으로 채워진 로스코 채플(Rothko Chaple)이 순례객들을 끈다. 

 

혼돈과 격변의 시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의 캔버스엔 사람도, 이념도, 종교도, 소셜미디어도 없다. 로스코의 색채로 가득한 무(無)의 캔버스는 탈종교적인 체험을 할 수 정신적인 공간인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생애를 돌이켜 본다.  

 

"난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만 훙미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와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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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Rothko

 

# 러시아에서 미국까지

1903년 러시아(현 라트비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커스 야코슬레비치 로스코비츠(Markus Yakovlevich Rothkowitz). 1913년 큰 아들의 징병을 피해 온가족이 이민, 뉴욕 엘리스아일랜드를 통과해 입국했다. 포틀랜드 오레곤에 정착한지 몇개월 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다.

 

# 종교와 결별

아버지 사망 후 1년간 유대교회당에서 애도한 이후에 자신의 종교인 유대교와 결별했다. 가장이 된 엄마는 캐셔로 일했고, 마르커스는 삼촌의 창고에서 일하면서 신문팔이도 했다. 

 

# 예일대 중퇴

1921년 로스코는 예일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공학이나 법률을 전공할 계획이었다. 웨이터와 배달부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예일대의 반유대 분위기, 인종차별과 허세에 불만을 느끼고, 이듬해 장학금 신청에서도 떨어지자 중퇴한다. 46년 후 로스코는 예일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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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ton Avery, March on the Balcony, 1952, Oil on canvas 44 x 34 in. Acquired 1961, Phillips Collection

 

# 스승 고르키, 베버, 에버리

뉴욕에 온 로스코는 1923년 맨해튼 가먼트 디스트릭트(패션가)에서 직업을 구한다. 어느 날 아트스튜던츠리그에 친구 만나러 갔다가 모델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파슨스에 입학, 아르메니아 출신 화가 아쉴리 고르키(Arshile Gorky)에게 배웠고, 해부학 강의도 들었다.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는 프랑스 출신 유대인 화가 막스 웨버(Max Weber)로부터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유럽 모더니즘을 배운다. 그리고,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로부터는 추상에 가까운 절제된 형태, 미묘한 컬러감각에서 영향을 받았다.

 

# 미술 그룹 10

1930년대 로스코는 모더니스트 화가 모임 'Ten(10)'에 참가했다. 아돌프 고틀리브, 루이스 해리스, 벤-지온, 조셉 사몬 등이 멤버였다. 

 

# 첫 결혼과 시민권 취득 

로스코는 스승 밀턴 에버리, 아돌프 고틀리브, 바넷 뉴만 등 동료화가들과 레이크 조지와 매사추세츠주 글로체스터에서 종종 휴가를 보냈다. 1932년 레이크 조지에서 쥬얼리 디자이너 에디스 사차를 만나 그해 결혼에 이른다. 1937년 에디스와 별거했다가 재결합한다. 1938년엔 나치의 득세와 미국 내 유대인 추방 움직임으로 인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이름도 마크 로스코로 바꾸었다. 

 

# 에디스와 이혼

 

1941년 로스코의 부인 에디스는 잘 나가는 쥬얼리 디자이너로 아파트(28스트릿@5애브뉴)에 공방을 운영했으며, 돈 못버는 화가 로스코는 뒤편에서 그림을 그렸다. 로스코의 스승이었던 화가 밀턴 에버리의 부인 샐리 에버리에 따르면, 에디스는 그림을 한점도 못파는 남편이 그림을 그만두기를 바랬다고 말했다고 한다. 로스코는 1943년 에디스와 다시 별거에 들어가고, 이혼에 이른다. 이후 기나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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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멜, 아들 크리스토프와 함께

 

# 멜과의 재혼

1944년 일러스트레이터 메리 엘렌 바이슬(Mary Alice "Mell" Beistle,애칭 "멜")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45년 걸작 'Slow Swirl at the Edge of the Sea'는 멜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 둘 사이에 딸 케이트와 아들 크리스토퍼를 두었다.

