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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arding Warhol: Sixty Artists, Fifty Years

 9월 18일-12월 31일@메트로폴리탄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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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휘트니뮤지엄 건물에 현대미술전을 시작할 메트뮤지엄이 팝아트(Pop Art)의 선구자 앤디 워홀 특별전을 열고 있다. Photo: Sukie Park

 

 
메트로폴리탄뮤지엄(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 9월 18일 앤디 워홀(Andy Warhol) 특별전을 공식 개막했다. 
‘워홀에 관하여: 60명의 아티스트, 50년의 세월(Regarding Warhol: Sixty Artists, Fifty Years)’을 타이틀로 한 이 특별전은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있는 아티스트로 평가되는 워홀의 주요 작품과 그에 영향을 받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병치하고 있다. 

 


20세기 팝 아트(Pop Art)의 아이콘 앤디 워홀은 메트뮤지엄보다 MoMA나 휘트니뮤지엄에 어울릴 주제인듯 하다. 하지만, 메트는 2015년 휘트니뮤지엄 건물을 8년간 임대해 현대미술 전시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따라서 이번 앤디 워홀 특별전은 메트가  MoMA, 휘트니, 구겐하임에 일종의 출사표처럼 보인다. 

 

 

war3.jpg 앤디 워홀하면, 캠벨 토마토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그림, 컬러풀한 마릴린 먼로 초상화, 지루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다큐멘터리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워홀은 1950-60년대 선배들이 일제히 추구했던 ‘고고하고, 숭고하며, 철학적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수퍼마켓과 할리우드에 눈길을 돌렸다. 낮은 곳을 향해, 일상에, 대중문화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워홀은 ‘팝 아트(Pop Art)’의 선구자가 된다.

 

 

앤디 워홀은' 20세기의 르네상스 맨'으로 불리운다. 그는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조각가, 작가,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레코드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워홀에 관하여: 60명의 아티스트, 50년의 세월'전은 워홀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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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의 비평가 로버타 스미스와 뉴욕 매거진의 제리 솔츠는 앤디 워홀 특별전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지만,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의 눈에 이 전시는 매혹적이다. 리히터, 허스트, 쿤스, 무라카미, 셔만, 클로스, 아이 웨이웨이 등 오늘날 최고의 미술가들이 모두 워홀의 엄브렐라 안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워홀에 대한 재발견이다. .

 

예전에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뮤지엄을 방문해서 느꼈던 지존의 워홀과는 달리, 메트의 특별전은 지난 50년간 워홀의 궤도 안에서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유기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워홀과 그의 후예들이 작품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총 5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서 소개되는 이 특별전엔 워홀의 작품 45점과 아티스트 60여명의 작품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 앤디의 영향권 하에 있는 아티스트들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드레아스 거스키, 척 클로스,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시그마 폴케, 알렉스 카츠, 브루스 나우만, 키스 헤어링, 잠 미셸 바스퀴아, 줄리안 슈나벨, 데이빗 호크니, 신디 셔만, 리처드 아베돈, 로버트 메이플토프, 캐더린 오피, 리처드 프린스, 빅 무니스, 마우리지오 카텔란, 그리고 아이 웨이웨이까지 호화 캐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전시는 올 12월 31일까지 계속된다. 전시 기간 중엔 뮤지엄 로비의 그레이트홀엔 워홀의 10피트 꽃(Ten-Foot Flowers, 1967)’이 선보인다. www.metmuseum.org

 

*메트뮤지엄 하이라이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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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Andy's World! 앤디 워홀의  작품 45점 + 후예들 작품 60점=특별전의 입구.   

Andy Warhol in Five Chapters  

# 1 일상의 미술

  

첫 갤러리 ‘일상의 뉴스: 따분함에서 재난까지(Daily News: From Banality to Disaster)’에선 신문, 잡지에서 발굴한 소재로 작업했던 워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시그마 폴케, 한스 하케, 빅 무니스, 사라 루카스 등이 뉴스에서 소재를 구하는 후예들이다. 


