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QJ.jpg

'스릴러' '위 아 더 월드' 제작자 퀸시 존스 

Quincy Jones (1933-2024)

 

 

미 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듀서 중 한명인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11월 3일 밤 LA 벨이어의 자택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의 베스트셀러 앨범 '스릴러(Thriller)'를 비롯, 'Off the Wall' 'Bad' 등을 제작하며 흑백인종에 어필해 팝음악을 성공적으로 재편했으며, 'We Are the World'를 프로듀싱했다. 한편, 'The Pawnbroker'(1964), 'In Cold Blood'(1967), 'The Color Purple'(1985) 등 영화음악 작곡가, 편곡자로 활동하며 그래미상 후보에 80회 올랐으며, 28회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을 받았으며, 2013년 LA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본명은 퀸시 딜라이트 존스 주니어(Quincy Delight Jones Jr.), 1933년 3월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갱단을 위해 일하던 목수였으며, 어머니는 보스턴대 출신으로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퀸시와 형 로이드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어머니와 헤어졌고, 아버지는 형제를 켄터키주 루이빌로 데려가 노예 출신인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했다.   

 

 

Quincy-Jones-1960-in-Helsinki.jpg

Quincy Jones, 1960 in Helsinki. Wikipedia

 

퀸시가 10살 무렵 아버지가 워싱턴주 브레머튼 해군 조선소에서 일하며 합가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세 자녀에 또 세 자녀가 생기며 퀸시는 8형제 사이에서 구박을 받고 살았다. 시애틀에서 살던 11살 즈음 형과 레크리에이션센터에 무단으로 들어가 음식을 훔쳐먹고 피아노를 쳤다. 이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학교 밴드와 합창단에 들어가 금관악기, 리드악기, 타악기를 두루 배웠으며, 13살 때는 트럼펫주자 클라크 테리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14살 때는 당시 16세의 레이 찰스(당시 이름은 R.C. 로빈슨)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된다. 

 

시애틀의 가필드고교 졸업 후 시애틀대학에 입학했던 퀸시는 한 학기만에 장학금을 받고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쉴링거하우스)로 전학했다. 그리고, 햄튼 밴드에서 활동하며 트럼펫 연주자 겸 편곡자로 일했다. 20세 무렵 고교 때 만난 백인 여자친구 제리 콜드웰과 사이에 딸을 낳았으며, 195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햄튼 밴드를 떠나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뉴욕에선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와 색소포니스트 제임스 무디 등을 위한 프리랜서 편곡가로 일했으며, 재즈 트럼펫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밴드에서 음악감독, 편곡가, 트럼펫 연주자로 유럽, 중동, 남미 투어를 했다. 

 

1956년엔 자신의 이름으로 첫 앨범 'This Is How I Feel About Jazz'를 녹음했으며, 이듬해엔 파리로 이주해 5년간 바클레이 레코드에서 편곡자 겸 지휘자로 일하며 나디아 불랑제에게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이후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 'The Birth of a Band!', 'The Great Wide World of Quincy Jones'를 출반했다. 1964년 머큐리 레코드사 최초의 흑인 부사장이 됐으며, 카운트 베이시의 'I Can't Stop Loving You' 편곡자로 첫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퀸시 존스는 1967년 19세의 스웨덴 모델 울라 앤더슨과 재혼하며 영화음악에 매진했다. 1974년엔 뇌동맥류로 두 번의 수술을 받게된다. 첫 수술 후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예상하고 LA에서 추모 콘서트까지 열어 사라 본, 레이 찰스가 출연했다. 퀸시 존스는 마치 자신의 장례식같은 추모 콘서트를 지켜보면서 살아남았다. 만성적인 바람둥이였던 존스는 배우 페기 립튼과 세번째 결혼을 했으며, 1977년엔 TV 미니 시리즈 '뿌리(Roots)'의 음악을 작곡했다.

 

 

QJ2.jpg

quincyjones https://www.instagram.com

 

1978년 시드니 루멧 감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The Wiz'의 영화판 음악 감독을 맡으며, 퀸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과 처음으로 작업했다. 이를 계기로 'Off the Wall', 'Thriller', 'Bad' 앨범을 콜라보하며, 미국 내 4천600만장(세계 판매량 2배)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앨범이 된다. 1985년엔 라이오넬 리치, 마이클 잭슨, 브루스 스프링스틴, 대릴 홀, 폴 사이먼,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 40여명의 팝스타(USA for Africa)들이 참가한 앨범 'We Are The World'을 제작했으며, 수백만달러의 기부금을 모금하고 그래미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1986년 존스는 세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수면제 헬시온에 의존하며 말론 브란도의 휴양지였던 타이티의 한 섬으로 도피했다가 한달만에 회복되어 돌아왔다. 1989년 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스 데이비스, 아이스-티, 루터 반드로스, 배리 화이트가 참가한 앨범 'Back on the Block'으로 복귀에 성공해 '올해의 앨범'을 비롯, 그래미상을 6개나 수상했다.

 

1990년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은 퀸시존스 엔터테인먼트로 확장했고, 시트콤 'The Fresh Prince of Bel Air'와 'In the House'와 스케치 쇼 'Mad TV 등을 제작했으며, 힙합 잡지 'Vibe' 등 출판사업까지 확장했다. 퀸시 존스는 여러 장르를 혼합하는데 탁월한 프로듀서였다. 1991년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콘서트를 제작하며 마일스 데이비스와 길 에반스를 재회시켰으며, 여기서 만난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와 4년간 동거해 7번째 자식 케냐 줄리아 미암비 사라 존스가 태어났고, 현재 모델로 활동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퀸시 존스는 91세로 영면하기 전까지 미완성의 프로젝트가 많았다.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에 대한 뮤지컬, 아프리카 뿌리에서 흑인 미국 음악의 역사를 다룬 시르크 뒤 솔레이유 쇼, 브라질 카니발에 대한 영화, 랄프 엘리슨의 미완성 소설 "Juneteenth"의 영화 버전, 아프리카계라고 알려진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삶에 대한 영화 등이 남겨졌다. 

 

 

Quincy Jones, Giant of American Music, Dies at 91

As a producer, he made the best-selling album of all time, Michael Jackson’s “Thriller.” He was also a prolific arranger and composer of film music.

https://www.nytimes.com/2024/11/04/arts/music/quincy-jones-dead.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