 

# 어린이는 작가의 영감

로스코는 1929년 브루클린의 유대인센터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영감도 받았다. 1933년 포틀랜드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에는 어린이들의 작품을 함께 걸었다. 이후엔 브루클린칼리지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36년 어린이와 근대화가들의 유사성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집필을 끝내지는 못했다.

 

# 작품의 진화

 

로스코도 초기엔 지하철 풍경을 그린 리얼리즘, 고대 신화를 해석한 초현실주의를 시도했으며, 이후 멀티폼(다층형상)의 과도기, 그리고 색면화로 정착한 시기로 진화했다. 그의 작풍은 리얼리즘 시기(1924~1940), 초현실주의 시기(1940~1946), 과도기(1946~1949), 고전주의 시기(1949~1970)로 나뉘어진다. 

 

# 어머니 사망, 화풍 변화

1948년 어머니가 사망했고, 1949년 뉴욕의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추상으로 가는 과도기의 다양한 형태(multiform)를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로스코는 관람객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 관람객들 자신의 감흥에 맡기기 위해 이때부터 작품 제목을 번호와 '무제(Untitled)'로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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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Matisse, The Piano Lesson, 1916, MoMA/ Mark Rothko, Untitled (Portrait),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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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스에게 경의를

1949년 로스코는 MoMA가 구입한 앙리 마티스의 '빨간색 작업실(Red Studio, 1911, 왼쪽)'에 매혹되었고, 1954년 이례적으로 제목이 제대로 달린 '마티스에게 오마쥬(Homage to Matisse, 오른쪽)'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딸 케이트 로스코가 아버지 사망 후 소장하고 싶었지만, 말보로갤러리가 팔아넘겼다. '마티스에게 오마쥬'는 2005년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2200만 달러에 팔린다. 

 

# 잭슨 폴락 Vs. 마크 로스코

미국을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옮긴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은 로스코보다 9살이 어렸지만, 액션 페인팅으로 먼저 스타덤에 올랐다.

 

라이프지는 1949년 8월 8일 "잭슨 폴락이 미국에서 생존한 가장 위대한 화가인가?"로 대서 특필하면서 1956년 8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전성기 누리다 갔다. 한편, 로스코는 구상을 시작했다가 폴락이 주목받기 시작한 1949년부터 색면화(Color Field)를 시작했다. 1950년 포춘지는 "투자 가치가 있는 화가"로 지목해 컬렉터들의 인기를 얻게 된다. 즉흥성을 중시한 폴락이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드립 페인팅을 했다면, 로스코는 대형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올라가 장시간 대형 페인트붓으로 칠했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 미켈란젤로의 영향

1950년 로스코는 유럽을 5개월간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에 심취했다. 특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미켈란젤로가 설계한 16세기 로렌조 도서관의 건축양식에서 감흥을 받았다. 

 

# 뉴욕학파와 분노한 화가들 The Irascibles

1950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이 12월 예정한 '미국 회화의 오늘(American Painting Today)'전에서 진보성향 미술에 적대적인 심사위원단에 불만을 품고, 이에 보이코트하는 공개서한에 추상표현주의 화가들로 구성된 뉴욕학파 18명이 서명했다. 이 편지에는 지미 언스트, 아돌프 고틀리브, 로버트 마더웰, 윌리엄 바지오테스, 한스 호프만, 바넷 뉴만, 클리포드 스틸, 리처드 푸세트-다트, 데오도로스 스타모스, 애드 라인하트, 잭슨 폴락, 마크 로스코, 브래들리 워커 톰린, 윌렘 드쿠닝, 헤다 스턴, 제임스 브룩스, 웰던 키스, 프리츠 벌트만이었으며, 조각가 데이빗 스미스와 루이스 부르조아 등도 지지성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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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Nina Leen

1951년 1월 라이프 잡지에 실린 The Irascibles. 잭슨 폴락, 클리포드 스틸, 로버트 마더웰, 오른쪽에 마크 로스코.