뉴욕에 온 후 그래픽아티스트로 일했던 워홀이었기에 순수미술을 하는 아티스트들과 관심이 달랐다. 그에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표현에 치중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노선이 달랐다.  실재하는 물체에 더 관심이 있었다. 미국이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치닫고 있던 시대, 그는 수퍼마켓이나 백화점 등 일상에서 소재를 발견했다. 캠벨 수프, 코카콜라, 수세미비누 박스 작품 등으로 소비주의 미국을 표현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더 크게(Bigger)’의 캔버스였다면, 워홀은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로 대량생산과 복제사회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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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Icebox('1961)와 'Brillo Soap Pads Box'(1964), 시그마 폴케의 'Plastic Tubs'(1964), 캐디 놀란의 'Untitled (Bin with Octane Boost)'(1992-93).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아티스트란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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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Big Campbell's Soup Can, Beef Noodle'(1962 )과 아이 웨이웨이의 'Neolithic Vase with Coca Cola Logo'(2010).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미국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산다는 것에 있다. 당신은 TV를 보면서 코카콜라를 본다. 이 나라의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을 안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콜라는 콜라이며, 아무리 돈을 더 준다고 해도 거리 구석에서 거지가 마시는 콜라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같고, 모든 콜라는 좋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대통령도, 거지도, 당신도 그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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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안 허스트의 'Eight over Eight'(1997-98), 제프 쿤스의 'Ushering Banality'(1988), 그리고 워홀의 'Green Coca-Cola Bottles'(1962).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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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학케, 'Helmsboro Country'(1990)와 브루스 나우만의 'OFFICE EDIT I (Fat Chance John Cage)(2001).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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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Orange Disaster #3'(1963)과 장 미셀 바스퀴아의 'Untitled(Head)'(1981).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난 항상 죽기를 바랬다. 그리고, 난 아직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난 모든 것을 다시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난 항상 나 자신의 묘비에 아무 것도 써있지 않기를 바랬다. 이름 조차도. 아, 사실, 난 ‘허구’라고 남기고 싶다.”
 

 

# 2 유명 인사

  

워홀은 상업미술가답게 캠벨 수프 캔, 코카콜라 병, 브릴로 박스 등 패키지에 흥미를 보였다. 할리우드 스타들도 사실은 이미지/패키지 유형의 인물들이다. 어려서부터 피부병과 난독증으로 인해 열등감이 많았던 워홀은 어려서부터 스타들에 빠졌다고 한다.

 

‘초상화: 유명인사와 권력(Portraiture: Celebrity and Power)’을 주제로 한 갤러리에선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Red Jackie, 64), 마릴린 먼로(Turquoise Marilyn, 64),  마오저뚱(Mao, 73) 등이 소개된다. 이와 함께 알렉스 카츠, 척 클로스, 신디 셔만, 제프 쿤스, 마우리지오 카텔란, 엘리자베스 페이톤 등의 인물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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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Diamond Dust Joseph Beuys'(1980), 척 클로스의 'Phil'(1969), 워홀의 Screen Test 'Lou Reed'(1966)와 'Nico'(1966). 'Twenty Marilyns'(1962).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난 LA를 사랑한다. 할리우드도 사랑한다. 그들은 아름답다. 모두가 성형적이지만, 난 성형을 좋아한다. 나도 성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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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쿤스의 'Michael Jackson and Bubbles' (1988), 워홀의 'Silver Liz'(1963)와 'Triple Elvis'(1963).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다시 태어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손가락에 낀 위대한 반지가 된다면 황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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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리지오 카텔란의 'Stephanie'(2003), 워홀의 'Nan Kempner'(1973), 알렉스 카츠의 'Lita'(1964).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초점이 맞아야 하며, 유명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15분간 유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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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디 셔만의 'Untitled #183A'91988-89), 제프 쿤스의 'Louis XIV'(1986), 워홀의 'Mao'(1973). SP
 

 
# 3 섹슈얼리티

  

수수께끼적인 인상의 워홀은 동성애자였고, 그 시대 이미 카밍아웃한 상태였다. 그는 1980년(52세)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총각(virgin)이라고 밝혔다.  파티광이었던  워홀은 특히 장 미셸 바스퀴아와 절친한 사이였다.

