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개의 전설' 밥 말리(Bob Marley)를 다시 본다
페이스북 팔로워 3천만명...'아랍의 봄' 시위 주제가
밥 말리의 삶, Bob Marley: A Life
흑백 혼혈아로서 늘 소외됐던 밥 말리. www.BobMarley.com
세계를 움직이는 팝뮤직은 미국과 영국이 지배해왔다. 비틀즈, 롤링스톤스,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마돈나, 레이디 가가까지 두 나라가 독식해왔다. 미국의 중서부 지대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은 우리에겐 고색창연하고, 구태의연하게 들리는 컨트리 뮤직이다. 매년 컨트리뮤직상 시상식에 미 방송사가 요란을 떠는 것도 컨트리 음반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샹송, 이탈리아에 칸초네도 있엇다. 최근엔 K-Pop도 작은 바람을 일으졌지만, 세계 팝 시장에서는 아직 미미하다. 영미를 제외한 나라의 뮤지션이 빌보드 차트 톱 10에 오르기는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듯이 힘든 일이다.
제 3세계 출신으로 팝뮤직 역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인물은 바로 레게(Reggae)의 전설 밥 말리(Bob Marley, 1945-1981)다. 캐리비아 해 쿠바 아래 조그만 섬나라 자메이카에서 온 밥 말리와 웨일러스(Bob Marley & the Wailers)의 레개 음악은 70년대 영국에서 소개된 후 유럽을 뒤흔들었다.
밥 말리는 ‘No Woman, No Cry’ ‘One Love’ ’Exodus’ ‘Jamming’ ‘Redemption Song’ ’Buffalo Soldiers’ ‘Get Up, Stand Up’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유럽에서 '레게의 황제'로 부상했다. 하지만, 1980년까지 미국 시장에선 거의 무명이었다. 1980년 9월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주역이 아니라 '코모도스(Commodors)' 콘서트의 오프닝 밴드 자격으로 뉴욕에 왔다.
밥 딜런의 서정성, 스모키 로빈슨의 목소리, 체 게바라의 카리스마를 갖춘 밥 말리.
콘서트를 앞두고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밥 말리는 갑자기 거품을 물로 쓰러졌고, 피부암 말기 진단이 내려졌다. 영국에서 축구를 즐기던 말리는 그 전 발가락 질환으로 다리를 자르느냐 마느냐 하는 지경까지 갔었다. 병원 정기 검진을 등한시했던 그에게 발가락은 암의 시발이었고, 어느새 온 몸에 퍼져있던 것이다. 미국에서 막 이름이 알려질 무렵, 말리는 서른여섯 살에 이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밥 말리는 사실 순수 흑인이 아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처럼 혼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에서 온 백인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그는 소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으며, 늘 아웃사이더였다.
가난한 섬나라에서 태어난 혼혈 소년이 제 3세계 최초의 팝 수퍼스타가 됐다. ‘밥 딜런 같은 서정적인 가사의 힘, 존 레논 같은 카리스마, 스모키 로빈슨 같은 목소리…’라고 평가되는 말리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말리(Marley)’가 20일 뉴욕에 개봉됐다.
케빈 맥도날드(Kevin McDonald) 연출한 다큐 ‘말리’엔 그의 어머니, 여인들과 자식들, 그리고 밴드 웨일러스의 멤버 등 말리 삶의 인사이더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외로운 소년 말리' ‘뮤지션 말리’’운동가 말리’’죽음과 싸우는 고독한 남자’의 모습을 회고한다.
세상을 떠난지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밥 말리의 페이스북 팔로어는 3천만명에 이른다. 레게뮤직의 전설, 말리의 삶을 돌이켜 본다.
러닝타임 145분, 링컨센터 엘리노부닌먼로 필름센터(www.filmlinc.com/films/series/elinor-bunin-munroe-film-center), 랜드마크시네마(Landmark Theatres. www.landmarktheatres.com) 상영.