 

# 명예와 돈, 그리고 질투

1950년 포춘지의 찬사로 유명해지자 친구 화가 바넷 뉴만과 클리포드 스틸은 로스코를 "부르조아 열망으로 팔아먹는 작가"라고 비난했다.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은 로스코에게 주었던 자신의 그림을 모두 돌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친구들의 질투로 로스코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며, 소외되기 시작한다. 로스코는 자신이 화가로서 오해받고, 자신의 그림이 유행으로, 데코레이션을 위해 구매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작품이 컬렉터, 비평가들에게 먹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미술을 넘어서, 추상을 넘어서 감동을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로스코의 명성은 올라갔고, 돈은 쏟아졌다. 1961년 1월 존 F. 케네디의 취임식 무도회에서 아버지 조셉 케네디 옆에 앉았다. 그해 가을엔 MoMA에서 회고전이 열려 비평과 상업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을 거둔다. 로스코는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미술계는 또 다른 경향,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부상하게 된다. 팝 아트는 로스코의 철학과는 상극인 미술운동이다. 

 

# 팝아트 증오

물질주의를 혐오했던 마크 로스코는 팝아트를 경멸했다. 로스코는 팝아티스트들을 "돌팔이, 젊은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1962년 팝아트 전시를 보면서 "이 젊은 화가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가?"라고 말했다.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를 보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수년간 작업해왔는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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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시즌 레스토랑의 풀룸에 로스코의 그림이 장식되었더라면...

 

# 포시즌 씨그램 벽화, 1958

로스코가 돈 잘버는 화가가 되었지만, 부르조아 의식에 저항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1958년 맨해튼 파크애브뉴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씨그램(Seagram) 빌딩 내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Four Seasons)용 벽화를 위임받았다. 로스코는 이후 3년 반 동안 진홍색과 갈색을 테마로 한 3가지 시리즈로 30여점을 완성했다.  로스코의 의도는 포시즌에서 식사하는 부르조아들의 식욕을 떨어트리기고, 그들이 덫에 빠져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상한 벽화였다. 

 

어느날 아내 멜과 포시즌에서 럭셔리 식사를 하면서 고객들의 허세에 분노한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그곳에 전시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선금을 돌려주었다. 로스코는 씨그램 벽화 시리즈를 1968년까지 창고에 보관했다. 1970년 씨그램 벽화 9점은 런던의 테이트모던에, 1990년 7점이 일본의 카와무라메모리얼뮤지엄에, 나머지는 내셔널갤러리(DC)로 들어갔다. 

 

1958년 로스코는 제 2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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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코 룸, 필립스 컬렉션(DC), 1961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형제들처럼 한곳에 모이기를 원했다. 자신의 뮤지엄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1961년 로스코는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Phillips Collection)에 룸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컬렉터 던칸 필립스가 4점을 구입한 후 미술관 내에 로스코 룸을 실현했다. 

 

# 로스코 예배당(휴스턴), 1971

1954년 로스코는 화가 친구 에델 K. 슈와바처에게 시골 곳곳마다 길가에 외로운 여행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며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10년 후, 휴스턴의 아트 컬렉터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이 필립 존슨에게 예배당 설계를 위임하고, 로스코에게 14점의 회화를 의뢰했다. 로스코는 씨그램 벽화로 충돌했던 필립 존슨과 다시 의견이 맞지 않아 건축가가 바뀌게 된다. 1971년 로스코 예배당(Rothko Chaple)은 완공됐고, 로스코의 검은색면 회화가 설치된다. 로스코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 18인치 앞에서 보라

로스코는 생전에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캔버스에서 18인치(45센티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라고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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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미술관의 마크 로스코 작품. Yale University Art Gallery

 

# 그림은 소통, 종교적인 체험

로스코는 관람객이 그림에 대한 액면 그대로의 반응, 즉 비극, 절정, 운명 등 기본적인 인간의 정서에 집착했다. 색면회화는 인간의 관심과 인간적 대화의 무대였다. 이야기가 있는 독백이라기 보다는 상호작용하는 초월적인 드라마를 위한 공연의 공간이다. 그의 그림은 희망, 관능, 긴장, 아이러니, 죽음, 인생무상 등 여러 감정을 촉발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무너지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 자신이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통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적에 느끼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말했다. 