  

‘동성애 연구: 위장과 변화하는 정체성(Queer Studies: Camouflage and Shifting Identities)’ 갤러리의 센터에 걸려 있는 카모플라쥬한 자화상(86)은 사망 1년 전에 완성됐다. 이 갤러리에선 워홀의 장 미셸 바스퀴아 전신 누드(84), ‘뒤에서 본 토루소(Torso from Behind, 77)’, 데이빗 호크니의 ‘샤워를 해라(Take a Shower, 64)’ 등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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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Torso From Behind'(1977), 'Self-Portrait'(1986), 데이빗 호크니의 'Boy about to Take a Shower'(1964).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모두 알고 싶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표면을 보기만 하라. 거기에 내가 있다. 뒤엔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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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Jean-Michel Basquiat'(1984)와 'Toruso from Behind'(1977).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환상 속의 사랑은 실제 사랑보다 훨씬 낫다. 한번도 그걸 하지 않는 것은 흥분된다. 가장 흥분되는 매력은 양쪽이 절대로 만나지 않는 것에 있다.” 

 


# 4 소비는 미덕

  

워홀의 작품에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소비하는 이미지: 유용, 추상, 연속(Consuming Images: Appropriation, Abstraction, and Seriality)’에선 소비사회 광고를 비롯, 스포츠(Basebal, 63), 미술사의 인기 소재(Mona Lisa, 63), 그리고 추상(Oxidation Painting, 78)과 꽃 등을 보여준다. 고 백남준씨의 ‘TV를 위한 선(Zen for TV, 63-75)’를 비롯해 리처드 프린스, 신디 셔만 등의 작품도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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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Mona Lisa'(1963)와 'Marilyn Monroe's Lips'(1962).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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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Nine Jackies'(1964),   백남준의 'Zen for TV'(1963-75). 길버트&조지의 'Red Morning Drowned'(1977), 안셀름 카이퍼의 'Wege'(1978).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인생이란, 각자가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이미지의 시리즈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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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Prada I'(1996). SP
 

# 5 미술은 장사

  

‘경계는 없다: 사업, 협력, 스펙터클(No Boundaries: Business, Collaboration, and Spectacle)' 섹션에선 영화작업, ‘인터뷰’ 잡지 발간, 그리고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했던 워홀의 세계를 탐구한다. 꽃 무늬 벽지로 도배된 갤러리 벽 옆으론 타카시 무라카미의 작품과 제프 쿤스의 강아지 화병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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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Dollar Sign'(198? ), Flower(1964), 그리고 제프 쿤스의 'Puffy'(1998).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난 10-15명의 사람들에게 무언가 제안하라고 물었다. 마침내 한 나이 든 여성이 바른 질문을 했다. “당신은 무엇을 가장 사랑하지요?” 그래서 난 돈을 그리기 시작했다.”  

 

# 에필로그

  

마지막 갤러리는 워홀의 실크스크린 ‘황소 벽지(Cow Wallpaper, 66)’와 폴리에스터 필름으로 만든 ‘은색 구름(Silver Clouds, 66)’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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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의 'Cow Wallpaper'(1966)과 'Silver Clouds'(1966). SP


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난 심오하게 피상적인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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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andywarhol_selfportrait.jpg  사업 수완이 좋다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종류의 예술이다. 돈 버는 것은 예술이며,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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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1928-87)

 

 

▶피부병과 고독: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드레이 바촐라 주니어(Andrej Varchola, Jr.). 초등학교 시절 성홍열의 후유증으로 인한 신경증세로 인해 피부병이 생겼다. 이와 함께 소년기 우울증으로 병원과 의사를 기피했고, 학교에서도 왕따 당해 엄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워홀이 13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소년 앤디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영화배우 사진을 수집해 방을 꾸몄다.

 

 

▶그래픽 디자인: 10대 때 난독증으로 공부보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후 미술교사가 되기 위해 카네기인스티튜트오브테크놀로지(현 카네기멜론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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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오다: 1949년, 스물한살의 소심한 청년 워홀은 뉴욕에 왔다. 잡지 삽화가와 광고 디자이너로 일한 후 구두 잡지에 그린 잉크 드로잉으로 유명해진다. RCA 레코드사에 취직해서 앨범 커버와 판촉물을 디자인하면서 실크 스크린 판화법을 배웠다.

 

 “당신이 무언가를 정말 잘못하면, 당신은 항상 대단한 것이 된다.”