흑인 노예와 자메이카
▶노예 수출의 역사=다큐멘터리 ‘말리’의 첫 장면은 아프리카 서부 가나(Ghana)의 노예 수출 항구에서 시작된다. 수백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 건너 신대륙에 노예로 팔려간 그 역사의 생생한 증거다. 그 항구의 이름은 ‘Door of No Return’이다. 말리의 삶과 음악에 깔린 부조리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자메이카의 국민 영웅=세계 최고급 블루마운틴 커피를 생산하는 자메이카에서 밥 말리는 국민 영웅이다. 그가 세계에 퍼트린 레개 음악은 훗날 펑크 록, 그리고 미국의 랩(rap) 뮤직과 힙합(hop-hop), 그리고 한국의 김건모까지 영향을 끼쳤다. 자메이카 출신 랩 뮤지션으로는 ‘너터리우스 B.I.G.(The Notorious B.I.G.)’와 ‘헤비 D(Heavy D)’도 자메이카 출신이다. 레게 뮤지션 지미 클리프(Jimmy Cliff), 레게 뮤지션 데스몬드 데커(Desmond Dekker), 모델 겸 디스코 싱어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도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또한, 영국 출신 007 제임스 본드의 저자 이안 플레밍은 자메이카에 살면서 007의 배경을 대부분 자메이카로 설정했다. 톰 크루즈가 바텐더로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 ‘칵테일(Cocktail)’의 무대와 동계 올림픽의 봅슬레이 팀 실화를 그린 ‘쿨 러닝(Cool Running)’도 자메이카가 무대였다.
▶자메이카 독립=스페인의 식민지에서 1655년부터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던 자메이카가 독립한 것은 1962년 8월 6일이었다.
▶레게(Regae)=엇박자가 특색인 레개음악은 ‘마시고 춤이나 추자(Drink and Dance)’가 그 음악의 철학이다. 삶이 고단할지라도 슬픔을 날려보내고파 하는 섬 나라의 낙천주의가 깔려 있다.
밥 말리가 태어난 자메이카 산골 나인마일스의 집. 지금은 뮤지엄이다.
혼혈 소년 '로버트 네스타 말리'
▶말리의 출생=본명은 로버트 네스타 말리(Robert Nesta Marley).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시골 마을 나인마일스에서 태어났다. 열여섯살의 미인이었던 세델라 부커(Cedella Booker)는 영국에서 플랜테이션 감독으로 온 40여세 연상의 캡틴 노발 말리(Norval Marley)와 사이에 아들을 출산했다.
▶정체성 고민=그러나, 아버지 말리는 로버트 출산 이후 사라졌다. 양육비만 보내주는 정도였던 아버지는 70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열살이던 말리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두고 평생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웃사이더=친가에서 흑인 소년의 존재를 인정할 리 없다. 흑인들도 혼혈 소년을 거부했다. 양쪽에서 거부당했던 말리 음악과 여성 관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라스파타리아니즘을 통해 아프리카를 자신의 고향으로 포용하게 된다.
▶첫번째 음반=열여섯살 때 첫 싱글 ‘Judge Not’을 발매. 가사는 "저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그리고, 그걸 주장하지도 않지요/그래서 손가락질 하기 전에/당신이 손이 깨끗한지 확인하세요(I know that I'm not perfect/ And that I don't claim to be/ So before you point your fingers/ Be sure your hands are clean.)" 아버지 없는 혼혈 소년의 읊조림이다. ‘Corner Stone’의 가사는 "(건축가가 거부한 그 돌은/항상 초석이 될 것이야(The stone that the builder refused/ Will always be the head corner stone)."
▶축구광=말리는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늘 축구를 즐겼다. 70년대 후반 밥 말리와 웨일러스는 런던 남쪽의 배터시파크에서 내셔널 팀을 상대로 축구 경기도 했다.