 

# 테크닉의 비밀

로스코의 색면화에는 조수들에게까지 비밀이었던 특별한 테크닉이 있었다. 아크릴릭 레진, 페놀 포말드하이드, 알카이드 외에도 달걀과 풀을 믹스해 사용했다. 덧칠 하기 위해서는 물감이 빨리 말라야 했기 때문에 개발한 것. 

 

# 멜과 별거

멜(메리 앨리스)과는 케이트(1950년 생)와 크리스토퍼(1963년생)를 낳은 후 1969년 1월 1일 별거를 시작, 69스트릿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 로스코 죽음, 1970

1970년 2월 25일 로스코는 피바다가 된 맨해튼 작업실 키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항우울제를 다량 복용해왔던 로스코는 팔을 면도날로 그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발표됐다. 로스코의 딸 케이트는 당시 19살, 아들 크리스토퍼는 6살이었다. 그의 가족은 소통을 중시하는 로스코가 유서 한장 없이 자살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화가 아그네스 마틴은 로스코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로버트 마더웰은 그의 죽음이 제의적이라고 밝혔다. 로스코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부하듯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설명도 거부한 것일까?

 

# 부인 멜 사망, 1970

같은해, 1970년 8월 아들 크리스토퍼가 TV 만화영화를 보고 있던 중 아내 멜이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한다. 로스코처럼 알콜중독이었던 그녀 나이 48세였다. 케이트와 크리스토퍼는 졸지에 고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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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East Building)의 마크 로스코 룸. 

 

# 미술사 최대의 법정소송

딸 케이트 로스코는 아버지 사망 후 마크로스코 재단의 유산 집행자 3인과 말보로 갤러리(Marlborough Gallery)를 고소했다. 이들이 아버지의 주요 작품 100점을 시세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에 넘기고, 698점은 판매 위임하면서 수수료를 50% 책정하면 유산을 빼돌린 것. 결국 이 소송은 1986년 15년만에 로스코 자녀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작품 절반의 상속권이 자녀에게 돌아갔고, 말보로 갤러리는 900만 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 딸과 아들

케이트 로스코 프리젤은 의대에 진학해 병리학자가 되었으며,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이후 12살까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이모네 집에서 자라다가 볼티모어의 누나 케이트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시간대 졸업 후 임상 심리학자로 근무하다가 1994년부터 아버지의 전시 지원과 강연을 하고 있다. 2015년엔 'Mark Rothko: From the Inside Out'를 출간했다.

 

# 연극 '레드(RED)'

로스코와 씨그램 벽화 이야기를 그린 연극 '레드(Red)'가 2009년 런던에서 초연된 후 2010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최우수 연극상을 비롯 토니상 6개 부문상을 수상했다. 

 

# 경매 기록

로스코가 남긴 회화는 총 836점으로 예일대에서 카탈로그(1998)가 출간됐다. 2012년 크리스티에서 'Orange, Red, Yellow'(1961년)가 작가 최고 경매가인 8200만 달러에 팔렸다.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의 생애 

https://www.nyculturebeat.com/?mid=Art2&document_srl=3656789

*마크 로스코 자살 미스테리와 미술계의 음모 <1>

https://www.nyculturebeat.com/?mid=Art2&document_srl=3657174

*마크 로스코 자살 미스테리와 미술계의 음모 <2>

https://www.nyculturebeat.com/?mid=Art2&document_srl=3658980

*마크 로스코 필립스컬렉션(DC) 

*내셔널 갤러리 마크 로스코 룸

*포시즌 레스토랑의 피카소 커튼 '삼각모자' 어디로 가나?

*씨그램 빌딩 포시즌 레스토랑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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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3.11.16 19:19

    화가 마크 로스코의 삶과 작품세계를 읽었습니다. 색면 화가가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화면에 색채만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한참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니까 느낌이 왔습니다. 색채만 있는 게 아니고 그속에 삶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용광로에 모든 인생이 녹아서 하나로 되는 것처럼, 그의 화폭속의 색채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하나로 묶어서 나타남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화폭 앞에서 눈물을 흘렸나 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