 

 

CRI_106679-moma 소장.jpg  16mm 영화 '엠파이어'(1964) 

팝아트 시대의 개막: 1962년 뉴욕 보들리갤러리에서 데뷔 개인전을 열었으며, 같은 해 11월 스테이블갤러리에서 팝아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마릴린 먼로, 100개의 수프 캔, 100개의 코카콜라병, 100개의 달러화를 선보였다. 1962년 MoMA에서 팝아트에 관한 심포지엄을 주관했다. 1963년엔 시인 존 지오르노의 잠자는 모습을 담은 영화 ‘잠(Sleep)’과 3시간 5분 동안 빌딩을 보여준 '엠파이어(Empire)'를 만들었다. 유명인사들과 신문에서 소재를 구하며 작업하던 워홀은 작업실 ‘팩토리(The Factory)’를 설립하고, 화가, 작가, 뮤지션, 언더그라운드 유명인사들과 교제를 했다.


 그의 팝아트는 인기를 얻었지만, 비판도 거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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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Green Coca-Cola Bottles'(1962)와 'Big Campbell's Soup Can, Beef Noodle'(1962). SP

 

▶갤러리에 수퍼마켓: 1964년 워홀은 5명의 팝아티스트들과 함께 ‘미국의 수퍼마켓(The American Supermarket)’라는 타이틀의 그룹전에서, 식료품, 깡통 식품, 육류, 포스터 등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수퍼마켓 물품을 갤러리에 설치했다. 워홀은 이 전시에서 캠벨 토마토 수프 그림을 전시했다. 이 전시는 ‘무엇이 미술이며, 무엇이 미술이 아닌가’의 논쟁을 촉발시킨다.
 

 

I%20Shot%20Andy%20Warhol.jpg  ▶살해 미수: 1968년 팩토리에 드나들던 무명의 페미니스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가 워홀과 큐레이터 마리오 아마야를 총으로 쏘았다. 워홀은 부상을 입었지만, 죽을 때까지 살해미수 후유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을 옮긴 영화가 마리 헤론 감독, 릴리 테일러 주연의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 1996)'이다.

 

 

 michael_jackson_andy_warhol_painting.jpg ▶유명인사 초상화: 70년대 워홀은 믹 재거, 라이자 미넬리, 존 레논, 브리짓 바르도, 마이클 잭슨, 다이애나 로스, 마오 저뚱 등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1973년엔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으며, 2년 후엔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을 출간했다.

 

 

▶장사꾼 아티스트: 80년대 장 미셸 바스퀴아, 줄리안 슈나벨 등 신추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워홀의 인기는 다시 정점에 이른다. 유명인사들의 초상화 전시회를 하자 ‘피상적이고, 경박하며, 상업적인 장사꾼 아티스트’라는 비판을 받았다.

 

 

tumblr_l9fbhxmZUJ1qalq4so1_400.jpg ▶마지막 숨결: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쓸개 수술 후유증으로 수면 도중 사망했다. 피츠버그의 카톨릭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는 워홀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색 캐쉬미어 수트에 페이슬리 무늬 넥타이, 가발, 선글래스 차림에 기도문과 빨간 장미를 든 모습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덤에는 그가 창간한 잡지 ‘인터뷰’, 인터뷰 T셔츠, 그리고 에스테로더의 향수(Beautiful)도 함께 묻혔다. 그해 4월 1일 맨해튼 세인트 패트릭 처치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유언: 워홀은 자신의 재산을 ‘시각미술의 발전’에 기여할 재단 설립에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소더비는 무려 9일에 걸쳐서 그의 소장품을 경매해서 총 2000만 달러를 올렸다. 1991년 고향 피츠버그에 개인 뮤지엄으로서는 미 최대 규모인 앤디 워홀 뮤지엄(The Andy Warhol Museum)이 설립됐다.

 

 

5810640_std.jpg ▶워홀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66)이외에 워홀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었다, 같은 해 화가이자 워홀의 친구였던 줄리안 슈나벨은 요절한 화가 장 미셸 바스퀴아의 삶을 그린 영화 '바스퀴아(Basquiat, 1996)'를 연출했다. 이때 바스퀴아의 멘토였던 워홀 역은 가수 데이빗 보위, 바스퀴아 역은 제프리 라이트가 맡았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경매: 2006년 ‘8명의 엘비스(Eight Elvises, 1963)’가 개인 소장가에게 1억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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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 워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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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와 기념품 숍을 지나면, 또 하나의 앤디 워홀 보너스가 기다린다. 메트와 휘트니뮤지엄이 공동으로 소장한 'Ethel Skull 36 Times'(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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