▶타고난 경쟁심=자메이카에 대한 게으르고, 몽환적인 이미지와 달리 말리는 무척 근면하고, 추진력 있으며, 경쟁심이 치열한 인물이었다. 케빈 맥도날드의 다큐에서 말리는 소년 같은 순수함과 이상주의를 강조한다.
밥 말리와 함께 무대에 섰던 쿠바 출신 싱어 리타 앤더슨은 그의 아내가 됐다. 할리우드의 와인스타인
컴퍼니는 그녀의 회고록 'No Woman, No Cry'를 원작으로 극영화를 기획 중이다.
▶미국 이민=청년 시절 말리와 엄마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델라웨어주 윌밍턴으로 이민왔다. 그때 말리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공원으로 일했다.
▶말리의 여인들=1966년 쿠바 출신 백업 싱어 리타 앤더슨과 결혼했던 말리는 미스 월드 왕관을 썼던 자메이카 출신 미녀 신디 브레이크스피어 등 일곱명의 여인과 사이에 공식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1980년 런던의 크리스탈팰리스에서 공연하는 밥 말리와 웨일러스. Photo: Emanuel Berglund
자메이카 떠나 런던으로 망명
▶암살 위기 모면=1976년 자메이카의 수상 마이클 맨리가 주최한 ‘스마일 자메이카’ 콘서트 이틀 전 괴한의 침입으로 총상을 입는다. 말리는 무상에도 불구하고,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영국 도피=암살 위기를 넘긴 말리는 모국의 정치적인 갈등을 뒤로한 채 영국으로 망명한다.
▶레코드 제작자 크리스 블랙웰=1972년 돈이 궁했던 밥 말리와 웨일러스는 런던 아일랜드레코드(Island Records)의 프로듀서 크리스 브랙웰(Chris Blackwell)을 만나 음반 제작을 논의하고 선불을 요구한다. 블랙웰은 마침 자메이카 출신 레게 스타 지미 클리프가 떠난 후라 대치할 뮤지션이 필요해져 수락한다. 그래서 나온 첫 앨범이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e)’였다.
▶앨범, 라이브=밥 말리와 웨일러스는 라이브 앨범(4)과 스튜디오 앨범(7) 등 도합 11장의 앨범을 냈다. 1978년 더블 라이브 앨범 ‘바빌론 바이 버스(Babylon by Bus)’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마지막 트랙에 담긴 ‘재밍(Jamming)’은 말리의 라이브 공연을 살린 녹음으로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정치색 앨범=1979년 ‘아프리카 유나이티드’’짐바브웨’’Wake Up and Live’ 등을 담은 앨범 ‘서바이벌(Survival)’ 출반. 1979년 보스턴의 아만디아 페스티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비판.
▶말리를 짝사랑한 대통령의 딸=아프리카 흑인 파워 회복을 강조하는 라스타파리안(Rastafarianism)을 믿었던 밥 말리는 1980년 아프리카 가봉(Gabon) 공화국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70년대 한국을 방문해 우표에도 등장했던 가봉의 오마르 봉고(Omar Bongo)는 독재자였고, 그의 딸은 밥 말리와 사랑에 빠졌다.
레개 프로듀서 크리스 블랙웰의 주선으로 마련된 런던의 아파트.
유럽 제패 후 뉴욕 상륙했지만
▶마지막 콘서트=1980년 ‘업라이징(Uprising)’을 낸 후 9월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코모도스의 오프닝 액트로 두 차례 콘서트가 잡혀 뉴욕에 왔다. 센트럴파크 조깅 중 쓰러져 피부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말리는 9월 23일 피츠버그의 스탠리시어터에서 공연을 마지막으로 투어 콘서트 전면 취소했다. 그후 말리의 투병기는 미국 언론에 대서 특필되기에 이른다.
▶말년의 말리=한겨울 독일의 바바리아 클리닉에서 키모테라피와 식이요법을 받으며, 암과 투병. 1981년 5월 마이애미를 경유, 자메이카로 가던 중 마미애미에서 병원으로 호송됨. 다음 날인 5월 11일 눈을 감았다.
▶말리의 유언= 아들 지기 말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돈으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단다.(Money can’t buy life)’.
리타 말리와 사이에 난 첫 아들 지기 말리도 레게 뮤지션. 이 다큐멘터리의 책임 제작자이기도 하다.
▶자메이카 국장=사망 10일 후 자메이카에서 국장으로 치루어졌으며, 고향의 교회당 인근에 묻혔다.
▶말리 모음 앨범 '레전드'=그의 곡을 모은 앨범 ‘레전드(Legend)’가 1984년 출반되어 2500만장이 팔리며 레개 음악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음반(플래티넘)이 됐다.
▶‘엑소더스(Exodus)’=1999년 타임지 선정 20세기 최고의 앨범 선정. 2001년 그래미상 평생공로상 헌사. 1994년 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될 때 U2의 리더 보노가 사회를 봤다.
음악 만큼 축구를 좋아했던 말리는 발가락 부상으로 인한 피부암으로 사망했다.
흑인과 백인 사회의 '아웃사이더'
▶인터뷰를 꺼린 이유=케빈 맥도날드 감독은 말리와의 인터뷰 자료가 없는 것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말리는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했으며, 특히 자신의 인종에 대한 질문을 듣고 싶지 않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들 지기가 본 아버지=레게 뮤지션 지기 말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흑인이 아닌 것이 유감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자메이카 국경일=1990년 2월 6일 말리의 생일이 자메이카 국경일 되다.
▶아들 로한과 로린 힐=자넷 헌터와 사이에 난 축구선수 아들 로한 말리는 그래미 상을 휩쓸었던 힙합 가수 로린 힐(Lauryn Hill)과 사이에 다섯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러나, 로한은 유부남이었다.
축구선수 로한 말리는 팝의 진주 로린 힐과 사이에 다섯명의 아이를 두었다.
▶평화의 노래, 하나의 사랑= 그의 노래 ‘One Love’에선 평생 아웃사이더였던 말리의 위안 귀절이 나온다. "Let's get together and feel all right."
*One Love
▶’아랍의 봄’ 데모 송=튀니지아에서 시위가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Get Up, Stand Up’을 불렀다. 과일상이 혁명을 촉발하기 위해 자살한 후 근처 벽엔 이 노래의 제목이 써 있었다.
▶밥 말리 페이스북=사망한 지 30년이 지난 밥 말리의 Facebook 팔로어는 3000여만 명에 이른다.
자메이카 밥 말리 고행 나인마일스의 뮤지엄에 전시된 에피포네 기타. Photo: Jasonbook99
'레게의 전설' 재조명 붐
▶다큐 제작자=밥 말리 다큐멘터리 ‘말리’ 프로젝트에 처음 손 댄 제작자는 2008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었다. 2010년 2월 6일 말리의 탄생 65주년을 기해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스콜세지가 하차한다. 이어 ‘양들의 침묵’ 감독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조나단 데미로 대치됐으나 편집 도중 제작자 스티브 빙과의 갈등으로 떠났다. 이로써 케빈 맥도날드가 연출 책임을 맡았다. 맥도날드는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 이야기를 그린 극영화 ‘The Last King od Scotland’를 연출했던 인물이다. 말리의 아들 지기 말리(Ziggy Marley)도 제작에 참가했다.
▶또 다른 다큐=말리의 전 애인 에스더 앤더슨과 지안 고도이가 ‘밥 말리: 전설 만들기(Bob marley: The Making of a Legend)’를 2011년 에딘버그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
▶전기 영화도=밥 말리의 극적인 삶을 할리우드가 도외시할 리는 없다. 와인스타인 컴퍼니는 2008년 리타 말리의 회고록 ‘No Woman, No Cry: My Life With Bob Marley’을 원작으로 극영화를 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